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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교육적 사명

예림의집 2019. 4. 9. 11:57

교회의 교육적 사명

미국에 인종 차별이 매우 극심하던 시대에 어느 한 교회가 백인들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교회 구성원을 제한하였다. 그것도 모르는 흑인 하나가 주일날 그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그 교회 사람들이 흑인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깥으로 내쫓아 버렸다. 흑인은 그 시간에 다른 교회로 갈 수가 없어서 바깥 계단에 앉아서 홀로 찬송을 부르고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그만 그 흑인은 잠깐 잠이 들게 되었는데 그동안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 이 흑인처럼 그 교회에 들어가려다가 교인들에 의해 저지를 당하였다. 그는 교인들에게 화를 내다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단념하고 흑인 옆에 같이 앉아 흑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속에서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흑인은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 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행위가 바르지 못할 때 그리스도가 그 교회에 임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귀중한 예이다. 교회가 교회처럼 존재하지 못하고 어떤 인간 기관이나 사람들의 이익 관계를 위한 집단처럼 존재하면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1984년이면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꼭 100년이 되고 종교 개혁을 일으켜 개신교가 탄생된 지 대략 470년 정도가 되는 때이다.

개신교라는 말의 영어 표기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은 본래 불의에 항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참된 본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너무나 부패하였을 때 개신교도들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i)”,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그 부패 성에 항의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항거와 개혁에 승리하여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470년이 지난 오늘날, 부패에 항거하던 개신교도들의 후예는 그전의 가톨릭교회처럼 부패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직도 개신교의 신앙 원리와 그들의 집단적 행위가 기독교에 있어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답변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3:10에서 말한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인간은 항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개혁하지 않으면 부패하게 된다. 개혁자, 비판자, 항의자들도 역시 인간이다. 그들도 그들 자신을 성서를 근거로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의 대상자들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현대의 교회 학자들은 현대의 개신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의미를 실현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하워드 그라임즈(Howard Grimes)는 그의 「구속적 교회(The Church Redemptive)」라는 책에서 미국의 교회와 유럽의 교회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미국 교회는 심한 활동주의에 빠져 교회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현체가 아니라, 인간 도덕과 그것의 향상을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본다. 미국 교회는 복음의 사도인 목사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전문가적 지도자들을 환영하였다. 따라서 그라임즈는 미국 교회가 좀더 큰 것, 우수한 조직력, 회원을 얻는 능력, 훌륭한 교회 건물과 같은 외적(外的)인 형태에 치우치게 되었다 고 비판한다.

그라임즈는 유럽 교회도 역시 비판하고 있는데, 유럽 교회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무능하고 유럽 교회의 성직은 평신도를 자극하고 인도하는 것을 수행하는 사역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적인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계급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 한국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의 교회도 역시 선교 100년 동안 놀라운 발전과 부흥을 이룩했지만, 너무 빨리 부흥되었던 탓인지 그것에 의한 부작용 속에서 통증을 앓고 있다.

이러한 세계 교회들의 추세에 따라 여기저기서 성서를 근거로 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하자(Let the church be church)"라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다. 20세기 초에 칼 바르트(Karl Barth)가 하나님을 좁은 인간의 사고에 한정시키려 했던 19세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자(Let God be God)”라는 표어를 내건 것처럼 20세기 후반인 요즈음의 표어는 “교회를 참된 교회처럼 되게 하자”이다.

그런데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는 노력은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근거로 하여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 것이 교회라는 존재 (being)를 이해하려는 것이라면, 두 번째 것은 집단적인 인격으로서의 교회의 행위(act)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이다. 교회 이해를 정확히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아서도 안 되고, 그러한 이해 없이 실천만을 하면 다시 부패되기 쉽다. 교회 이해와 그 행위는 항시 역동적(力動的) 관계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둘 사이에는 상호 간에 보완(補完)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교회의 본성에 관련된 토의는 매일매일의 교회 생활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요컨대, 이러한 교회 이해와 교회의 행위, 이론과 실천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교육이다. 기독교 교육이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이론과 실천의 중간 지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이라는 말은 이미 그 말속에 이론과 실천을 함께 포함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 이해를 전달하는 것도 기독교 교육이며, 교회의 잘못된 행위와 실천을 교정시켜 주는 것도 기독교 교육이다-

기독교 교육은 여러 가지 영역이 있다. 교회 학교 교육, 평신도 교육, 신학교 교육, 가정 교육, 기독교 계통의 학교 교육, 기독교 계통의 사회봉사 기관 교육 등 다양하다. 이러한 모든 기독교 교육은 실천을 전제로 한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교육은 이론과 실천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가르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가르친다는 것은 교육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고로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을 연결해 주는 기독교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기독교 교육이 행해지는 중요한 장소는 바로 교회이다. 기독교 교육의 효과적 수행을 위하여는 특정한 공동체, 즉 진정한 기독교 교회라는 환경이 요구된다. 실로 기독교 교육의 중심에 교회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를 하여야 하는 것처럼 교육에도 주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일 수 없을 것이다. 가르친다는 실제의 책임은 교회 회원 중의 특정한 수의 사람에게만 맡겨지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교육에 대한 책임은 온 교회 전체에 지워진 일이다. 교육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다. 만일 그 기능을 소홀히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에 반드시 갖추어져 있어야 할 불가결한 한 요소를 잃어버린 교회인 것이다. 개체 교회를 교회되게, 교인들을 참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데에도 교회의 교육적 기능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 순수하게 전해지지 않는 교회가 결함 있는 불완전한 교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교육적 기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결함을 지닌 교회일 수밖에 없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교육적 기능이 여러 가지 다른 교회의 기능들과 조화를 이루어 참된 교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대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러한 교회의 교육적 기능을 무시하고 교회의 말씀 선포의 기능이라든가 개체 교회를 결합시키기 위한 코이노니아 기능에만 치우쳐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쓰는 두 가지 목적은 첫째로, 교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것을 근거로 교회의 교육적 기능이 참된 교회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사명이며 교육은 전체 교회의 책임이라는 것을 고취시키려는 데에 있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 두 부분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한 참된 교회 이해는 무엇인가를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으로 분리하여 설명할 것이며, 나머지 두 부분은 교회와 교회 교육 간의 관계와 교회를 교회 되 게 하기 위한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무엇인가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