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M에 대하여
CCM의 시작
1990년에는 일반 메이저 레코드 회사인 Warner Bros.가 계열회사로서 크리스챤 음반회사인 Warner Alliance를 세웠으며 중 Michael W.Smith의 뮤직비디오/Place in this World, Friends/는 우리나라 KBS의 뮤직 비디오 프로그램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반면에 크리스챤헤비메탈팀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STRYPER는 롤링스톤지의 인터뷰로 구설수에 오르면서 최근 CROSSOVER적인 앨범‘Against the Law'를 내기도 전에 기독교굴지의 음반 및 유통회사인 BENSON으로부터 배포를 외면당하기도 했다. 90년의 최고 판매앨범은 Carman의 Revival In The Land였다
3월에 Myrrh와 A&M사는 Amy Grant의 'Heart in motion'을 출반해서 CCM업계력을 견뎌낼 신앙은 매우 필요하다. CCM은 주일외의 나머지 6일을 위한 음악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성경적 개념을 삶의 모든영역에 적용하기위해 친밀한 시가 및 대중문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CCM은 오늘날 대안으로서의 역활과 영적격려의 적절한 문화적 방법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 쉬운 말로 없어서 못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음악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들의 삶에 적절히 활용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삶을 나누는 좋은 소식의 방편을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Gospel Hour에서 C.C.M에 대한 자료로 양동복씨가 쓰고 있다는 책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있은지 어언 2년 C.C.M에 대한 자료로 목말라 하던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 책 한권이 주는 의미는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C.C.M에 대한 지난 5년 간의 명암을 하나로 집약시킨 듯한 이 책은 이른바 C.C.M 교과서적인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미국 C.C.M의 태동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실제,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자료 그리고 질의 응답은 정말 한줄기 단비 같은 고마움이다.
우리나라 찬양계에 있어서도 이책의 의미는 크다. 솔직히 87년 주찬양 그이름에서부터 본격적 으로 점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C.C.M계는 그이후 G.H군단(?)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아도 큰무리가 없을 것이다. 양동복 P.D를 통해 C.C.M을 접한 하덕규 집사, 그 끈에 연결되어 미국까지 가서 shock 잔뜩 안고 온 박종호, 송정미, 애초부터 작정한 듯한 최덕신, 최인혁 그외... 이런 음악적 자질을 가진 이들을 자극했고, 그리하여 우리나라 찬양계의 수준과 영역을 단숨에 2-3단계 뛰어오르게 한 불씨가 되었던 미국 C.C.M, 하지만 그 본질을 명확히 알기는 사정상 무척 어려웠었다. C.C.M에 대한 그리고 그와 비슷한 류의 언급된 책으로 나온 '크리스찬 락(벧엘사)', 그리고 온전히 세상 락 비판서였던 '락 음악의 위험성(?)' 이 두가지 책자 또한 무비판적으로 번역 들어온 책이었고, 그 논점 자체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논지를 이끌어내서 C.C.M에 대한 비판도 무성했다.
특히 낮은 울타리의 무분별한 비판(초기)과 교계 인사들의 고전음악 사수를 위한 비판의 칼날은 자료의 부족이라는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 또는 개인적인 잣대로의 비판, 고전 음악 사수결의에서의 비판.. 사실 문화, 예술 쪽의 기독적 연구가 거의 전무한 우리나라의 실태에서 다양성 이해나 종교 예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의 이해는 참으로 역부족이었고, 쌍방간의 공방전은 소모전의 성격만 불러일으키며 휴지기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원론적인 부분 에서의 이해부족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 공백의 크기는 꽤 오래 지속되었지만 이번 양동복 P.D의 책은 이러한 양방간에 듬직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해준다고 할 수 있다.
크게 이책의 의의를 들자면 먼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G.H의 5년간의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번째로 수많은 논란속에서 제대로된 첫번째 C.C.M 입문서 라는 점, 세번째, 지금껏 논란의 표적이 된 미국C.C.M의 모습을 정지하고 자세히 밝힘으로써 Christian Music논쟁의 차원을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룰 마련했다는 점에서이다. 사실 이책을 엄밀히 따져보면 하나의 자료 이상의 것으로 평하긴 좀 모자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의 나열, 번역물의 인용 등은 교과서적인 모습을 지니지만 C.C.M 연구서나 비평, 미래지향적인 논지중심의 책은 아닌 것이다. 이점은 지난 2년간 책나오기를 독촉하던 독자들에게 하던, 그의 핑계처럼 아직은 섣부르고 혹시나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책을 내어야만하는 요구의 시점과의 맞물림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라 해 봤자 Gospel Hour를 통해 들려오는 자그마한 조금의 소식들, 가끔 관심 있는 이들을 통한 소식지들, 그리고 아주 희귀했던 C.C.M 매거진, 구닥다리 은성 음반들이 거의 다였던 것이다. 라이센스와 수입이 시작되던(본격적으로) 92년 초 전의 자료는 거의 없었고 그이후 카리스를 통해서 들어오는 자료들이라고 해서 썩 나을 건 없었다. 좀더 나은 음질을 들을 수 있다는 게 하나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
어쨌든 카리스의 수입 TAPE들이 나오고 92년말 지방(대구,대전,부산 등)으로 조금씩 배포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젊은 세대들(그중 진보적인 일단의 무리들..)의 관심도 또한 크게 증폭되었다. 아마도 92년 중반에서 93년 말까지 이 1년이 Gospel Hour에서도 가장 호응이 좋을때가 아니었나 싶다. 공개 방송도 꾸준히 진행되었던 때였고.... 그리고 그와 거의 비슷한 때 하덕규 형제의 쉼, 그리고 박종호 형제의 3, 4, 5집 송정미 자매의 앨범, 최인혁 3집, 최덕신 형제를 주축으로 한 주 찬양의 7, 8, 9집 그리고 '회복', 천민찬 형제의 '친구에게', 임마누엘의 3, 4집, 손영진 자매의 2집, 이성균 형제의 1, 2, 3집 이런 핵심적인 앨범들이 이맘 때에 나왔다. 모두들 그수준에서나 음악성, 그리고 스타일까지 이전에 비해서 급상승한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앨범이란점에서 우리나라 가스펠 역사에서 한자리씩 매김받은 앨범들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앞서서 말했던 것처럼, 이런 현상들의 발화점이 되는, 그리고 그 현상에 수 많은 논쟁들의 포인트가 되었던 미국의 C.C.M현상에 대한 자료들은 턱없이 부족 했고 그 결과 거기에 대한 언급이나 옹호, 비판 또는 그 논점자체가 모호하거나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심했다. 즉 일단은 사실과 자료의 필요성이 더 큰 것이다. 결국 이책은 이책 자체로서 C.C.M에 대한 논쟁을 끝맺는 것이 아니라(저자도 이것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논쟁의 방향적인 측면에서 필자는 이런 점을 기대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이제 이책을 말미암아 미국 C.C.M에 대한 논의에서 한국적 현상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미국적 현상과 논리들을 우리가 납득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쓸데없는 힘을 뺄 것인가? 양동복 P.D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이미 우리나라 상황과 설정에 맞게 C.C.M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비판들은 미국의 비판들을 그대로 옮겨 온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그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일단 언어가 다르고 사상의 기반이 다르고 기독교에 대한 친밀도, 시장의 크기, Media의 분포, 반응 모든 것이 다른 이 나라에서 C.C.M의 논의는 미국 C.C.M에 대한 논의와는 180도 다른것 일 수 밖에 없다. 유교문화권에서 기독교에 대한 배척도는 겪어 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 것이다. 교회 '교'자만 나와도 치를 떠는 사람이 있는 나라와 욕을해도 '하나님'을 들먹거리고 감탄사에 'GOD'이 나오는 나라에서의 반응과 효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선교로써 C.C.M을 하고자 할때 우리나라 상황에서 미국 모델을 적용한다는 것은 1년 내내 가도 라디오에 곡이 한두번 나올까 말까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적용될 성질이 아니다. 과거의 틀, 결코 기독교적이지 못한 틀로 파악할 구조와 상징이 아닌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논의 될것은 C.C.M의 정신, 그 나아갈 바에 대한 온전한 논의와 보다 실제적인 이야기들로 그 논의를 구체화 시켜야 한다.
논쟁은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적인 논쟁으로 이어져야한다. 음악경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노래, 음악 속에 가사들의 방향과 포인트, 전달력의 가감, 메세지의 전파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한다. 같은 말이라도 '어'가 다르고 '아'가 다른데 언제까지 우리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고 있을 것인가.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는 라틴어를 몰라서 성경을 번역 했던 것인지... 즉, 대중과의 교화점이 되는 언어 사용,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성경 구절을 음악에 섞고 스크립쳐 송의 단계를 넘어서는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노랫말들의 논의, 대중을 지향하는 선교의 노래에 있어서 필수로 논의 되어야 할 부분이다.
또 우리가 더욱 살펴봐야 할것은 대중문화의 대량유통 구조에서 발생되는 찌꺼기와 상업적인 논란의 문제이다. 세상의 썩어 문드러진 유통구조 속에서 크리스찬이 개혁할 부분과 또 C.C.M이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구축 되어야할 Media 선상에서의 상업주의의 탈피 문제이다. 이미 미국에서도 C.C.M의 영역이 어느정도 커가고 시장성도 넓어지자 일반 Major Record사들의 뛰어들기와 매수의 손길이 펼쳐지고 있다. 상업 우선의 가치관 속에서 C.C.M의 순수한 복음정신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은?
그리고 C.C.M의 참정신이 단지 도구의 유용화가 아니라, 참다운 기독정신의 발현과 자유로울 수 있는 Christian이 되기에 초점이라면, 정체되어 있고 권위위주의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 이땅의 종교적 관습을 뒤엎는 시도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참다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으로의 삶을 우리가 접하는 모든 문화환경 속에서 펼쳐 내야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누구 한테 기대 할 것인가.
어떻게 펼쳐 낼 것인가.
우리가 세상처럼 두 팔을 치켜들며 데모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나아갈 것인가.
아마도 이제는 모든 논의와 논쟁의 초점이 보다 본질적인데로 돌려져야 하지않을까 생각한다.
노래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와 더불어 Christian들이 불러야 할 노래, 누려야 할 음악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물음 제기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언어 철학과 커뮤니케이션화 에서 음악사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초점 없는 질타에서 벗어나 발전 지향적인 합의로의 논의가 시작어야 한다.
C.C.M이 단지 현대적인 음악을 통한 선교라는 이해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모든것이 타협되고 변질되어 버릴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내에서 C.C.M은 진실로 음악적인 것보다 그 컨템퍼러리한 정신, 성육신한 사건의 현대적인 이해와 실천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국의 노래꾼들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한다. 음악은 현대적인데 가사는 항상 내면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어제의 노래이다. 우리의 오늘과 현실에 충실한 이땅의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하는 노래들, 그리하여 이 땅을 바꾸어 버릴 힘을 가진 노래들, 한국 C.C.M에 바라는 소원이다.
하나님께서 부디 이 일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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