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모라비안 선교의 지도자 진젠도르프 백작

예림의집 2008. 9. 21. 21:02

모라비안 선교의 지도자 진젠도르프 백작

(Count 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


18세기 개신교 선교역사에 큰 공헌을 한 진젠도르프 백작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 제일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교회연합운동을 시도하였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세웠으며 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선교의 위대한 세기”가 오도록 윌리암 캐리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데 있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 부유한 독일 귀족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건주의자인 할머니와 숙모의 품에서 자라나 자연스럽게 영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관심은 그가 받은 교육에 의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열 살 때 그는 할레에 가서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에서 위대한 루터교 경건주의자인 프랑케로부터 커다란 영적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열심 있는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 선교회는 기독교적 형제애를 가지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함으로 “세계의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서약하였다.


학업을 마친 진젠도르프는 비켄베르크에 가서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공직을 수행하기 위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그 길에서도 아무런 만족이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1719년 유럽을 여행하던 그는 한 미술품 전시회에서 ‘이 사람을 보라(Domenico Feti의 그림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는 것을 그린 그림)’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세주께 대한 마음의 빚을 갚겠다는 결심을 한다.


1722년 한 그룹의 기독교 피난자들이 진젠도르프의 영지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백작은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삶의 기회를 잡게 된다. ‘헤른후트(주님의 보호처)’란 이름으로 명명된 그의 영지에 종교적 피난자들이 몰려들었다. 첫 번째 피난자가 온 지 5년이 지난 1727년, 성령께서 헤른후트에 강하게 역사하셔서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이 영적 부흥으로 진젠도르프와 공동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선교와 헌신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사소한 차이로 인한 공동체의 존립까지 위협했던 말썽이나 갈등이 사라졌다. 대신 하나님께 대한 의뢰심과 공동체 의식이 고조되고, 하루 24시간 동안 일주일 내내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 기도운동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한스 에게드에 의해 개종한 2명의 사람들로부터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요청받는다. 이 일로 인해 백작은 강한 책임감과 긴박감을 가지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이후 20여 년 동안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 전에 모든 개신교와 성공회가 보냈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진젠도르프는 선교의 지도자로서 직접 선교의 일선에 나서기도 하였다. 파송한 선교사를 지원하러 가기도 했고, 선교사역의 기반을 잡는 기간 동안 선교지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피고 후원하기 위해 33년을 해외에서 보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평신도로서 신학자의 훈련이 아닌 복음전도자의 훈련을 받았다. 대부분이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었고, 장래성 있는 개종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신앙을 증거 하였으며 원주민들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아주 간단한 메시지만을 전했고, 회심 전까지는 어떤 교리도 가르치지 않았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부인인 에르드무트가 죽자 농부 출신의 안니 니취만과 재혼했다. 안나는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매우 헌신적인 모라비안 자매였다. 그러나 그녀는 진젠도르프에게 영적 신비주의의 영향을 크게 미쳤다. 그리고 백작과 모라비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였는데, 너무 지나쳐 나중에는 광신적 신비주의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에 집착하여 복음적인 기독교 전통에서 벗어났고 선교사역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어서 그들은 다른 사람과 선교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져 갔고, 활동적으로 일하는 선교사들을 아직 영적으로 깊은 체험에 도달하지 못한 이로 치부했다. 모라비안 선교의 몰락 직전, 백작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는 그와 공동체의 영적상태가 심히 어두워진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처하며 다시금 선교사역에 매진하였다.


선교역사에서 진젠도르프의 최대 공헌은 그가 많은 남녀 선교사들이 복음 증거 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