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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

예림의집 2018. 4. 17. 10:41

자유주의 신학

    

“19세기 신학”은 1799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 출판으로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신학을 의미한다. 이러한 19세기 신학은 여러 부류로 세분될 수 있으나, 구라파 특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한 신학 사조를 흔히 자유주의 신학, 신개신교 신학, 혹은 현대주의 신학이라 한다. 이것은 192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를, 그리고 1930년대까지 미국 신학계를 주도했다.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는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의미는 “제한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사상 체계나 입장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정신은 개방된 마음, 관용, 진리에 대한 겸허하고 헌신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 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 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context)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적 신학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수행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성경의 무오성 등의 부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그 출발부터 잘못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능력이나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시작이 잘못되면 결론 또한 잘못될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계시 종교에서 윤리 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에서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19세기의 교부로, 또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반면, 19세기의 대이단자로도 비판받고 있다. 이렇듯 이중적 평가를 받고 있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고, 현대 과학과 사상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그는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슐라이에르마허가 끊임없이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주로 그의 신학 방법론 때문이었다. 그는 성경 본문,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 의식에 대한 연구로,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인 통찰의 중심을 이룬 문제는 그리스도론이었다. 학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더불어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경험, 즉 자아 의식에서 추론된 것으로 비역사적인 가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지적된다. 또 속죄론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징벌 대속설과 만족설과 같은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속죄는 하나님 의식이 자기 의식 안에 출현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은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가 신자에게 자신의 하나님 의식을 나눠 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 속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속죄론은 인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의의를 약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죄의 창시자가 아니며 죄의 원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남용이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의 근원을 하나님 또는 인간이나 악마로 간주하거나 죄를 단지 무 또는 단순한 결핍으로 보는 일방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죄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혼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죄의 원인을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찾은 것이 슐라이에르마허 죄관의 특징이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개념이 죄론의 핵심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오류로는 흔히 세 가지가 지적된다. 범신론, 주관주의 및 불가지론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범신론이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교론」을 비롯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초기 저서에는 범신론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으나, 이런 경향은 만년에 이르러 대폭 수정되었다. 그렇다면 왜 범신론자라는 꼬리표가 슐라이에르마허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는 것인가? 슐라이에르마허는 우주를 종교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모든 존재와 생성의 통일체로 이해했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전통적인 유신론적 해석을 주저했다. 오히려 우주를 유한한 것에서 무한자가 나타난 것으로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의 대상을 우주나 세계 전체로 표현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은 범신론을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는 「종교론」에서 하나님이란 말 대신 우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조직체로서의 우주와 그 산물로서의 유한한 세계를 구별할 때 외에는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론」초판이 범신론적 경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이비드 스트라우스”의 「예수전(Leben Jesus)」은 19세기 중반의 거의 모든 신학자가 기독론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흐름의 분기점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신학은 헤겔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튀빙겐학파의 창시자 바우르와 그의 제자 스트라우스, 스위스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조직 신학자 비더만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헤겔 좌파에 속하는 신학자들이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신학은 헤겔학파의 신학 또는 합리주의 신학이라고 불리운다. 한편 이들의 신학은 역사 비평적 신학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들이 한결 같이 역사적 비평을 신학과 성서 연구에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역사 비평적 신학의 특징은 역사학의 타당한 원리들을 성서 연구에 적용시킨 것과, 역사 비평적 연구의 결과를 기독교 본질을 파악하는 원리와 신학 재구성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 비평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적 연구를 하도록 자극을 준 사람이 바우르와 스트라우스였다. 특히 스트라우스의 「예수전」은 역사 비평적 성서 연구의 전형이었다. 스트라우스의 「예수전」은 역사 비평적 성서 연구의 전형이었다. 이 책은 거센 반발과 논쟁을 일으킨 충격적인 저작이었다. 스트라우스가 기적을 부인하고 그것을 신화로 해석한 것,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분리한 것, 요한복음서의 역사성을 부인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스트라우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적 회의주의에 바져 복음서의 역사성을 지나치게 과소 평가하고, 「예수전」을 부정적으로 연구했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 비평적 연구는 전통적인 기독론에 큰 손상을 주었으며 기독교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인 동시에 "세기 최대의 기독교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들어 실존주의 철학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변증법적 신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를 빼놓고서 현대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을 사상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실존 개념을 사용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진실한 인간 존재, 곧 실존은 “하나님 앞에 홀로서는 단독자”였다. 단독자는 그의 사상의 중심 개념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단독자가 되도록 일깨우는 것이 저술 활동의 목적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의 개념을 종교와 신학에 도입했다. 그는 기독교를 역설의 종교로 간주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과 영원의 교차, 즉 신과 사람의 오심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와 설명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파악된다. 따라서 시간과 영원의 교차는 헤겔식의 정반합의 운동이 아니라 절대적인 역설이다.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 한 인격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신인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역설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기성 교회에 대하서도 비판적이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신약 성서적인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 전통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로서, 흔히 자유주의 신학의 왕자로 불린다. 리츨은 당시 기독교가 성서적이며 종교 개혁적인 모습을 상실하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음을 지적하고 칸트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체계에 근거하여 종교 개혁적인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리츨은 기독교의 복음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비주의, 경건주의 등으로 인해 변질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종교 개혁적 이해로 재해석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이 기독교인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한데 비해, 리츨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복음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 즉 신약 성서에서 진술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에 기초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그의 신학 방법론은 슐라이에르마허의 방법론보다 더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츨은 기독교의 본질적 성격은 슐라이에르마허가 생각한 것과 같이 인간의 직접적인 종교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기독교가 무엇인지는 예수에 의해 창건되고 사도들에 의해 유지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의 나라를 창건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위에 세워진 윤리적인 종교라고 정의했다. 

리츨이 후대 기독교 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은 그 견해의 특징이었다. 리츨 신학의 문제점은 기독교를 계시 종교로부터 윤리 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부터 윤리 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만든 것이다. 특히 화해를 하나님의 행위로 보지 않고 인간의 경험으로 간주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신약 성서와 종교 개혁자들의 교훈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된다. 그는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점으로 삼아 종교 개혁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의 신학을 종교 개혁 전통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신학은 19세기와 20세기 신학 사상의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트뢸치는 19세기 말 독일 신학계를 지배했던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대표 신학자만 아니라 20세기 초 독일 신학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특별 계시에 근거하여 종교 문제를 해명하는 초자연주의적 입장을 거부하고 역사적 연구에 의해 종교를 이해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트뢸치의 신학 방법론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고와 역사적 방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 방법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종교를 동질적인 현상으로 취급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초자연적이며 구속적이며 계시에 기초한 것으로 간주한다. 결과적으로 역사적 방법은 전통적인 교의학적 방법의 신뢰성을 손상시키며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견해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도 절대시하지 않고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트뢸치의 평생의 관심사요 학문 활동의 출발점과 중심점이 된 것은 기독교의 절대성 문제였다. 

이것은 또한 그의 사상 중에 가장 논란과 비판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트뢸취의 기본 입장은 어떤 종교도 절대적이거나 종국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트뢸취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인간과 종교에 보편적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인 것처럼 다른 종교들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 자유주의 신학이 도달하게 된 막다른 골목이 트뢸치의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