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 12 -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
고린도전서 7:29-34
우리는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하라는 말씀을 잘 압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결혼생활을 통해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경험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여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내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내가 있는데 아내가 없는 것 같이 하면서 어떻게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없는 것 같이 하면서 동시에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내 없는 자 같이 살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삶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것이 되었고 이제 새로운 시작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는 더 이상 아내도 이전의 아내가 아니고 남편도 이전의 남편이 아닙니다. 아내와의 관계도 이전의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을 알게 되면서 이전의 관계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육체의 관점에서 아내를 보고 때로 좋아하고 때로 싫어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한 것은 육체의 관점에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미움과 다툼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랑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었을 뿐임이 드러났습니다. 왜 그렇게 사랑하던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서로 극도의 미움과 갈등의 관계로 바뀌게 됩니까?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었고 남편을 사랑한 것이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 사랑이나 아내 사랑이 진정으로 상대를 중심으로 한 사랑이기보다 자기애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실상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랑하다가 미워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내는 이미 자기가 만든 병든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나의 이전의 관점으로 아무리 아내를 사랑하고 좋아하려 해도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할 능력이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 더 이상 이전의 관점으로 아내를 보고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내가 내 마음에 들고 나를 기쁘게 할 때 사랑하고 아내가 기뻐한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뒤로 했습니다.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33-34).”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를 기쁘게 해야 할 때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 사랑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욕망이고 자기사랑입니다. 아내가 사랑의 최우선순위가 될 때 아내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피조물을 사랑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악이 됩니다. 이것이 제자가 주님을 따를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고 따라야 한다는 제자도의 요구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전혀 세상과 다른 길을 갑니다. 우리는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기에 앞서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남편이나 아내를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이전의 아내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전의 사랑을 내려놓고 아내가 원치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윤리적인 삶을 넘어서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다 해당되는 원리입니다. 친구를 사랑해야 하지만 주님 때문에 친구와의 관계를 끊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지만 사람들과 갈등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5-36).” 주님이 인간관계 안으로 들어오실 때 오히려 이전의 관계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오히려 안전했던 것을 깨뜨리는 분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을 상수로 여기고 신앙은 그것의 보조 장치로 여긴다면 주님은 우리의 주님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남편도, 사랑하는 아내도, 사랑하는 자식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극복되어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사랑으로 이뤄진 것 같아도 실상은 다 자기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써는 진정한 사랑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사시고 주님이 사셔야 나의 이기적인 관점을 넘어서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내 없는 자 같이 아내 사랑하기
이전의 아내가 죽으면 이제 새로운 아내가 등장합니다. 이전에 육체의 욕망과 감정에 기초한 아내가 죽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자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내 없는 자가 되어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편 없는 자가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깨지면 주님의 사랑이 대신하고 이전에 사랑할 수 없고 미워할 수밖에 없던 남편이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아내를 미워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미워해야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오늘날 그렇게도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가 없을까요? 주님을 사랑함이 없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서 상대방을 기대하고 그것에 부합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랑은 감정이기보다 선택입니다. 자연적인 감정에 따라서 사랑한다면 사랑할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다면 주님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다시 보면 이전의 아내는 안 보이고 주님이 사랑하신 아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아내는 죽고 새로 태어난 아내가 눈앞에 있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여전히 같지만 이제 내 안에 주님이 계심으로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입니다. 인간적인 실망이 사라지고 그 대신 상대의 약점을 용납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소망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특별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아내나 남편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서로와 불화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심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격적인 상호대화와 소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은 사회는 관계가 심각하게 깨져 있습니다. 아내 있는 자 같이 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는 여러분은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ε♡з하나님께로..ε♡з > 성경,말씀,설교,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화, 그 위대한 결단 (0) | 2020.07.17 |
---|---|
칭의.. (0) | 2020.07.16 |
책을 취하신 어린양 (0) | 2020.07.13 |
행복, 그 위대한 여정 (0) | 2020.07.11 |
어린양의 등장 (0) | 2020.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