우리가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을 때, 결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시편의 약 70%는 애가(哀歌)이다. 다시 말해, 슬프게 울부짖는 노래들이다. 참다운 애가는 결코 하나님의 가치에 도전하거나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서글픈 상황에 유일한 소망임을 알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더라도 기본적인 신뢰가 있어야 하며, 그러기에 경배해야 한다. 경배는 어던 장애물도 극복하며 고통받는 신자의 마음에서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귀중한 찬양의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들은 '심지어 가장 막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도, 나는 눈부신 당신의 가치와 선하신 당신의 마음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지만, 어떤 환경이나 시험도 절대 당신을 가려 버릴 수 없습니다.' 라고 외친다. 이것이 희생을 치른 찬양이며 심지어 상처를 입은 찬양이다. 그러나 희생은 자주 상처를 입니다.
시편은 사실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에 드리는 찬양' 으로 설명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처럼 보이든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든지 간에, 모든 상황을 이기는 것은 경배다. 절망의 장소에서 하나님께 깊이 부르짖는 것이 이러한 애가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경배' 인가, 아니면 단순한 '불평' 인가? 어떤 측면에서는 불평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이러한 탄원들은 상한 백성의 경배곡들이다.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그 애가들은 또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확신과 신뢰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기에 진정한 경배이다. 앤더슨(B. W. Anderson)은 이렇게 설명한다. "...애가는 진정 찬야의 표현이다. 이 찬양은 여호와가 신실하다는 확신을 단조로 드렸다..."
이런 이유로 나는 시편 89편을 좋아한다. 처음 언뜻 보았을 때, 그 시편은 전혀 애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로 시작하는 낙관적인 구절 때문에, 이 시편은 평안한 마음에서 나온 경배곡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49절을 읽을 때, 우리는 시편 기자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투쟁을 발견한다.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그는 분명히 모순되지 않는가?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해 하는 것 같더니 그 인자하심이 어디 있냐고 의아해 하지 않는가? 그렇다! 현재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강하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실적을 자세히 조사했고, 그 실적이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과 신뢰의 노래를 억누르지 못하고 올려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끔찍하게 고난을 받으셨을 때, 시편의 애가들을 사용하셨다. 마음, 정신, 육체와 영혼이 괴로워서 예수님은 부르짖으셧다.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이것은 고통의 외침이지만, 이상하게도 복종하는 헌심의 외침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은 또 다른 시편의 애가인 31편에 나오는 구절과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 놀랍게도, 극도로 고통스런 이 순간에 예수님은 그 당시에 일반적이던 경배의 노래를 올려 드리고 계셨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격려자가 되신다. 삶에 어떤 시험이 닥쳐오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끊이지 않는 경배의 찬양으로 억누를 수 없는 경배자를 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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