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②

예림의집 2022. 5. 14. 12:23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②

 

너무나 자주 내가 드리는 경배는 복잡하고 투쟁적인 이 세상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난 하나님을 향한 나의 불이 심지어 가장 강한 반대 물살에서도 꺼지지 않고 씻겨 내려가지 않는 곳, 즉 결코 사라져 버릴 수 없는 경배 가운데 있기를 열망합니다. 불을 끄는 사람들은 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때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즉 열과 산소와 연료 중에 하나를 차단합니다. 다시 말해, 불을 끄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타고 잇는 물체에 물을 끼얹어 식히거나, 산소의 유입을 막거나, 연료 공급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지닌 경배의 마음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타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되고자 열망하지만, 그 방식들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타게 하는 어떤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먼저, 물이 불을 끌 수 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삶의 무거운 압력과 시험들이 경배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곤고한 시간에 다소 열정이 식고, 경이감과 신뢰감을 잃기가 너무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하신 이유를 묻고, 상황이 좋아지면 우리가 다시 경배를 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우리의 경배를 느슨하게 풀어 버립니다. 아니면 우리는 더 이상 경배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기에, 경배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힘든 상항들로 인해 경배를 벗어던진 많은 예배자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더 강하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그렇게 강하게 타오르는 경배의 마음을 드러냈던 사람들도 보아 왔습니다. 항상 신뢰하고, 항상 소망하고, 항상 인내하며 삶의 폭풍우를 여전히 불타는 마음으로 통곡하는 그런 부류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이런 예배자는 이따금씩 단순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힘들게 어려움을 당하고, 지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선택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환경에만 고정하든지, 아니면 심지어 이 선택이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께 매달려 그분께 경배하든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내하는 경배자의 제물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많은 문제들이 억누른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훨씬 더 압도당합니다. 불을 끄는 둘째 방법은 산소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경배에서는 성령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경배한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몹시 슬퍼하실 수 있다는 점도 명백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몇몇 방법들을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보서 4장 31-32절). 이 구절이 함축하는 것은 엄청납니다. 그 내용을 2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교회 예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이끄시는 경배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분과 동행하고 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예배 인도자로서 이것은 과제이며 심지어 두려운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성령이 거하실 적당한 장소로 우리의 삶을 만들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억누를 수 없이 불타오르는 예배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불을 끄는 셋째 방법은 활활 타오르게 하는 연료의 공급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산불 광경을 뉴스 방송을 통해서 보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알게 되었을 텐데, 소방수가 산림을 미리 태워 버리거나 잘라 내어서, 불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경배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연료입니다. 그리고 항상 더 많은 연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 때, 하나님의 계시는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날아옵니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숨 쉬는 모든 호흡이

우리의 창조자를 기억나게 하며, 매 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단지 이 계시를 받을 만한 곳에 우리 자신을 계속 두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께 기도하고, 서로 교제를 나누려고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은 중요한 요소들이 경배의 마음에 연료를 공급합니다. 바다, 산 혹은 그저 들판이라도 자연으로 나가 우리 창조주의 경이로움에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것과 같은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은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신 모든 것을 통해 모든 이에게 계시하셨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용서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무나 자주 내가 드리는 경배가 무미건조해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불에 연료를 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소나기 아래 나 자신을 흠뻑 적실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번번이 시간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창조에 우리 자신을 흠뻑 젓게 할 공간을 발견하고 다른 성도들과 신간을 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계시가 우리의 삶에 다시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한 번 더 경배의 불꽃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찬양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강의할 때마다 심지어 가장 어두운 시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비현실적인 환상 속에 살면서, 우리 삶에 잘못되는 일들이 있을 대에도 인정하지 않는 빛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경배에는 부서지고 울어야 할 곳이 있지만, 이것을 표현하는 올은 방식과 그릇된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을 때, 결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시편의 약 70%는 애가(哀歌)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