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후원 사역†/복음 이야기

아직까지 갈등이 심하십니까?

예림의집 2019. 9. 26. 17:39

아직까지 갈등이 심하십니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갈등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전혀 걱정하거나 갈등할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갈등이 있다는 것은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 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갖지 마시고 진정 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더욱 힘써 나오시 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사도행전 24:16).

왜 갈등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갈등한다는 것은 전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고귀하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도덕의식 곧 양심이 있다”라고..

또한 로마서 2장 15절에 보면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양심은 말하자면 마음의 법입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는 “양심을 마음의 눈”이라고 했습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심을 마음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등불이 없으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어 어디로 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실 때 이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양심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은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심은 우리 인간의 도덕 생활에 있어서 말하자면 나침반의 역할을 합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나침반은 언제나 남과 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착한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 나아간다"라고 했습니다. 착한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반면에 착한 양심은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경고해 줍니다. 위험 신호를 보여 줍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려 할 때 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의 양심에 경고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할 때도 그의 양심이 이 사람은 무죄한 사람이라는 경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던지 죄를 범할 때 그 양심의 경고가 없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마는 양심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릇된 길을 나아가게 되면 그래서 죄를 범하면 양심은 우리를 가책합니다. 책망합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고 괴롭던 상태를 시편 32편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죄를 범한 다음에 양심의 가책을 얼마나 받았는지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바싹바싹 타서 부스러질 정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가룟 유다는 어두운 밤에 밖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까? 그의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면 이렇게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책망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듣고 바른길을 갈 때 양심은 우리를 칭찬해 주고 우리에게 상을 줍니다 사실 사람은 자유가 있어서 양심의 명령을 순복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거부하면 그만 양심은 그만큼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타락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4 장 2절을 보면 “양심이 화인을 맞았느니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 아주 무감각해져서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처음에 남의 물건을 도적질할 때에는 양심이 불안합니다. 속이 두근거리고 양심이 불안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적질을 한 번 하고 나면 그다음에 도적질할 때에는 첫 번보다 불안이 적어집니다.

그다음에 습관이 되면 거의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을 계속하게 됩니다. 혹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는지요. 꼭 도적질이 아니라 양심에 가책되는 일들이 종종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발은 교회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게 될 때에도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이기에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서 노력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3장 3절을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에 속했다”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에 속한 자들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 뜻을 앞세우고, 자아의 욕망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해질 때까지는 갈등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으로 변하면 우리 안에 갈등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갈등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사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더 큰 갈등과 고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주일 날 등산을 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양심에 꺼리는 것이 없었고, 내 마음대로 살아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면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서 고민이 생깁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교회를 다니면서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를 다니지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낚시 갔다고 갈등하는 것 보셨는지요? 교회 나오지 않는 불신자들이 주일 날 교회에 가지 않고, 골프 갔다고 갈등하는 것 보셨는지요? 그러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전에 전혀 경험하지 않던 갈등을 합니다. 주일 출석을 하지 않게 되면 죄송한 마음이 생기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생기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죄의 법과 생명의 법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오직 한 가지 법인 '죄의 법'이 지배합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손바닥 하나로 박수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충돌하려야 충돌할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안에 생명의 법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죄의 법과 생명의 법, 두 법이 충돌하여 갈등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와 방법으로는 육신의 욕망과 갈등을 누룰 수 없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갈등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관망하거나 구경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곁 눈 팔지 않고 목표물만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귀로는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는 주의 말씀을 전하고, 가슴과 머리로는 예수님을 느끼고 생각하는 전 인격적 앙망과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믿음의 길로 인도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구원을 얻습니다(민 21:8-9).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믿음의 능력을 얻습니다. 이제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걸치고 있는 것 때문에 갈등하지 마시고 교회로 마음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시어 육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로서 복된 삶을 사시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