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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부활생명

예림의집 2020. 4. 13. 08:43

죽음을 이기는 부활생명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7-18).


보이는 경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재를 붙들어야 한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은 죽음의 현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명의 실재이다. 

이번 코로나 위기를 통해서 드러난 것은 죽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 부활의 복음은 지금의 위기에, 죽음이 실재라고 여겨지는 세상에 생명이 실재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경험적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바라보고 그것에 근거해서 지금의 보이는 고통을 해석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이 문제가 아니다. 실재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는데, 이것은 생명을 실재로 믿고 죽음의 현실 안으로 들어가 죽어 있는 것을 살리라는 명령을 의미한다. 죽음의 현실에 직면해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은 것들을 살리시는 생명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전해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단지 사람들의 두려움과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에게 생명의 희망을 전하고 죽음을 거스르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1. 살아 있는 자

예수님의 부활로 인류 역사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제까지 모든 인류와 역사를 지배해 온 죽음이라는 권력이 깨지고 제어되었다는 소식이다.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죽으시고 돌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던 주님이 살아 일어나 돌무덤을 여시고 사람들에게 놀라운 생명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은 단지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출현이다.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죽음이 더 이상 모든 자들의 운명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인간을 운명적으로 지배해 온 죽음의 권력 앞에 무력한 인간과 다른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생명은 죽음을 향한, 죽음으로 그 생명의 힘이 소진되는 생명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생명,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생명,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역사상에 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니라(롬 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 다시 말해 그분은 이제 죽은 자들 가운데 계시지 않다. 그분은 산 자이시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 이것이 죽은 자들과 다른, 산 자로서의 주님의 정체성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두 종류의 인간이 나뉜다. 사망의 지배 아래 있는 죽은 자들과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난 산 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사망의 지배 아래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지배가 깨지고 거기서 벗어난 새로운 인류가 출현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죽은 자였으나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 자가 되었다.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다. 산 자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롬 6:13).” “우리 살아있는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이다. 이전에는 아담과 같이 죽은 자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산 자이다. 이것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 자신과 다른 진정한 정체성이다. 경험적으로는 여전히 사망의 세력 아래 있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을 당하고 죽을 몸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자신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적인 자아 안에 새로운 자아가 있다. 죽음을 이긴 예수 생명을 지닌 자로서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들과 다르게 산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고후 4:8-9).” ‘사방으로 욱여쌈’, ‘답답한 일을 당함’, ‘박해를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이것이 성도들이 모든 죽은 자들과 함께 당하는 죽음의 현실이다. 그런데 산 자들에게는 다른 죽은 자들과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 ‘싸이지 않음’, ‘낙심하지 않음’, ‘버린 바 되지 않음’, ‘망하지 않음’, 이것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의 경험이다. 죽음이 공격하지만 오히려 그 죽음의 공격으로 인해서 더 강한 생명의 능력이 드러난다. 초대교회는 환난 중에 즐거워했다. 고난의 상황은 부활의 생명의 현재적인 증거가 되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죽음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살지만, 그 현실의 죽음을 대면하는 자세와 반응이 다르다. 이미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이든 질병이든 사람들의 비난이든 미래의 불확실성이든 모든 죽음의 상황은 이미 극복된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코로나 위기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부활의 생명을 증명해야 한다. 부활 생명으로 인한 긍정의 능력은 역경에서 드러난다. 자신 안에 있는 보화, 부활 생명을 확신하고 죽음의 현실을 바꿀 소망을 가지라. 병들고 약하고 무능하다고 여겨졌던 자신이 날마다 건강하고 부요하고 강하고 지혜롭고 탁월한 자로 변화될 것을 상상하라. 


2. 부활 생명을 위한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는 생명으로의 부활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부활이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이다. 우리가 산 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참여할 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죽음은 단지 극복해야 할 적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르셨듯이 우리도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른다. 우리는 산 자로서 부활의 소망을 지니고 있기에 기꺼이 죽음의 과정 안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바울의 삶은 부활에 참여하여 산 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삶이었고 이것이 부활에 이르는 삶이었다. 이것이 신비이다. 죽었으나 이제 산 자이고 산 자로서 죽음으로 들어간다. 더 놀라운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죽음은 부활의 소망, 앞에 있는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는 자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죽음이 가로막는다면 그것을 포기하지만 신자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기에 그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인내한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이것이 신비한 영적인 법칙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고난의 목적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인격의 연단과 미래 영광의 소망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 고난은 우리를 성결하게 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에게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 11).”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복과 형통이 아니라 내적인 인격의 연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벧전 1:6-7).” 

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인가? 주님의 부활의 의미는 우리도 장차 그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여 하늘의 기업을 상속할 것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기 위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 자 되게 하셨고 이제 산 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이끄신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세상욕망에 대해 죽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기 위함이다. 우리는 세상 행복 이상을 꿈꾼다. 왜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주의 죽으심에 참여하여 내면이 새로워져야 한다. 욕망을 추구하는 세상을 거슬러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격적으로 세상 사람들보다 탁월한 자 되어야 한다. 이기심을 버리고 사람들을 섬기고 약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선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적인 부활의 삶이다. 날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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