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증거는 이것이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1-13).
극단은 다 위험하다. 진리는 중용이고 균형이다. 믿음을 강조하다 행위를 부정하는 것도 문제이고 행위를 강조하다가 믿음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이다. 좋은 나무가 아닌데 좋은 열매 맺을 수 없고, 좋은 열매 맺지 않는데 좋은 나무라 강변해서는 안 된다. 뿌리도 중요하고 열매도 중요하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 없고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 사랑 없다. 이웃 사랑 없는 보수 교회도 병든 것이고 하나님 사랑 없는 진보 교회도 병든 것이다.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이다.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는 '오직 믿음으로'가 오해되어 행위를 부정하는 값싼 은혜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사랑을 간과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에 세상 욕심을 추구하고 불법을 행하고 부도덕하게 살아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병든 목사, 병든 성도들이 많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진리가 병든 신앙과 거짓된 복음을 옹호하는 논리가 되고 있다.
명성교회 사태는 순종이 없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에 이른다는 잘못된 신학에 책임이 크다. 말씀을 거슬러 행하면서 정통신학 운운하는 대형교단 목사들의 위선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오직 믿음으로'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를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해 교묘히 악용하는 거짓 신앙이 문제이다. 순종의 행함 없는 '오직 믿음으로'는 무늬만 '오직 믿음으로'이다. '오직 믿음으로'는 철저한 순종과 헌신에 다름 아니다. 행위를 부정하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믿음은 온전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의 열매를 지향한다.
그러나 오늘날 '오직 믿음으로'의 종교개혁 신앙이 왜곡되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행위가 곧 믿음이라는 다른 복음이 등장하고 있다. 믿음은 행위로 열매 맺으니까 열매가 있으면 곧 드러난 믿음이 없어도 그 행위 자체가 믿음이라는 논리이다. 꼭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가? 명시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양심적이고 선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이 옳을까? 이런 의심이 퍼져가면서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의 진리자체를 벗어버리려는 흐름이 교회 안으로도 밀려오고 있다. '오직 믿음'을 말하는 이들의 비윤리와 독선과 폐쇄성이 이 진리의 타당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인 양 생각한다. 전통적 교회의 문제는 행위를 부정하는 믿음이라면 새로운 교회의 문제는 믿음을 부정하는 행위의 문제이다. 전에는 믿음이 행위를 대신했다면 이제는 행위가 믿음을 대신한다. 예수 이름 없이도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다원주의 논리는 서구교회를 무너뜨렸고 지금 한국교회를 공략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로만'의 진리를 선언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이것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 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행위는 어때도 상관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예수의 생명이 아니라면 진정한 인격의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삶의 변화를 무시하는 논리가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거룩한 삶의 능력이 예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말씀에 불순종하는 믿음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아들을 자신의 구원자, 주로 믿고 그에게 순종함이 없이는 어떤 양심도 어떤 선행도 어떤 정의의 실천도 생명이 없는 것이라 선언한다. 예수 이름 외에 구원 없고 예수를 믿지 않고서도 개인이 변화되고 사회가 갱신될 가능성은 없다! 예수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다원주의와 인간의 잠재력에 근거해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낙관주의는 복음 진리를 위협하는 거짓이다. 타 종교와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열린 자세로 접근하고 이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를 비판한다면서 복음의 근본진리를 폐기하려는 거짓 신학을 비판하는 것이다.
정통 실천은 정통 교리에서 가능하다. 실천이 있다면 곧 그것이 정통 교리라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바른 복음은 바른 실천을 낳지만 겉보기에 바른 실천의 행위들이 다 바른 복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드러난 행위의 나타남을 추구하다가 서구 교회는 복음을 잃어버리고 복음을 윤리로 대체했다. 도덕성을 상실한 신앙을 비판하고 도덕성을 강조하다가 은혜의 복음을 잃어버리고 생명을 잃은 서구교회의 경로는 우리가 따를 것이 아니다. 생명은 예수 안에, 오직 예수 믿음 안에 있다. 탁월한 도덕성도 예수를 믿고 철저히 그분을 따름에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만을 따르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겸손함이 필요하나 예수 이름의 유일성을 양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너무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가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인다고 하면서 사실상 자기를 높인 것 때문이다. 오직 예수만을 따른다면 세상을 향해 더 겸손하고 더 개방적일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위협하는 거짓에 대항해서는 저주를 선언해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는 순간 교회는 무너진다. 오직 예수 그 이름에 있는 생명을 드러내는 교회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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