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마르쿠스와 나르시사 휫트만 부부(Marcus and Narcissa Whitman)

예림의집 2017. 8. 13. 09:32

마르쿠스와 나르시사 휫트만 부부(Marcus and Narcissa Whitman)



휫트만 부부는 19세기 초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던 전문인(의료와 어린이사역)들이었다. '건초더미 기도회’를 시작했던 5인 중 한 사람이 마르쿠스의 주일학교 담임교사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쿠스와 나르시사는 인디안 선교에 대한 공통된 비전으로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 휫트만 부부는 헨리와 엘리자 스폴딩 부부와 함께 오레곤 지역의 선교를 위한 5개월간의 여행을 감행한다. 힘겨운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선교팀은 서로 간의 관계가 어려워져 서로 다른 지역을 섬기기로 하고 헤어졌다. 휫트만 부부는 와이일랏푸 지역에 거주하며 백인들을 아주 증오하는 케이유스 인디안들을 대상으로, 스폴딩 부부는 라파이 지역의 네즈 퍼스 인디안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휫트만 부부는 어린 딸 앨리스를 사고로 잃게 된 슬픔을 경험하는 와중에서도 의료사역과 농장 경영에 힘을 쏟았다. 휫트만 부부의 농장은 곧 이민자들의 숙소로 기능이 변질되게 되었다. 그들은 선교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케이유스의 인디안들에게 큰 비난을 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휫트만 부부가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의사와 사역자의 직분을 수행하였지만, 인디안들은 부자가 되는 그들을 시기하였고 그로 인해 백인들이 유입된다고 생각하였다. 나르시사도 오레곤 사역 8년을 지나면서 인디안 선교의 열정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었고, 마르쿠스는 인디안들의 물질적 요구에는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다. 휫트만 부부는 복음과 문명화를 구별하지 못했는데, 백인과 같은 문명화를 거절하는 인디안들은 영적인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쿠스가 와이일랏푸에 심각한 전염병이 나돌아 동분서주하며 치료했지만 인디안들은 그가 고의로 그들에게 독약을 투약하고 있다는 의심을 했다. 1847년 11월 말, 휫트만 가에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을 포함한 인디안 2명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마르쿠스를 시작으로 14명을 살육하였다. 나르시사는 아이들과 함께 숨어서 죽음을 피했다. 곧 군대가 투입되었고 1850년 5명의 케이유스 인디안들이 살인혐의로 처형되었다.


반면 네스 퍼스 인디안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던 스폴딩 부부는 세상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선교사역에만 매진하였다. 그들은 교회 세우기와 아이들을 위한 학교운영, 인디안 말로 찬송번역 등 꾸준하고 열심 있는 선교사역을 통해 영혼을 구하는 결실을 맺고 있었다. 1850년 휫트만 살해사건으로 선교지를 떠났던 스폴딩 부부가 1871년 라파이로 돌아왔을 때는 네스퍼스와 스포케인 인디안 사이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3년을 더 사역하고 헨리 스폴딩은 인디안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19세기가 지나자 인디안 선교에 대한 열망이 식어졌다. 인디안보다는 미국 백인들의 발전에 방해가 안 되는 해외에서의 선교가 장려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인디안 선교를 실패로 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두 문화가 땅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투쟁한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인들의 마음 속에 인디안에 대한 인종적, 문화적 우월감, 인디안 문화가 기독교와 맞지 않는다는 편견 등은 감추어진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