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다 (사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시간에 “위기는 기회다”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나 위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맞이하여 위기의식을 가졌느냐 아니면 갖지 못하였느냐 하는 것의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애그리(James Aggrey)가 경험한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새끼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이 독수리가 다 컸음에도 날개를 펴서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밖에 두어도 지붕에다 올려놓아도 공중으로 내던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장면을 어느 조류연구가가 보고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독수리라면 날아오를 것이다." 말하며 독수리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걸어서 내려올 수 없는 높은 바위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거기에 앉아 아래를 여러 번 둘러보더니 드디어 그 큰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 먼 지평선을 향하여 사라졌습니다. 위기의식이 독수리의 위대한 가능성을 끌어낸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지금 우리 한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625전쟁 이래 가장 어려운 난국에 처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큰 위기는 국민들이 위기를 그렇게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위기입니다. 여기에 대해 최소한 우리 기독교인들이라도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욥 다윗 다니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영적위기입니다. 모두가 자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와 그의 유다 나라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토록 영웅적인 왕 웃시야가 나병에 들어 죽었습니다. 웃시야는 유다의 10대 왕으로 52년간 통치하며 나라를 신앙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으로 심히 부강한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던 웃시야입니다. 더구나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하 26장을 보면 나라와 민족의 영웅인 웃시야가 교만해져서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분향을 하려 하다가 이마에 나병이 발생하여 죽었습니다. 그 때가 B.C 750년경이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으니까 불과 30년 전이니 국제정세가 심히 혼란한 때였습니다. 위기상황이 다가왔습니다. 그 때 이사야는 위기의식을 깊이 느꼈습니다.
왜 위기의식이 중요할까요?
1. 하나님께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가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합2:20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 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기도하러 들어간 것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으로 달려가 기도했습니다. 위기상황에서 그의 간구가 어떠했을 것인지 여러분이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울며불며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며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득하였고 천사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서서 찬양을 드립니다. 그는 거기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정신적 의지였던 웃시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단지 하나님을 만나는 어떤 체험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이것은 곧 나라를 책임져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임재가 온 나라와 온 세상에 가득하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에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피하여 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길의 보장을 약속 받았습니다. 인간은 완악해서 웬만큼 고난 당해서는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그래서 사55:6-7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다 믿어도 그 사람은 안 믿을 것만 같던 어떤 분 보니까 남편이 사업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또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니까 그제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더군요. 이렇게 완악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시32:5-7에도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사야처럼 응답 받고 보장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위기를 만나도 위기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기의식을 가져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해도 형식에 그치지 말고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2. 위기는 신앙훈련의 기회입니다.
2절에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할 만큼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웃시야처럼 도리를 떠나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왕이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박할지라도, 혹은 제사장이 하는 일이 양에 차지 않게 보여도 웃시야처럼 정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천사들이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렸는데 그것은 겸손입니다. 다른 둘로는 발을 가렸는데 이것은 절제입니다. 그리고 다른 둘로는 날며 찬양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듯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기는 우리의 신앙을 바로 훈련시키는 기회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합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생활을 벗어나 마음과 몸 드려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할 만큼 하나님을 섬기십시다.
그런데 왜 문지방입니까? 이사야가 문지방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문지방을 넘으면 실내인데 웃시야 사건을 알고 있는 이사야인지라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지방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히12:11-13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3. 위기는 자기 발견의 기회입니다.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과 천사만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이 이사야에게 비춰지니 이사야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빛이 비춰지기 전에는 자신은 그런대로 율법대로 살아왔고 하나님을 위해 할 만큼 충성했으며 화려한 궁중 제사장으로서 남다른 긍지를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을 보니 너무나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자기 입술의 부정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입일까요? 그는 선지자로서 왕에게 바른 말 못해 왕이 잘못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큰 죄는 성도들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사람을 의식하여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며 가슴 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제단 숯불로 그 입술을 정결케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해도 하나님 앞에는 천국의 물두멍이 있어 우리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4. 그리고 위기는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람은 사명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의 끝이 바로 인생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붙잡아야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문제 없을 때는 내가 원하는 일만 하려고 하지 사명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자기 사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간곡한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그 심정이 바로 내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기 사명 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명을 감당치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명에 결과가 없어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프리카 말라위의 경제수도는 블랜타이어인데 이 수도의 이름은 선교사 리빙스턴이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고장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합니다. 리빙스턴이 그곳에서 사역을 할 때 거의 한 사람의 회심자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그 땅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그 나라의 수도를 리빙스턴 고향 이름으로 했을까요? 이처럼 믿음으로 뿌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에게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심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위기를 통해 인류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입니다. 한 마디로 위기는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사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살고 나오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위기가 진짜 위기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위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위기도 해결 받는 가장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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