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302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휘파람으로 찬송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 같을 때는
휘파람으로 찬송을 불러 보세요.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잔디를 깎으면서
휘파람을 불러보세요.
나뭇닢을 쓸고, 긁어 모으면서
찬송을 부러 보세요.
따분하고 지겨울 수도 있는
그 일들을 보는 당신의 시선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노래해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하늘에 기록된 이름
구원의 확신은 객관적으로 확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확신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아노라" 라는 말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아가 나를 저주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도, 천사도, 마귀도 우리나 그분께 대해 어떠한 고발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완벽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욥은 우리보다 암흑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욥기 19장 25절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서실 것이라"는 말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디모데후서 1:12). 따라서 "나는 아노라"라는 이 말씀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의심을 나타낼 때 '소망' 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한국인이었으면 좋겠다." 또는 "결혼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내게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 라거나 "그러한 모임에 참가하고 싶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어둠 가운데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는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를 칠십 명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고양되어서 말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도 우리에게 굴복하나이다." 그들을 점검해 보신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뻐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20).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 8).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서도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심지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기도의 목적이 바로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수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만약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약속의 말씀대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피곤하다.', '힘들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분명하지만 기도해도 안 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열정이 식고 기도를 해도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거짓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정말 성경적인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한복음 14:12).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일을 하는 방법이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4:1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말슴일까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오셨다는 것을 정말 믿게 되면 이 약속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삶의 주님이시라면 기도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기도 제목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은 그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일까요?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행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는 경건 생활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에베소서 6:18).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 이번에 시작하는 사업 잘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몸 아픈 것 고쳐 주세요!"라는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처한 삶의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기도조차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주님, 제 기도를 인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간절히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우리는 이것저것 내 마음대로 구하지만 사실 우리가 무엇을 마땅히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이 연약함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성령니므이 도우심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니 진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내 기도를 통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목자교회의 교인 수가 많이 늘어나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주차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에 주차장 건물을 세워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아직도 갚아야 할 부채가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건축을 위해 교우들의 마음을 모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건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을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교우들의 마음을 모으려면 먼저 장로들과 한뜻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1박 2일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 제목을 일방적으로 제시하지 말고 먼저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이 문제를 향한 주님의 마음과 뜻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후에 주님이 주신 마음을 나누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장로들에게 주신 응답은 처음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교인 수 늘어나는 것에 관시을 갖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숫자 늘어나는 것에 관심이 많고 그것이 기쁨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목표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새 우리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교인 수 늘어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는 책망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날 기도하면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더 이상 교인 수 느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목적으로 삼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후 주차장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 놓고 직분자들을 중심으로 차를 가져오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 제물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 제목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도 제목을 붙잡고 기도하면 반드시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가 안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되기를 바랍십니다.
우리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기도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아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져도, 또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거싱 기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도의 감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 제목이라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종이에 써보시길 바랍니다.
"아빠 아버지,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항상 선하심을 고백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기도의 응답을 통해, 거절을 통해 오로지 더욱더 주님께 초점을 마추게 하소서. 주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오니, 주여! 나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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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셋째, 찬송은 전심으로 하는 것②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오후예배를 열린 예배로 드리고, 창양단도 만들고, 찬송가 이외의 곡들도 예배 때 사용하는 등 찬양의 모습들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찬송의 의무를 성가대에게, 찬양단에게 떠넘기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찬양이 활성화 되었다고 하는 교회들을 막상 방문해 보면 그것은 실력 있는 유명한 CCM가수가 있거나 찬양팀이 잘 조직되어 있는 교회들일 뿐, 실상 성도 자신들은 찬양생활을 하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전심으로 찬양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모습들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제가 지난 25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찬양팀을 세웠지만 그들은 예배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결코 성도들의 찬양을 대신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 즉 예배, 기도, 찬양, 감사, 헌신 등은 모두 하나님과 나의 개개인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누가 대신해 주거나 대표해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모두 인정을 할께! 당신 말이 다 옳아.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찬양하란 말인가?”그 대답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의 친절한 찬송교사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시 86:12)”
바로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심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모세를 통한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섬김에 관한 한 기본 강령이요, 찬송할 때 절대 요소가 됩니다. 예수님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38).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전심으로 찬송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것을 항상 기억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에 보면,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영생의 반열에 세워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주님을 전심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25년 전 제가 이 길로 처음 들어 설 때에 많은 사람들, 특히 가족, 친지, 벗, 선배들, 같은 동료들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했었습니다. 기도 잘못해서 미친 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고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은 것뿐이다. 내가 나아갈 길을 확실히 찾았고 그래서 그 길을 출발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여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7, 38)." 라고 찬송했던 것처럼 체험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에게서는 항상 감격적인 찬송이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반사적인 신앙행위로써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서나 찬양팀을 모집할 때에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받았는가를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가창 실력은 당신 자신보다 제가, 그리고 하나님이 더 잘 아시니까 굳이 어느 CCM가수 흉내나 내지 말고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그런 마음 자세를 기뻐 받으시고 아울러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제가 모든 단원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노라고 말하면, 그동안 기가 죽어 제대로 찬양하지 못하던 팀원들이 금방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뛰어난 가창력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원의 열정, 그 감격을 받으십니다. 기쁨의 고백을 들으십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구원의 기쁨을 장송곡 하듯이 표현하겠습니까? 다음 구절을 함께 마음에 세기며 큰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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