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율법과 복음

예림의집 2018. 9. 12. 14:44

율법과 복음


율법과 복음은 모두 구원의 길로 제시된 특별계시입니다. 율법은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라는 형태로 주어졌으나, 복음은 죄의 용서와 영생의 약속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와 부활로 종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삶과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구원의 길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더 이상 구원의 길에 율법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믿음은 복음의 선포로만 이루어지고, 율법이 예비과정으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병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복음의 선포와 그것을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이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율법은 본래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의 길에는 절망과 멸망뿐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독촉하기 위해서 도입되었습니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몽학선생으로 도입된 것입니다. 율법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명령해서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가 어서 와서 구원을 이루어줄 것을 열망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임무였습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더 이상 몽학선생, 곧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과 율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해 교회가 유대교와 분리,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에 대한 율법의 요구는 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로마교회는 예수 믿음에 율법의 준수, 곧 선행으로 완전히 구원하는 믿음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믿음을 율법의 길에 넣어 기독교를 유대교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과 선행 교리에 반대하고, 구원을 선행과 무관하며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에만 관계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구원서정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구원을 얻는 일은 율법과 무관해도 믿음의 과정에까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이르는 예비과정, 곧 회개의 일을 하기 위해 율법이 개입해야 합니다. 율법의 선포로 절망과 지옥으로 몰아넣은 다음 은혜가 선포되어 예수를 믿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복음의 도입을 위한 준비과정이 율법의 수여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보이기 위해 율법이 도입되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율법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이후에는 율법이 구원의 길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었으므로 율법을 선포하고 그다음에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이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구원을 말함에 율법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역사합니다. 율법은 구원의 성취를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른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어 있는 법이요 생활규범입니다. 구원의 길이 전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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