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

진품 예배로 이끄는 네 가지 조건

예림의집 2022. 4. 30. 15:06

진품 예배로 이끄는 네 가지 조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짝퉁 예배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긴 한데, 탕자와 같은 말 안 듣는 이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찬양에 대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이에 제가 오늘 제시하는 네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리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기를 원하고 저를 만난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섬김의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신앙은 부득이 얼마간(주님이 오실 때까지) 짝퉁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여전히 불완전하고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짝퉁 옷가지의 겉감은 그럴듯한데 안감이나 마감은 어수룩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산앙의 대상, 즉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진품이십니다. 참신이 누구인가 내기를 했던 엘리야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직은 진품일 수 없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를 예배되게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예배되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짝퉁인 우리가 예배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진품인 우리 주 아버지.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님께 예배의 인도를 맡길 때 비로소 진품 예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불완전한 짝퉁 예배자일지라도 그분의 주도 아래 온전한 진품 예배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예배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몇 가지 필수 조건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 첫째가 바로 "설레임"입니다. 설레임이란 거룩한 기대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과정의 필독도서 중의 하나인 리차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에는 "예배의 훈련"이라는 훈련의 영역이 있습니다. 여기서 포스터 목사님은 성공하는 예배의 비결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자 현상을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어

나를 만나주시고 공동체를 변화시킬 것에 대한 "거룩한 기대"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구성원 모두가 이 거룩한 기대에 휩싸일 때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로 경험될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거룩한 기대를 "설레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중심을 다해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중심을 다해 반응하며 다가가려 할 때 나타나는 내 마음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 파동을 훈련해야 합니다. 언제나 어느 때나 주님을 향한 설레임이 가득할 때까지 말입니다. 둘째는 "슬픔의 눈물"입니다. 잃어버린 애가의 언어를 찾는 것입니다. 

음악가, 묵학인이자 신학자인 마이클 카드는 예배와 예술에 대한 여러 책을 썼는데 그의 저서 <잃어버린 노래, 애가(>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욥과 다윗과 예레미야와 예수님의 눈물과 탄식에 대한 깊은 묵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통을 경험한 자만이 예배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한 회개와 탄식이 없는 축제의 노래를 절제하는 연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투명한 마음으로 울 수 있는 정직한 영을 더욱 훈련해야 합니다. 눈물이 있는 그곳이 진정한 영을 더욱 훈련해야 합니다.

눈물이 있는 그곳이 진정한 지성소라고 마이클은 이야기합니다. 부흥의 파도 이전에 애통의 물결을 예배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비로소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바 눈물을 씻어 주시는 진품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바로 "수줍음"입니다. 수줍음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강청 기도와 낙타 무릎이 대세이던 시절, 김영봉 목사님의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기도는 청구서도 결재판도 아닌 사귐의 과정이자 그 자체라는 것을 되새길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사실 예배와 찬양 역시 사귐이며 관계 회복의 과정입니다. 사귐은 무례하게 떼쓰는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사귐은 작은 만남의 연속에서 오는 "서로 닮아감"입니다. 성숙입니다. 사귐의 시간에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신부처럼 새댁처럼 새내기처럼 수줍은 모습들입니다. 하지만 결코 무능함이나 자신 없음이 아닙니다. 아미 당당한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선 자들의 겸손한 자기표현입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사귐 속에서 주님과 대면할 담력을 지닌 이들입니다. 두려움과 질적으로 다른 그 잔잔한 두근거림, 그 수줍은 진동을 우리는 느껴보아야 합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귐으로 늘 초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은 바로 "속삭임"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반은히기"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영성에 대한 많은 책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책 <예수 내 인성의 의미>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소리치지 않으신다. 보채지 않으신다.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소리는 조심성 잇게 거의 속삭이는 소리이다. 부드러운 사랑의 소리이다!" 마치 바람과 지진과 불 이후에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새로운 소명의 메시지를 주시던 것과 흡사한 표현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께 도전합니다. 음악적 도움 없이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봅시다. 사실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부와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음은 차단할지 몰라도 그분의 속사임에 귀 기울이는 연습은 다소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세찬 드럼의 울림 속에서도, 익숙지 않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도 주님의 세미한 속삭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훈련합시다. 진품이신 하나님께서 종일토록 속삭이며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 설레임과 눈물, 수줍음과 속삭임. 이 네 가지를 훈련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