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성지 순례: 바울의 첫 번째 유럽 선교 도시, 빌립보

예림의집 2019. 12. 4. 17:10

성지 순례: 바울의 첫 번째 유럽 선교 도시, 빌립보


장흥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1세기 중엽 빌립보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국제 포장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지나가는 도로상에 위치해 있던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이자, 제국의 수도 로마로부터 동일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던 식민 도시 ‘소(小) 로마’(mini-Rome)였다. 게다가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유럽 지역에서 행했던 최초의 선교 관문 도시로, 정치와 경제 및 문화와 종교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였다. 

우선, 고대 빌립보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이 도시는 그리스 북부 서편의 드라게(Thracia) 지방과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던 마게도냐(Macedonia) 지방의 으뜸가는 성으로(행 16:12), 대략 북위 41°, 동경 24°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바울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속주(屬州) 마게도냐의 중심부에 넓게 펼쳐져 있던 비옥한 다토스(Datos) 평원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남동쪽으로 약 1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외항(外港) 네압볼리(Neapolis)를 통해서 에게 해(海)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도시 건립 당시로 시선을 돌려보면, 원래 이 도시는 주전 359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던 정치가 칼리스트라토스(Kallistratos)가 타소스(Thasos) 섬에 살고 있던 그리스 사람들과 함께 건설한 도시로, 주변에 ‘샘’(kr?n?)이 많아, 처음에는 ‘크레니데스’(Krenides)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megas Alexandros)의 부친, 마게도냐의 왕 빌립(Philip) Ⅱ세가 이 도시를 지배하여, 이 도시의 이름을 ‘크레니데스’ 대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Philippi)로 개명하였다.

 

그 후 주전 168년 마게도냐가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 이래로, 빌립보는 로마와 동방을 연결하는 국제도로상에 위치한 교통 요지가 되었다. 주전 42년에 이르러 이 인근 지역에서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 살해에 참여한 카시우스(Cassius)-브루투스(Brutus)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안토니우스(Antonius)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유명한 빌립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이 일 후에 주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동맹 관계에 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물리치고 스스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라는 뜻)가 되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본토에 주둔하던, 퇴역한 500여 명의 안토니우스 시위대(브라이도리온) 소속 군인들에게 이곳 땅을 하사하여 이 도시를 로마의 식민지(colonia)로 삼고, 이 도시에 당시 지방 도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치권으로 로마와 동일한 특권(ius italicum)을 부여하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식민지 율리아 아우구스투스 빌립보’(Colonia Julia Augustus Philippensis)로 바꾸고, 이 도시를 북쪽으로는 금광(金鑛)이 있던 팡개온(Pangaion) 산에서, 남쪽으로는 네압볼리 항구에 이르기까지, 또 동편으로 네스토스(Nestos) 강에서 서편으로 스트리몬(Strymon) 강에 이르기까지 확장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방 자치 도시 중에서 최고의 특권을 부여받은 로마 식민지 빌립보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은 재산을 소유하거나 거래할 수 있었고,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으며,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받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빌립보 시민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특권을 누리며 로마의 관습과 법을 따르는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두 번째 선교여행 중인 주후 49/50년 경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네압볼리 항구를 거쳐 이곳에 도착하였다(행 16:11). 바울은 자신의 선교 관습을 따라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고, 성문 밖 강가에서 기도할 곳을 찾다 두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집안에 세례를 베풀어 유럽 최초의 교회를 개척하였다(행 16:11-15).

그는 이곳에서 단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능력도 행하였다. 곧, 바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그 주인에 의해 실라와 함께 붙잡혀 관리에게 매를 맞고 투옥되어 고난과 능욕을 받기도 하였다(행 16:16-24; 살전 2:2).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간수에게 전도하여 그 간수가 회개함으로써 그 집안이 세례를 받았다(행 16:25-34). 이때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여 이곳의 관리들로부터 사과의 예우를 받고 풀려났다(행 16:35-40).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 중에도 이 도시를 두 번 방문하였다(에베소에서 고린도 가는 길에 방문[고후 2:12-13; 7:5; 행 20:1];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방문[행 20:2-6]). 그는 두 번째 빌립보를 방문하기 전, 세 번째 선교 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 삼 년 간 체류해 있을 때 감옥에 갇혀 있기도 하였는데, 주후 55년경 그가 에베소 감옥에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에 옥중서신을 써서 보냈다(빌 1:12-14).

바울은 자신이 선교하는 동안 여러 번 빌립보 교회의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빌 4:15-16; 행 18:5; 고후 11:8-9). 특히,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에게 후원금을 전달하였다(빌 4:10-19). 그런데 하필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나서 그를 빌립보로 다시 보내어 치료받게 하였는데(빌 2:25-30), 이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빌립보서를 전달하게 하였을 것으로 대개 추측한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후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가 주변에 온천과 금광이 많아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성이어서 비교적 부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고대 도시 빌립보에 남아 있는 유적(遺蹟)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곧, 주전 356년 레카니스 산 위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 비잔틴 시대 산 중턱에 세워진 길이 3.5㎞의 성벽 일부, 성문 밖 루디아기념교회와 세례터, 주전 4세기 빌립 Ⅱ세 때 세워졌다가 주후 2세기 확장된 원형극장, 가로 99m, 세로 50m 크기의 주후 2세기 로마의 포럼(Forum), 6세기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A교회와 B교회, 그리고 최초의 빌립보 기독교인이 세운 교회로, 바닥에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감독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봉헌한 바실리카 양식의 채색 모자이크 바닥을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팔각 교회, 수세식 공중 화장실, 5세기경부터 ‘사도 바울의 감옥’으로 불렸던 감옥 유적, 비아 에그나티아 도로 일부 등이 그것이다.

요약하면, 바울 당시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수도(首都) 로마와 동일한 특권을 누렸던 로마 ‘식민지’로, 마게도냐 지방의 정치적 중심 도시이자, ‘비아 에그나티아’가 지나가는 교통과 무역 요충지였다. 바울은 이 도시를 관통하는 국제 포장도로를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하였으며,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로마 제국 내 개척 교회를 세우는 자신의 과업에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헬라 지역에 있는 모든 도시들처럼 빌립보는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일상어로는 대중 헬라어(코이네)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시민권,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던 국제도로, 그리스-로마 세계에 사용되던 통일적인 언어, 이 모든 것들은 바울 사도가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했던, 준비된 하나님의 도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