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미국 인디안들을 위한 최고의 선교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후손으로 대각성 기간 중 헌신한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동하는 인디안들을 쫓아다니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만 하는데 일생을 드렸다. 결국 그는 과로로 인해 5년 정도 일하고, 29세 때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상 중요인물이 된 이유는 소박하고 경건한 헌신적인 생활로 수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그의 편지 겸 일기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한국에서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출판)라는 제목으로 그의 전기를 출판하였다. 그 책은 기독교 고전 중 고전으로 윌리암 캐리, 헨리 마틴 등이 이를 읽고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 헌신하기도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1718년 코네티컷의 하담에서 지방의 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데이빗이 8살 때, 그의 어머니는 14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양친을 읽은 슬픔으로 항상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산 브레이너드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기보다 생각이 깊고 영혼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며 자랐다. 1739년 21세의 나이로 예일대학에 입학한 그는 대학 내의 비신앙적인 분위기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중 그는 대각성 운동의 영향에 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학교당국과의 마찰로 인해 퇴학을 당하였다. 이 일로 한동안 우울하게 지내던 브레이너드는 1742년 학창시절 인디안 선교에 관해 강의를 했던 E. 펨버튼의 초대를 받고 뉴욕으로 가게 된다. 뉴욕에서 그는 인디안 선교를 위해 파송을 받았고, 베테랑 선교사였던 존 서전트의 지도아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브레이너드는 독립성이 아주 강해, 혼자 힘으로 개종자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광야에서의 생활에 대한 준비와 원주민들의 언어 공부도 없이 그냥 무작정 선교사역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브레이너드는 초기 사역 기간에 고독하고 낙심되는 일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첫 번째 사역지에서의 실패를 안고, 두 번째 사역을 펜실베니아에서 하게 된다. 그는 인디안들의 큰 환영을 받았고 추장의 집에서도 설교를 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척은 느렸다. 많은 낙담의 시간을 거쳐 1745년 여름 인디안들 사이에 큰 부흥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1746년까지 부흥이 계속되어 1년 반 뒤에는 150명 이상이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폐렴으로 몸져 눕고 그의 선교사역도 마무리 되었다. 뉴저지에 있는 죠나단 에드워드의 집에서 에드워드의 딸인 제루사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으나, 1747년 10월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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