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찬양팀 영성 훈련

찬양인도자가 되려면........

예림의집 2008. 8. 12. 10:07

김진호 목사

이제 예배 세미나가 하프 라인을 넘어 골대를 향해 전진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예배에 대한 것은 역사적 고찰을 통해 공부가 되었다. 이제는 찬양에 대해 조금씩 실제적인 부분과 연결시켜 말씀을 나누기 바란다. 그래서 오늘은 찬양인도자가 되려면 이 부분을 나누고자 한다. 지금 개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음악활동을 통해서 찬양을 인도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시오. 앞으로 내가 주님의 기름부으심 속에서 그러한 사역을 하기 원하는 사람, 주님께서 은사도 주었고, 은사 이전에 달란트(재능)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의해서 은사도 주실것으로 믿고 내가 그렇게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시오.
네, 그러면 모두가 찬양 인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더 깊이있는 찬양인도자가 되기 원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누가 정확히 가르쳐 줄 능이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기준을 설정해 주고 있는가를 보면 아마 성령님께서 오셔서 각자 본문을 통해서 더 깊게 계시해 주시는 은사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찬양 인도자가 되려면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을 소유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찬양 인도자라고 했을때 찬양은 PRAISE, 보통 한국에서는 찬양 인도자와 예배 인도자를 따로 보지 않습니까 ? 그런데 우리가 훈련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찬양 인도자라는 개념속에 예배 인도자까지 다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예배 인도자가 되려면" 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하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찬양 인도자"라고 명명하면서 찬양과 예배 그 부분까지 연결 시켜서 보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예배에 대해 공부하면서 "예배가 삶이 되고 삶 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예배의 성서적인 독특성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삶,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가 주님 앞에 예배적인 관계성을 성립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없늣모째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찬양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번째 사울과 같은 인격이 우리 가운데 있어선 않되겠다는 말입니다.

왜 여기 사울이 나오느냐 하면, 16장에 사울과 대칭되는 인물로 다윗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6장 1-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길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찌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옴독릿 스스로 성결케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여기 사울에 대해서 특별하게 그가 어떻다고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기 1-5절까지를 핵심적으로 놓고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놓고 볼때 사울의 전체적인 삶을 이해하고 있는 사 람들로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에 대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인격 중에서 반예배적인,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한 인격. 여기에서 단지 나타나 있는 것은 새로운 왕을 위해 기름 부으러 갈 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라고 하는 그런 것.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거기서 부터 떠났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그 실제 정권, 왕의 권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왕권에 대해서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주장하는 관계성 속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기 전에 수 많은 그의 삶의 모습을 놓고 볼 때 그 이후의 삶의 모습을 놓고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지극히 그는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인도자에게 있어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패턴이 굳어져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앞에 순간순간 나가서 깨뜨리지 않고서는 찬 양인도자로서 민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의 처소로 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자신, 나 중심적인 생각이 살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자 하는 길을 알 수가 있고 또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사울과 같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찬양 인도자로서 심각하게 체크해야 할 부분인것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 교만은 사단의 배설물이지요. 사단이 원래 사단이 된 것. 그 자체 가 바로 하나님 보좌위에 자기를 높이리라고 하는 "내가..... 하리라" 빌리 그래함은 그의 천사론에서 "The Satan of I will." 하는 것은 사탄이라고, 그것도 자기 중심적인 부분이다 라고 하는것이죠. 교만과 자기 중심은 함께 비례적인 관계속에서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너무 잘 알기때문에 강조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 앞에 순간순간 나가서 내가 주님보다 먼저 나가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걷X 대해서 철저하게 당신의 빛 앞에 볼 수 있는 그러한 자세, 그것은 하나님의 겸손을 우리내면에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모습인 줄 압니다.

그래서 첫번째 조건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것은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이 우리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관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심을 알아야합니다. 16:6-9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실 이렇게 말한 그 이유는 뭡니까? 사울이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죠. 키가 크고 늘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이 말씀은 사람은 무엇을 보는데 빠르다고 하는것입니까? 외모를 보는데 빠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외모를 먼저 보지 않습니까? "아 저기 있는 사람 멋있다." 그런데 사실 겉모습이 멋있는것, 그것에 매혹되어선 않되고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는가" 거기에 매혹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관심은 사람의 외모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에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시각도 주님의 시각을 가져야 할 뿐더러, 우리의 내면세계를 주 께서 그렇게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전도단에서 D.T.S 6개월동안 훈련하는데 6개월 가운데 3개월 강의 코스에서 가장 크게 강조하는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면화되지 않고서 아무리 전도 잘 할 수있는 기술적인것을 많이 가르쳐 준다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지 않는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가장 우선권을 두고 지칭하는 촛점이 어디에 있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내 마음의 중심의 아름다움에 있다는것을 알고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쫑아갈 수 있는 준비자세가 되어있어야 겠습니다. 마음들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데 이 마음 저 마음 속에서 갈등 하는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 보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을 내 마음속에 확인하면서 그 심장따라 잡으려고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것을 향하여 쫑아가노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앞에서 그 분이 보여주신 그 분의 심장은 이해하면서 그것을 내 가운데 인식시키면서 날마다 그의 심장이 약동될 수 있도록 그 분의 마음을 쫓는 < 사람, 하나님의 심장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찬양 인도자로서의 근본을 세워가는 사람인것입니다.

그 다음에 근본적 조건을 다음과 같이 16절 이하에서 보겠습니다.
첫번째 목자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분부한 그 사명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의 음성을 철저하게 들으면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예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의 음성을 청중하는 사람인 것을 압니다. 맨 처음에 사무엘이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을 때도 그 분의 음성을 듣는데서 부터 우리가 부름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찬양인도자로 부름을 받을 때는 그 음성을 듣는 그 부분, 그 훈련, 그 열린마음에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찬양인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사무엘의 부분보다는 다윗이 갖고 있던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끝까지 철저하게 완수할 수 있었던, 완수하려고 하는 그 근본적 성품이 그 안에 내재화되어있던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 이렇게 봅니다. 작은 일에 신실하는 그러한 삶의 모습이 생활속에서 체질화 되어있지 않았나 전 이렇게 봅니다. 작은일에 신실픽살 때문에 어떤일이 그에게 맡겨질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 여기 맥락에서는 집에서 양을 치는 그 일, 자기에게 맡겨진 그 책임의 분량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그러한 자세가 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여기 어떻게 기록되어, 어떤 상황속에서 아직 그가 집에 없었고 나머지 형들은 다 집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형들은 일찍 대충하고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가 질때까지 한 양이라도 맹수에게 잡혀서 먹히지 않도록 끝까지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지 않았나 우리가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프렁의 사랑의 기술 읽어보셨죠 ? 거기 사랑의 조건중의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요구에 응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랑, 그 능력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책임감이 있는 사랑입니다.
자,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삼 사백마리 있는데 그 삼 사백마리를 맹수의 이리 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우리에서 나올때 부터 들어갈 때까지 양들은 그 보호를 받아야 되는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성 속에서 목자가 목자로서의 책임을 다 했을때 그목자는 양을 향하여 사랑을 다 줄 수 있는 목자라고 우리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것입니다.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찬양인도자는 하나님의 양, 우리는 다 하나님의 양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몸 가운데 나도 양이지만 주께서 하나의 기능으로서 찬양을 인도할 수 있도록 몸속에 세워주시고, 하나님의 양을 하나님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의 역사속으로 몰고가는 사역이 바로 찬양인도자 입니다. 그럴때에 찬양인도자는 찬양드리러 온 사람들의 바똑, 요구가 무엇인가,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하는것에 대해 하나님의 가르치심 그것을 지식의 은사라고도 볼 수 있겠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통해서 알고 그 부분을 풀어주면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자와 같은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그 분들의 삶이고 나의 삶인데, 나는 그냥 테크니컬하게 찬양을 멋지게 인도하며 이들의 마음을 높이 공중에 띄웠다가 뭔가 좀 흥분되고 감정적으로 억눌러진 것들이 풀어지고 하는 것만 함으로써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인본주의적인 찬양인도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왔고 주께 참으로 은혜를 구하면서 주님 나에게 보여주시옵소서. 이 가운데 어떤 심령으로 와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그래서 찬양을 인도할 때에 곡을 쭉 기도하며 뽑아왔지만 주께서 다른 부분에 말씀하시면 그 부분으로 찬양을 인도해 나갈 수 있는 성령의 민감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럴때에 몸 속에서 풀어지는 역사가 있고, 치유되는 역사가 있고, 온전케되는 역사가 있다라고, 그것이 바로 목자가 하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기능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 12-13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들에서 돌아온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이는 그 이후로 더 큰 찬양의 역사를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우리가 보겠지만 사울이 악신이 들려있을 때에 그가 수금을 취하여서 손으로 탄 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 떠났다고 하는것, 그렇게 칠 수 있는것, 귀신이 붙었다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름부음이 그 위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에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연주하는 수금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의 역사가 흘러나갔다고 하는것, 그래서 그의 영혼을 스며들기 시작했고 사울의 영혼가운데 어두워져 있는 귀신이 들려 있는 그 부분에서 부터 자유케되는 은혜가 있었던것을 우리는 이 16장 23절 부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 찬양인도자에게 중요한것은 찬양 인도하기 이전에 주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이전에 성막을 배운 것처럼 나 개인 예배를 통해서 감사하고 또 단에 나아가서 십자가 안에서 처리된것을 다시 확증하면서 물두멍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구원, 다시 말해서 성화의 과정 주의 보픽태 공로에 의지하고 나 자신을 씻어나가는 그러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성소안에 들어가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강화시키면서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주님을 깊게 만나고 예배하면서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온전한 모습으로 가꾸고 나와서 성령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모습으로서, 찬양을 인도할 때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찬양의 역사가 놀랍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방을 통과하지 않고 찬양인도하는 단에서는것, 사람들 앞에 서는것은 조금 우리가 삼가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

혹시 시간이 않되어서 그럴 경우에는 계속해서 내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주께서 보혈로 덮어 주시고 새롭게 나 자신을 강건케 하셔서 믿음으로 "주님 내가 섭니다"라고 했을때에 하나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시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혹시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가 되었을 때 내가 그것을 그러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어서 오는 찬양은 엉망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 셜담 계속해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그 대전제를 놓고 볼때는 그런 면에서 너무 우리 자신을 참소하고 또 규격에 맞추어서 찬양인도자의 준비를 너무 그렇게 하는것도 올바르지 못한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연주를 잘 해야 한다. 물론이죠. 14절부터 1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화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탯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 이왕이면 잘 탈 줄 아는 사람. 좋은것이 좋지 않습니까 ? 수금을 잘 타기 때문에 귀신이 떠난다, 악신이 떠난다.

그것은 아니죠. 그것은 찬양인도자가 찬양의 역사를 더 깊이있게, 폭 넓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더 훈련함으로 말미암아 준비해야 할 부분으로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름 부음은 없는데 연주만 잘한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음악적으로 찬양이 "잘 조화를 이뤄" 주님앞에 올리워 진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사실 그것은 하늘을 뚫을 수 없고 천장을 뚫을 수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찬양은 천장을 뚫고 하늘 보좌를 치게 되는것입니다.
하늘 보좌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데려다가, 악사를 데려다가 주의 찬양을 위한 곡을 맡겼다고 할 지라도 그들에게 궐수 부음이 없다면 그것은 공간만 미학적인 면에서 아름답게 가꿀 뿐이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 시킬 수 있는것은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우선권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아시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프라이버러티를 두시고 연주는 더 나은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라고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인식인 줄 압니다.


지금 우리가 보려고 하는것은 호기와 무용과 삼변이 있는 준수한 자였더라 하는것, 이 부분인데 특별히 그 호기 굉장히 담대한 인물이었다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과 싸우는 장면속에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 사무엘상 17:45에 보면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능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또 47절에 보면 "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려함이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 용감성이라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용감성, 감정적인면에서 나온 어떤 불그러진 용감성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된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에 기초된 신앙인이 가질 수 있는 그 용감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담성, 우리가 이제 예배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할텐데 이런것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만이 용맹을 발할 수 있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 번 따라해 봅시다. "예배하는 자 만이 용맹을 발할 수 있다." 여러분 믿습니까 ? 예배자만이 용맹을 발할 수 있는것입니다. 제사장만이 용맹을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유내강 되어있기 때문에 내 속에 강하신 하나님이 나 자신을 허락할 때 주께서 나를 통해 드러나셔서 전격적으로 내 앞에 나가서 싸우시는 역사를 내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내 삶 속에서 대장이 되셔서 나아가서 싸워 주실 수 있도록 허락해 드리는 그런 삶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을때 찬양을 인도할 때도 우리가 찬양 인도자로서 그렇게 선봉대에 서서 싸워 줄 수 있는것입니다. 찬양을 인도하면요, 주님께서 영적으로 보여 주시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주님께선 대적하라고 하실 때는 찬양을 인도하다가 완전히 다 멈추면서 몸 안에 있는 더러운 악한 영들에 대해서 대적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에 몸이 풀어지기 시작하고 보혈의 능력안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보혈의 능력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다음에 따라오는 역사는 성령의 그 능력, 성령의 역사가 따라오게 되고 그 안에서 뒤집어지는 그 하나님의 만지는 역사, 쥐어 흔드는 역사, 그 역사가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찬양인도자는 영적전쟁에 있어서 최선봉자로서 영적인 안테나를 가지고 그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 분별하면서 찬양의 길을 만들어서 인도해 나가는 사람 인것입니다. 앞에 영적인 면에서 더러운 부분들이 보이면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대적하고 길을 내어서 하나님의 양들이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섬기는 그런 사역을 감당하는 분이 찬양인도자 인것입니다. 18절 하반절을 봤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셔야 된다" 이 부분은 기름부음을 받아야 된다라고 하는 부분과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되고 19-20절을 우리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이새가 떡과 한 가죽 부대의 포도주와 염소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 아들 다윗의 손으로 사울에게 보내니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이 부분을 놓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것은 그 가운데 다윗에게 섬기는 마음이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 물론 목자의 마음과 섬기는 마음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이 섬기는 마음이 없을 때는 어떻게 끝까지 책임을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찬양인도자가 찬양인도자로서 오늘 예배 현장에 와있는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성령안에서 민감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주님으로 부터 듣고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깊게 연구하면서 나아가는 자세, 하나님 보좌앞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찬양인도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섬긴다라고 하면 물 주전자를 들고 가서 이것 좀 드십시요 라고 하는 그런 관계로만 우리가 자꾸 생각하는데 그것보다도 직접 각자 그날 그날 온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과 만나서 풀려 질 수 있도록 섬김의 길을 마련해 주는 그런 사역, 그것이 그 섬김의 엣센스, 본질적인 부분이다라고 우리가 해석을 하면서 이 찬양인도자로서 그런 차원의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럴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겼던 것처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민망히 여긴다 "컨페셔네이트" 컨패션이라는 단어의 원래적인 뜻이 뭐냐하면 옛날에는 약탕기에다가 다리고 나서 사발에다 뭘 넣습니까 ? 삼베 보자기 넣죠 ? 삼베보자기를 넣고 그 다음에 약을 다 다리고 나서 턱 놓죠. 그 다음에 대나무 두개를 가지고 말아서 꾹 짭니다. 그 그림을 다시 설명하면 그 그림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민망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상대방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갖는데서 시작하고 그 다음에 그 똑같이 갖는 마음이 될 때에 그 상대방의 아픔에 깊게 동참하고 깊게 동참할 때 전달된 그 아픈 마음 그 심장을 어디에다가 그 삼베 보자기에다가 넣고 십자가를 두 막대기라고 생각 구용 그 두 막대기를 갖다가 자기의 심장을 꾹 쥐어 짜는것입니다. 그런 원어적인 의미가 있는것입니다. "자기 심장을 놓고 쥐어짠다." 그게 "컨페션"하다. 민망히 여기고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는 날마다는 아닌데 그렇게 주의 사역앞에 설 때마다 주님, 주께서 당신의 무리를 볼때에 가지시는 그 불쌍히 여기는, 민망히 여기는 그 시각을 내 심장속에 이식해 주소서. 주님의 심장으로 내가 사역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것이 말씀을 인도하는 것이든 찬양을 인도하는것이든 기도를 인도하는 자리든 무슨 자리든 간에 상담을 하는 자리든 간에 그러한 마음으로 일을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것이 사역을 하기전에 제가 갖는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인것 입니다. 그래서 남의 아픔에 대해서 깊게 이해하고 아버지께서 그 아픔에 대해서 이해하는 그 아픔으로 내가 느끼면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을때 능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인도에 섰을 때 기름 부어주시고 그 찬양의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근본적인 준비를 그렇게 한 다음에 찬양을 인도하는자든 찬양하러 온자든 들어간 사람들에게 필요한 부분, 그 부분으로서 놀라운 찬양과 예배의 시간을 경험하려면 하는 타이틀로 우리가 함께 다음과 같은 여섯가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 빛 가운데 마음을 체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24: 3-4를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는 목적하나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높이는것입니다. 주님을 높일 때에 우리에게 오는 그 결과적인것은 여기 5절에 표현 되어 있는것처럼 하나의 복 곧 주의 복이다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복인데 그 복을 받는 관계성 속에 우리가 들어 가기 위해서 맨 먼저 우리가 주님 앞에서 봐야할 부분으느내 마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하는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빛되신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면 빛과 어둠이 함께 상합할 수 없게 되는것입니다. 함께 만날 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군고,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자라고 했습니다 ! 그래서 우리마음이 생활이라고 하는 삶의 현장속에서 우리가 생활을 해 나갈때 세상으로 부터 온 여러가지 영적인 먼지, 또 더러움 그 부분들을 어떻게 해야 되는것 입니까 ? 주의 보좌앞에 주의 십자가 앞에 성결케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터 예배의 문이 열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배의 문이 열려질래야 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성결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주님 보좌를 향해서 들어갑니다. 들어 갈때에 우리 가운데 있는 무엇을 내려 놔야 합니까 ? 짐을 내려놔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짐을 주님앞에 내려 놓아야 하는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지하철을 탔습니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표를 넣는 곳,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체크했다고 봅시다.
이미 지불했기 때문에 체크해서 주님께서 보혈로 우리 죄를 위해서 다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주님 보좌앞으로 나아가려고 구원열차를 타고 그의 영광을 맛보기 위해서 들어갈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짐을 다 주께서 맡겨 주셨다고 하는것을 그것을 믿음으로 확증하고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나아갈 때에 주께서 이미 죄에 대한 댓가를 당신의 죽음으로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표 검사때는 Free pass 할 수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지하철이 오고 우리가 탔습니다. 그 때에 우리 가운데 있는 그 짐 그것은 전철에다 내려 놓아야 되는것입니다. 물론 그 짐 가운데 죄의 짐도 있지만 여러가지 생활속에 가지고 있는 짐이 있지 않습니까? 실제적으로 죄와 관계없는 짐이 있습니다. 정신적, 정서적 짐이 있고 장래에 대한 염려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것을 짐으로 놓고 볼 때 그 짐을 내려 놓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내려놓지 않고 구원열차를 타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우리 심령 가운데 부어지고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흘러 나가면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자리에 들어 가지 못한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결함을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 가슴안에 들어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부분으로서 또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짐을 완전히 주님앞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맡겨 드려야 한다고 하는것입니다. 아직 다 이뤄지지 못한 것, 앞으로 계획된 모든 것, 내 생활 속에 계속해서 염려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다 내려 놓아야 된다라고 하는것입니다.

자, 여러분 ! 종로역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전철을 탄 어떤 사람이 한 30kg 되는 짐을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늘과 같이 이 더운날 서있다라고 하십시다. 자리도 있고 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왜 그렇습니까? 그 전철은 전기료가 들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들고 있으나 내려놓고 있으나 마찬가지 이지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 왔으면 다 맡겨야 된다구요.
다 사함 받았다고 할찌라도 그런 내 가운데 있는 무거운 짐을 다 맡기지 않으면 주의 영이 오셔서 그 맡겨진 여러가지 짐 때문에 마음의 짐, 정서적인 짐 그러한 짐들 때문에 성령께서 들어 오셔서 쉬이 역사 하시려고 해도 역사치 못하는 관계성 속에 서게 된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속에 있는 사람들이 찬양인도자가 인도할때 주께서 보여주시거나 발견되면 그 부분을 처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터치 하신다. 감사한 것은 앞에 믿음으로 서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보여주시기 시작하죠. 얼굴만 봐도 저 사람 어떤 어려움속에 있구나 하는것을 주님께서 간접적으로 일러주시는 은혜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전체적인 영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면서 전반적인 많은 사람들이 디플레이스 되어 있다고 할 때 그 문제를 말씀으로 풀어줘야 하는것입니다. 찬양인도자라고 하는것은 그냥 찬양만 한다, 노래를 부는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성령께서 오셔서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도록 기다리는 훈련도 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전체적인 것이 다 들어가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찬양인도를 시작했는데 한 삼분지 일 되는 사람들이 주님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말이죠.
다 죄사함을 받았고 그런 시간을 다 가졌는데 아직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때가 차매"를 부르고 있다라고 생각해 볼때 영적으로 그 소리는 예쁘지만 심령상에 내려 놓지 않기 때문에 때가 차매 보이면 그건 풀어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목자의 입장에서 섬기는 입장에서 그래야 할렐루야, 주의 치유하는 역사가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것입니다. 그럴때에 하나님의 힘의 이동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오고 우리의 삶에 현장속으로 흘러 터져나가게 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찬양인도자의 사명이 얼마나 큰지 아시겠죠 ? 놀라운 사역입니다. 말씀을 전한다라고 하는것, 보통 우리가 예배의 핵심을 무엇으로 생각하죠 ? 말씀, 멧세지, 브리핑하는 시간 그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도 중요하죠. 그러나 전체적으로 하나라도 빠질 수 없는 부분인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앞에서 강조 될 수 있는 그러한 부분들이 전부 라고 할 수 있는것입니다. 순서와 절차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이렇게 오픈 미팅으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사로 잡으시고 역사케 하실 수 있도록 하는 셋팅을 마련하고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질때는 더욱 더 민감성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래서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세번째 하나님께서 역사해 오신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출 15:1-18을 보십시다. 우리가 광야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원의 드라마를 경험하고 이제 하나님앞에서 그 분을 찬양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이 출애굽기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 윗 구절이 어디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역사들, 그것이 초자연적인 역사든 아니든 간에, 큰 일이든 아니든 간에 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 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시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속에 역사하신 그 일에 중점을 두면서 그 분을 높여야 한다는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막을 공부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강조하지 않습니다. 역사, 그 분께서 행하신 큰 역사 가운데 가장 큰 핵심이 무엇이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일로 세미하게 역사하신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면서 주님을 높여 드리는것입니다.그러할 때에 시간적으로는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영원속에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세 가지 시간대의 개념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오늘 시점 이전에) 내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들에 대해서 주께서 기억나게 하시면 그 부분들을 생각하면서 "주님 이러한 일을 내 삶속에 행하신것에 대해서 내가 다시 한 번 감격합니다"

여러분이 물에 빠졌다고 상상합시다. 물에 빠졌을때 여러분을 건져준 그 사람을 주기적으로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감사의 전화를 했을때에 그 사람은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는데 구속하신 그 일에서 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 수많은 일들을 우리 삶 속에서 행하셨는데 그 일들에 대해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한 일들을 행하셨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고 하면서 확인 하면서 사랑을 드리는것, 그것은 찬양 하는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현재 내 생활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부분들이 있죠.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일이든, 그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우리가 믿을찐대, 육신적으로 볼 때 나쁜일, 힘든일,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면서, 선하게 인도하실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감사하는것, 우리가 지금 현재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 행하고 계신 그 일들을 놓고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미래 (마음의 소원과 삶의 비젼을 연결해서) 주님 주께서 내 삶 속에서 이러한 비젼을 허락해 주시고 이 비젼을 내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줄것을 믿습니다. 기대합니다.
주님 그러므로 내가 이 일속에 오셔서 역사하실 주님을 높여 드립니다. 믿음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는것입니다. 이 찬양은 그냥 노래로만 하는것이 아니죠. 우리의 입술의 고백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 놀라우신 일을 행하실 주님, 기대합니다. 바라봅니다.
주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내 자신이 죽어지고 내 속에 새로운 소망을 두시고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실 주님을 믿사오니 주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주님, 주님을 높여드립니다 라고 했을때에 주님은 계속해서 은혜의 문을 여시고 내 삶속에서 역사하시는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입니다. 찬양은 이 세가지 부분,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성을 놓고 해야 됩니다.


네번째, 믿음 안에서 전 인격을 하나님께 맞추라고 하는것입니다. 점점 이제 찬양에서 예배의 관계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맞추는것입니다. 전 인격,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하는 부분. 예배의 핵심구절인데 그 말씀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과 정성과 마음과 힘과 모든것이 전체적으로 주님께 촛점이 맞춰져서 내 전체가 주님께 들려진 바 될 수 있도록 주의 영에, 주의 말씀에 의탁하는 기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62:1,2를 봅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 는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하나님께 전체의 인격을 드려야 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그 심령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 잠잠히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주님께서 제 삶 속에 계속해서 여호와를 바라라고,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람의 법칙, 바라는 법칙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전 인격으로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 전제 되냐하면 하나님앞에 전폭적인 신뢰가 전제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전폭적인 믿음과 신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주님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것입니다.
왜요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 인격을 주님께 맞추면서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까지 주께서 말씀하실 때 내가 듣겠나이다는 청중하는 자세로 주의 보좌앞으로 나아가는것, 그것은 주님앞에 잠잠히 있는것입니다. 요동치 않는 자세인 것입니다. 시 115:9,10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의 방패 시로다" 여기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라. 아까 바라보기 위해서 전제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것,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으면 흔들릴 수 밖에 없는것이죠. 우리의 신앙이 주님 앞에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고 그야말로 멍 뚫린 가슴이 됩니다.
의지한다고 하는것은 반석되신 주님께 나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잇장과 같은 나약한 존재이다.

전 저 자신을 분석하고 분석해 보면 종잇장과 같은 존재라고 밖에 고백할 수 없는데, 이렇게 나약한 존재이지만 반석되신 주님앞에 나 자신을 척 붙이면 사단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