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교도의 사도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19세기 말, 전 세계로 퍼진 학생자원자들의 선교 열정은 기독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 세계에까지 선교사를 보내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니일에 의하면, 이슬람 선교의 장을 연 레이몬드 룰(13세기) 이후 수세기 동안 이슬람 지역은 기독교의 선교 대상에서 항상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1860년대 영국 성공회가 이슬람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한 후 다른 교파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된다. 한편 교단의 특별한 도움 없이 진행되었던 학생자원자 운동의 헌신자였던 사무엘 즈웨머는 무슬림들에 대한 선교 노력을 통합하고, 세계 교회가 이슬람권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수많은 학생자원자들은 가장 어렵고 보상도 없는 이슬람권 선교사역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게 된다.
즈웨머는 1867년 미시간 홀랜드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열다섯 자녀 중 열세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기독교적 배경에서 양육되었으며, 그의 다섯 형제 중 4명도 목회자가 되었고 누이인 넬리 즈웨머는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즈웨머가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호프 대학에 재학 중일 때였다. 그는 순회선교동원가였던 로버트 윌더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5명의 학우와 함께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즈웨머는 신학교육과 의료교육을 받고 친구인 제임스 캔틴과 함께 개혁교회 선교부에 아랍지역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아랍 선교사가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당시 선교부의 정책으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미국 아랍선교회를 조직하여 모금 운동을 시작했는데, 자신들의 필요를 모금한 것이 아니라 “즈웨머는 캔틴의 후원을 요청하고, 캔틴은 즈웨머의 후원을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즈웨머는 “담임 목사들의 냉담한 반응이 가장 큰 장애 요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9년 모금여행을 마친 캔틴은 아라비아로 떠났고, 1890년 즈웨머도 뒤를 따르게 된다. 그들의 출국과 헌신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도 몰랐다. 다행히 1894년 미국 개혁교회가 이들에 협력을 제안했지만, 페르시아만의 사역 초기는 진전도 없고 반대가 심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즈웨머는 낙심치 않고 성공회 선교사들과 동역, 시리아인 개종자와 함께 사역을 계속했다.
1895년 즈웨머는 간호사 선교사였던 에이미 윌크스와 결혼하고, 1897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후 즈웨머 부부는 바레인의 무슬림들을 위해 사역하였다. 전도지 배포와 노방전도, 가정 방문 등을 계속했으나 냉담한 반응과 더위, 8일 간격으로 어린 두 딸이 죽는 등의 슬픔과 역경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즈웨머는 자신의 운명에 감사한다고 기록하였다. 1905년 아랍선교회는 4개의 기지를 갖게 되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개종자들도 자신들의 새 신앙을 고백하는 데 비범한 용기를 나타내곤 했다.
즈웨머는 회교권 선교사 총회의 초대의장으로, 미국에서 학생자원운동의 순회강사로 사역하고, 개혁교회의 해외선교부 현지 총무가 되어 다양한 사역을 쉴 틈 없이 감당하였다. 1912년에 그는 카이로에서 전 이슬람 세계를 위해 선교사역을 통합하기 위한 시도의 중심에 초청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카이로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카이로의 교육받은 청년들이 서구로부터 온 지식인 선교사들에게 개방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슬림 대학인 알 아즈라 대학의 지도자들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17년간 카이로에 선교본부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회의, 기금확보, 다른 지역의 회교도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즈웨머는 언제나 무슬림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자신의 신앙을 나누고 그들에 대한 최대의 존경을 표시하며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였다. 비록 그의 사역으로 인한 개종자는 적었지만, 이슬람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전 기독교 세계에 일깨우게 된다. 말년에 그는 프린스턴에서 가르치는 일을 감당하였고, 40년동안 <회교도 세계>의 편집자로도 일하였다. 허버트 케인에 의하면 이 책은 “영어권에서 회교 선교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저널이었다”고 한다.
활발한 사역을 감당한 즈웨머의 일생은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린 딸들과 동료와 두 아내의 죽음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낙관적이었고 유머와 농담을 즐겼는데, 사물의 밝은 면만을 보려고 애쓴 그의 성품은 황무지 같은 이슬람권에서의 고통스런 선교사역에 꼭 맞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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