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 ‘마치 세상에 살지 않는 자 같이 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말입니다. 이전의 삶을 종결하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서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울음도 웃음도, 부도 가난도, 칭찬도 비난도 더 이상 이전의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을 지나가기 전에는 세상이 크게 보이고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삶의 행복이었다면 이제 주님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이전의 행복이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다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있으면 행복하고 이것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인생의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눈이 열리고 보니 가난한 자신이 더 이상 불행한 것이 아니고 부한 타인이 더 이상 행복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외적인 조건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 우는 자였지만 이제 상황이 동일해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됩니다. 이전에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기쁜 자들이었으나 사실상 기쁜 자가 아님을 발견합니다. 근본적인 재인식에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다면 이제 눈이 열리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이 행복이 됩니다. 이제 행복을 구하고 불행을 피하는 것은 동일하나 그 내용과 질이 달라진 것입니다.
왜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살아야 하는가?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 왜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삽니까? 이전의 기쁨과는 다른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기쁨이 보이는 세상의 기쁨이었다면 이제 기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인생의 자랑과 기쁨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난 후 기쁨이 바뀌에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바울이 기쁜 자로서 기쁘지 않은 자가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로 발견한 기쁨을 위하여 이전의 것을 잃어버리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기쁨을 추구하지만 그 내용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서 여전히 이전의 것이 좋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기쁨을 구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찾고 있습니다. 여전히 돈이 좋고 여전히 세상의 인정이 좋습니다. 온통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차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관심은 세상 행복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복도 세상 사람들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난을 싫어하고 세상의 욕망을 위해서 싸우고 근심합니다. 기쁜 자들이 되려고 하지만 욕망을 따라 살기 때문에 근심과 불평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기쁜 자들은 실상 불행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은 기쁘지만 결국은 울게 될 것입니다.
기쁜 자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자들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겉으로는 부자이고 그래서 자부심과 기쁨이 있지만 실상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입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만났다면 슬퍼해야 할 인생인데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쁜 자들은 세상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편안함에 눈이 가려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런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의 기쁨을 내려놓기를 원하지 않고 계속 거기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누리지 못한 이들이 이들을 부러워하고 이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판단은 이러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리라(약 5:1).”
하나님 없는 부요함은 위험합니다. 가난할 때 주님을 섬기던 이들이 부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궁극적인 원천이고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세상의 기쁨은 우상이고 파멸의 원천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날 세상은 행복의 추구가 근본방향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돈으로 누리는 행복이 모든 삶의 목적에 우선하게 되고 이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도 이런 세상의 지향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세상에서 얻는 기쁨에 만족하고 그것을 지향한다면 믿음은 이미 왜곡된 것입니다. 지금 썩어질 세상의 행복이 삶의 중심이 된 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6).” 이런 가짜 신앙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세상을 따라 세상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이제 그리스도의 기쁨,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기쁨을 누리도록 살아야 합니다. 남들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슬픔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모세의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봄으로 세상의 기쁨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세상의 기쁨을 기꺼이 포기해야 하늘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다 더 행복하게 기쁘게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더 높은 기쁨을 위하여 기쁘지 않은 자 같이 살기를 선택합니다. 문제는 세상의 욕망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함과 약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늘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기쁜 자의 정체성에서 기쁘지 않은 자 같은 자의 정체성으로 살므로 진정한 기쁨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어떤 고난과 역경도 빼앗을 수 없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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