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은 서원과 결단의 고백
자, 이제 "찬송은 무엇인가?"에 대한 마지막 정의를 내려야 할 순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찬송의 문자적인 해석에서부터 수평적 의미까지 상당히 포괄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매일 부르고 평생 불러야 할 이 노래가 "나 자신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정말 대단합니다. 대부분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요, 뜨거운 선교의 열정에서 작시, 작곡되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찬송을 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을 하다 보면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내용의 곡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 또한 찬양할 때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하는 소리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사도 바울이 수백만이요, 베드로, 야고보가 그렇게도 많은데 생활 속에서는 좀처럼 신앙의 거인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년 3월이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많은 공약들이 난무합니다. 저도 나라의 장래가 많이 걱정스럽고, 기도합니다.
모든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목표일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안 되니까 항상 애를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후보들은 자신이 집권하기만 하면 2-3년 내에 1인당 국민 소득을 몇 배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또 다른 후보는 자신이 집권하면 아파트 분양가나 전세금을 지금의 절반 시세로 낮추도록 하겠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공약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치가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 댑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성도인 우리가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비난할 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우리는 분명 찬송이 예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의 입술에 있는 찬송과 우리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행위를 보실 때 과연 찬송으로 여길 만한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같은 수준의 인간들을 잠시 기만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만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2부 때에 제가 몇 가지 찬송가를 예를 들어 우리가 얼마나 위선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부르는 찬송곡과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찬송의 삶의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새 찬송가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이 찬송은 청년들보다 장년들이 많이 부르는 곳입니다. 설령 입이 만 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입으로 죄를 짓거나 망령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는 데 쓰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과연 찬송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만 개는 그렇다 치고 한 입을 가지고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높이고 세우기보다는 저속한 언어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더럽혔습니까? 오늘 제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새 찬송가 3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 성경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아울러 말씀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성경 읽기를, 외우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새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사실 기도 드리는 것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배당 건물이 대형화되는 것에 비해 새벽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새벽 기도회 자체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금요 철야 기도회는 고사하고 금요 기도회도 한 시간이 넘으면 길다고 합니다. 주일 낮 예배에 오천 명이 모인다고 자랑하는 교회가 새벽 기도회는 그 오십 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실정입니다.
새 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오래전 제가 대구의 어느 교회 청년회 사역자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연말이 되어 그다음 해의 임원 선출을 위해 청년들이 모였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서로 임원을 하지 않겠노라고 발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에 주의 일하는 것이 내 평생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회 임원을 하지 않겠다고 저로 미루니 어찌 된 말입니까?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노래하면서도 항상 뒷전을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 찬송가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가오리니"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주님의 두 가지 표정을 생각합니다. 하나는 감격하시는 표정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과 안타까움의 표정입니다. 왜냐하면 이 찬송의 가사는 그야말로 애절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 헌신의 깊이가 더 하고 사랑의 농도가 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찬양의 가사와는 반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시다가 이내 슬퍼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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