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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예림의집 2020. 6. 15. 20:56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10-14).
 
생명의 능력인 믿음
믿음은 생명의 희망이고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죽음의 현실을 넘어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바라보고 여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에 주의를 집중할 때는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했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집중하게 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삶 가운데 생명의 능력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생명과 사망 사이에서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사망입니다. 주위에는 온통 삶을 위협하는 것들로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피하여 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날 희망을 품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 가운데 살아왔고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장악했습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서 사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생명을 원하지만 생명을 얻고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고 늘 죽음의 두려움과 염려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고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부활에서 나타난 놀라운 새로운 현실을 통해서 자신과 상황들을 다시 보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질병과 상처와 싸움과 고통이 너무도 명백하게 보이는 때에 주님의 부활의 복음을 영으로 듣게 되면서 죽음의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넘어 건강을, 상처를 넘어 치유를, 싸움을 넘어 평화를, 고통을 넘어 기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른 현실에로의 이동입니다.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에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던 고통과 절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이제 믿음이 죽음의 일상에서 생명의 일상을 만들어 냅니다. 사망의 우리의 현실입니까? 아니면 생명이 현실입니까? 육체의 관점에서는 사망이 현실이지만 영의 관점에서는 생명이 현실입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사망의 현실이 생명의 현실로 바뀌는 것이 경험됩니다. 우리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현실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 거듭 생명의 희망이 우리를 이끕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
사망 대신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행위 대신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생명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과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근원은 자아입니다. 자아는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의 권세를 파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능력은 자아의 행위 안에 없습니다.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을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의 행위로써는 죄로 말미암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육체는 육체일 뿐입니다. 육체는 죄와 저주의 세력 앞에 무력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이 퍼져 가면서 지금 문제가 많이 있지만 노력하면 인생의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에 대한 환상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죄의 종이 되었고 저주 아래 있고 누구도 죄의 종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죄를 벗을 수 없고 죄를 벗어버릴 수 없다면 저주 또한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행위로써는 안 된다는, 인간은 죄의 종이라는 근본 절망이 진실에 부합합니다. 
해결책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고통과 저주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공언하는 것은 실상 거짓말이고 환상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납니다. 그래서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믿음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음의 절망에 처한 인생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율법은 인생을 바꾸지 못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자신을 바꾸려는 씨름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삽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량에 대한 믿음이 생명의 새 길입니다. 죽음에 처한 자들이 살 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문제는 십자가의 믿음의 길을 버리고 율법의 행위의 길로 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해결책들을 신뢰합니다. 과학도 기술도 정치도 법도 교육도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 위해 죽으신 주님을 믿고 그분에게 죄를 고백하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 아래 있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삶을 바꾸고 낫게 하려고 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주의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신에 대한 신뢰의 죽음입니다. 나는 안 된다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입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근본인식이 없이는 진정한 생명의 삶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날마다 고백하고 거듭 행위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무엇인가 하려는 옛 버릇을 끊어야 합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육체에서 영으로
율법의 행위로써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육체의 선함도 인생을 죄에서 건져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자가 되었습니다. 육체로 살 때는 행위로 자신을 바꾸려 할 때는 자신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함으로 인생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육체로 선을 도모하고 의롭게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4-25).” 십자가에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으로 나아가는 놀라운 비결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를 속량하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육체로 살 때 죄로 이끌던 죄의 권세는 깨지고 이제 주 안에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불순종으로 저주 아래 있던 이들이 이제 순종의 자녀가 되어 율법의 의의 요구를 이루게 됩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면 살리라 말씀하는데 이전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이 말씀은 두려운 심판의 말씀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게 됨으로 이제 성령 안에서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육체가 아니라 영입니다. 영이라 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이 믿음의 순종으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사망 대신 생명을 택한다는 것은 불순종 대신 순종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사망의 길이고 순종은 생명의 길입니다. 누가 순종을 택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못 박은 자들, 날마다 이 죽음을 계속 실행하는 자들입니다. 
육체의 욕망이 불순종의 원인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음 없이 순종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이 아브라함의 복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저주에서 벗어나 복으로 들어간 자들의 삶은 순종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불순종의 길을 간다면 우리는 날마다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성결한 삶을 추구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악을 행하고서 생명을 누리겠다는 것은 헛된 환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파멸의 함정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신 목적은 더 이상 육체의 욕망으로 살지 않고 십자가에 욕망을 못 박고 주의 거룩한 계명에 따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욕망에 굴복하는 것은 죽음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욕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사망의 길입니다.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진정한 생명이 솟아납니다. 세상 욕망을 허용하고 그 욕망으로 불순종의 길을 가게 되면 사망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심판하시는 주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은 욕망을 향해 치닫는다면 우리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의 죽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과 번영의 길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과 자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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