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301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촛불을 켜고
촛불을 켜고
그 환한 불꽃을 유심히 보세요.
그 불꽃이 당신을 감싸고 있는
어둠에 미치는 영향을,
그 붉은 빛이
방 구석구석까지 이르러
두려움을 방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빛을 반사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어두운 감정들을
몰아낼 수 있는지
하나님께 여쭤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바울의 가르침
또 다른 사실에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거의 모든 바울의 서신들은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그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위에 있는 집에 대해 말을 할 때 '안다'라고 언급함으로써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는 사실을 나다태니다. 그는 또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게 있는 것이 월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립보서 1:23)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이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 4절에 그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는데, 나는 왓츠 박사의 묘비에 이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시 골로새서 1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12, 13).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 세 가지, 즉 '합당하게 하시고', '건져내시고', '옮기신' 일들은 장차 이루어질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형태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거나 아니면 못받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또는 서로 쳐다보며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을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라고 얘기할 때까지 쉬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셧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함이라는 확신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1억원 빛진 사람이 파산하게 되자, 친구가 와서 그 돈을 다 갚아 주었습니다. 후에 그에게 몇 백만원 빛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큰 빚도 갚아준 사람이 작은 것도 갚아주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지 않으시겟습니까? 우리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얻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우움 가운데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3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이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던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3-39). 아멘!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기도는 왜 해야 하나?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게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8).
많은 성도들에게 기도는 무거운 의무이지 기쁨과 감격이 아닙니다. 기도의 놀라운 차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내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면 기도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8).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이사야서 65:24).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또 우리에게 주실 것을 이미 다 준비해 놓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야고보서 4: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주시지 않고 우리가 구할 때까지 기다리실까요?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에스겔서 36:35-38).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냥 다 아루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분명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 일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시구나!' 이것이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몇해 전 추석 전날이었습니다. 일기예보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태풍의 진로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날 새벽에 저는 태풍 때문에 오랫동안 기도햇습니다. 태풍 바트를 손으로 억누르는 상상을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태풍의 진로가 기도한 대로 바뀐 것을 보았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는 기도 응답을 통하여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하난미을 만나고 경험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의심, 갈증, 고통이 다 해결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머리로 알지만 우리와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 기도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의 저자 이지선 양의 어머니 심정 권사님의 간증을 듣고 한 성도가 보내온 메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용훈이 엄마 김연희 성도입니다. 첫 메일을 목사님께 보냅니다. 저는 어제 금요철야 시간에 지선 양 어머니 되시는 권사님의 간증을 듣고 기도하면서 너무나 많이 울었답니다. 저는 우리 용훈이가 사형선고를 받고 하루하루를 힘든 투병생활을 할 때 엄마로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을 뿐입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나 못난 엄마입니다. 자식이 아파할 때 그저 울고만 일을 뿐 자식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래도 저는 용훈이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심정 권사님의 간증 말씀을 듣고 나니 저는 너무나 부족한 엄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저는 안수기도를 받으면서도 제 몸에 있는 질변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 아버지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기도만 하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나가실 때 저에게 "힘드시죠? 기도 많이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목사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제대로 기도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내 몸을 고쳐 달라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님, 이제는 하나님의 소중한 사랑을 알고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 모든 엄마가 자식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게로부터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응답받으면 어떤 문제가 해결된 것보다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 놀라움과 감격이 더 크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도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알아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기도라는 은혜를 통로로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문제 해결에만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그제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사라지면 기도 역시 멈춥니다. 우리 관심이 문제 해결에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이 겹쳐 어려움에 시달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유난히 춥고 비바람이 치던 어느 날, 새벽기도회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분의 마음속에 갑자기 날시가 궂으면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교인들이 부럽게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탄식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기도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된다고 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잃어버리면 그 무엇도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기도하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성경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불행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예수전도단에서 선교선 아나스타시스호를 살 때, 뉴질랜드에서 모금 캠페인을 통하여 많은 헌금이 온라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잔금만 치르면 되는 어느 날, 로렌 커닝헴 목사가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는데, 방구석 어두운 곳에 누가 서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선교선을 구입하여 사역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느라 정작 예수님에 대하여는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날 모금이 뚝 그쳤습니다. 배 구입이 좌절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언제나 예수님과 모든 일을 의논하며 사역함으로 오늘날의 예수전도다닝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제입니까? 아니면 문제 해결입니까? 그동안 기도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빠 아버지, 나의 기도를 받으소서. 그리고 주님을 저에게 보이소서. 기도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저에게 보여주소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으뢰합니다. 나의 기도의 목적이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게 하소서. 저의 삶 속에서 기도가 생수와 같이 흐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셋째, 찬송은 전심으로 하는 것①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면서 그 기준을 인류 성악가나 대중가요 가수들의 가창력에 두셨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하여 찬송가를 폐기처분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가창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아울러 아름답게 불러야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할 때에 가창력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방과 후 공부로 "음치탈출"을 진행했었습니다. 당시 20명의 학생이 열심히 음치탈출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첫날 한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악기" 라는 말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운 목소리, 화려한 연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보다 가창력이 좀 더 뛰어나다고 해서 우쭐댈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송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외형에 있지 않고 그 중심에 있으며, 바로 그 열정의 농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어떤 찬송을 해왔을까요? 혹시 겉모양은 그럴 듯한데 전심으로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나 않은지요. 제가 처음 찬양 사역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찬송하는지, 장송곡을 부르는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교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잘못된 보수 신앙관입니다.
보수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칭 보수, 보수를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웬일인지 찬송하는 것만큼은 비 성경적으로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찬송을 제법 찬송답게 하는 교회를 향하여 이단, 삼단 운운하던 시절이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입니다.
한 번은 제가 어느 지방 도시에 찬송 세미나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는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세를 자랑했고 보수적 이기로 소문난 교회였는데, 안내를 맡은 장로님의 입에서 계속해서 보수 타령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수천만 원 주고 구입한 오르간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과연 오르간 연주소리가 성전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천여 명의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의 서두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붕어들입니까? 왜 입은 벌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하나님이 과연 이 오르간 소리를 듣자고 이 전에 임하셨겠습니까? 생명 없는 이따위 악기에게 여러분의 사명을 위임해 버렸습니까?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보수, 보수 강조했는데 과연 이 모습이 보수적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하는 보수는 똥물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얼굴들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진짜 똥물로 변해 갔습니다. 먼저의 그 장로님은 씩씩대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일까요? 천만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통쾌해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보수를 가장한 불신앙이요, 중병을 앓고 있는 그들의 심령 상태를 저를 통해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제가 건드렸으니 그들이 당황하고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찬양의 회복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심으로 찬송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교문화의 잔재입니다. 오랫동안 이 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유교사상이 아직도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찬송행위, 즉 성경적인 찬송의 방법이 오히려 유치하고 경망스럽게 느껴져서 아무 쓸데없는 절제의 브레이크를 스스로 걸어왔던 것입니다.
거기다 음악적이 요인까지 겹쳐있습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찬송가는 서양 음계로 작곡되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정서에 맞춰졌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세계화에 따라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적지 않게 이런 문화적 차이가 적용됩니다.
그리고 4부 합창을 위한 편곡 때문에 대부분의 멜로디 음이 너무 높습니다. 아마 한국사람 대다수는 멜로디 음 높이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별 문제가 없겠으나 장년들에게는 이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 때는 대부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게 됩니다. 이 문제는 찬양인도자나 반주자가 조금만 지혜를 가지면 해결 가능한 일인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회중 찬송을 할 때 음이 높은 곡은 그 음을 2-3도 정도만 낮춰서 반주 하면 장년층이 찬송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새벽기도회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몇 가지 요인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교회의 찬송이 침체되어 왔고 그것이 보수적인 신앙 행위로 미화되기까지 했으나 결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는 속히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http://cafe.daum.net/HomeOfYERIM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우십니까?
믿음이 연약한자를 돕고 싶으십니까?
은혜 충만한 가정을 이루고 싶으싶니까?
예림이집 카페를 소개해 주세요
예림이집 카페를 소개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림의집 메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림의집 1303번째 이야기 (0) | 2018.05.30 |
---|---|
예림의집 1302번째 이야기 (0) | 2018.05.29 |
예림의집 1300번째 이야기 (0) | 2018.05.27 |
예림의집 1299번째 이야기 (0) | 2018.05.26 |
예림의집 1298번째 이야기 (0) | 2018.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