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가난하기 짝이 없던 영국의 구두 수선공 출신의 윌리암 캐리는 “위대”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같았다. 그러나 현재 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 해외 선교의 위대한 세기가 도래하도록 이끈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윌리암 캐리는 10대에 회심을 경험하고, 20세에 5살 연상의 도로시와 결혼하였다. 그는 빈곤과 비참한 결혼생활 가운데서도 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 목회에 주력했다. 그는 “쿡 선장의 항해기”라는 책을 보면서 마음 속에 선교의 열기가 뜨겁게 자극되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선교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보면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선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상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했고 도리어 캐리를 비웃으며 말렸다. 캐리는 1792년 봄, 87페이지짜리 책을 발간하여 그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그 책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 봄” 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는데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아주 설득력 있게 씌여였다. 그는 그 책에서 선교사를 보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다. 그리고 그는 침례교연합회 모임에서 많은 목사님들에게 이사야 54장 2-3절을 설교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 하십시오”
그의 설교에 감동 받은 목사들은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침례교 선교회였다. 윌리암 캐리는 우여곡절 끝에 교회의 파송을 받았다. 그는 많은 가족들을 이끌고 인도에 도착하였고, 동인도회사의 적대 속에서 사역을 시작해야 했다. 캐리의 사역은 동인도회사의 방해, 말라리아, 5살 된 아들의 죽음, 아내 도로시의 정신병, 인도인 개종자가 없는 사역 등으로 난항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는 동인도회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덴마크령 세람포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는 34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세람포를 인도에서의 침례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캐리의 높은 수준의 인격은 세람포 사역 성공의 첫번째 이유였다. 그는 물질적 희생을 감수하였고 선교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그런 그의 태도는 주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감싸주는 신기한(!) 능력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세람포는 성공적인 선교팀의 모범이 되었고, 사역의 열매들이 그 증거였다. 학교 설립, 인쇄시설 설립과 번역사업 등의 진행은 캐리가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로 성경을 완역하고 다른 언어로 완역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영국의 선교본부가 번역의 질에 문제 있음을 지적하였을 때, 캐리는 번역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에 낙담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번역열은 식지 않았고 그는 재작업을 시도했다. 캐리는 번역과 복음사역에도 바빴지만, 교회 지도자와 복음 전파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세람포 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1834년 캐리가 인도에서 잠들기 전까지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 교육학, 목회 영역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인도의 나쁜 관습과 싸워 과부의 화형, 유아 살해 등을 폐지하는데 앞장섰고 인도의 좋은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캐리는 선교의 방법론적인 면에서 그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후배 선교사들과는 달리 서구문화를 인도에 이식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인도문화를 존중하였다. 그는 인도에 “현지인 목사에 의한”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과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제공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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