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림의집 2018. 1. 22. 20:55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어떤 자명한 이치(axiom), 공식, 명제(preposition), 혹은 부정할 수 없는 지식 등으로 한정한다. 또한 인간의 논리나 이해에 부합되고 과학적 증명을 통과한 것을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 한정된 사실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사실인 것은 궁극적 진리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또한 이치, 공식, 명제도 초월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지식, 경험, 이치, 공식, 명제로 정의할 수 없다고 진리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논리, 경험, 공식, 명제에 따라 사실로 주어졌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체계가 더 궁극적인 체계이다 이치, 공식, 명제보다 더 궁극적인 것은 인격성(personhood)을 지닌 진리이다. 바로 그 궁극적인 진리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가 그 진리이다(요 14:6).”라고 하실 때 그 진리는 명제나 이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이 진리의 기준이요 권위요 내용이요 결과요 본질이다. 예수님이 배우고 따라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예수님에게서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진리에 속한 사실들이나 원리나 명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지각(perception)을 토대로 진리를 논할 수 있고 이성(reason)을 토대로 진리를 논할 수 있고 직감(intuition)을 통하여 논할 수 있고 오감(五感)의 경험을 통하여 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진리에 속한 제한 된 사실들을 찾는다고 해서 그 찾음으로 진리가 정해진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찾거나 말거나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위의 여러 방법들의 시도가 처음부터 가능하게 된 것이 진리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제한적 이고 후차적인 인간의 방법들과 정의(definition)로 진리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사실 인식론적 앎(knowing)에도 윤리적 당위(ought)가 들어있다 잘못된 지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은 맞는 지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지식이라고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맞는 지식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 인가? 이 확신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다른 것이다. 자기가 가진 지식의 옳음에 대한 당위는 지식 외의 것에 근거해야 한다. 그 근거의 필연성이 그 지식보다 더 궁극적인 진리이다. “맞아야 한다.”는 당위(ought)는 절대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위는 인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설령 힌두교 신도나 불교 신도가 자신은 환상 혹은 망상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것 이 환상 혹은 망상이 되기 위해서는 환상으로 혹은 망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지속되어야 한다는 당위(ought)는 환상 혹은 망상이 될 수 없다. 즉 어떤 절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절대성은 진리의 속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