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제임스 찰머스(James Chalmers)

예림의집 2017. 7. 18. 08:52

제임스 찰머스(James Chalmers)


제임스 찰머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석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십대 때의 어느 주일 오후 교회학교 시간에 목사님이 읽어 준 한 피지 선교사의 감동적인 편지를 듣고 태평양 지역에서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목사님은 청소년들에게 결단을 호소했다. 그리고 찰머스는 자신이 선교사로 가겠노라고 자원하였다.


찰머스는 선교사로 자원한 지 10년 후인 1866년에 아내 제인을 데리고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그는 한 때 존 윌리암스가 사역한 적이 있었던 라로통가(Rarotonga)에서 10년 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전부터 전혀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지역에서 이방인들과 직접 만나 개척 사역을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도 라로통가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직 탐사도 되지 않았던 뉴기니아에서 사역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뉴기니아에는 이미 라로통가 원주민 선교사들이 1872년에 들어가 사역하고 있었다.


1877년 드디어 찰머스는 간절히 바래왔던 뉴기니아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서양 문명이 전혀 침범하지 않은, 수 세기 동안 식인 풍습이 존재해 온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머스는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는 다른 원주민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래서 원주민들로부터 ‘타메이트’라고 불렸는데, 그 말은 ‘관례적인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모든 종류의 사람과 어울리고 그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져온 선물도 자유롭게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잔치에 참석하여 함께 즐겼는데 다만 사람 고기만은 거절했다. 같은 또래의 선교사들이 모두 검은 양복에 모자를 쓴 정장 차림을 하였지만, 그는 평상복을 즐겨 입어 원주민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원주민들과의 언어 소통에는 다소 지장이 있었지만 그런 약점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보완하였다.


그렇다고 찰머스에게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내 제인의 건강이 문제였다. 뉴기니아에 온 지 2년이 지난 1879년, 제인은 치료를 받으러 오스트레일리아로 갔으나 그 해를 넘기지 못 하고 숨졌다. 아내를 잃은 슬픔은 오히려 원주민들에 대한 더 깊은 헌신의 동기가 된 것 같았다. 같이 일하는 원주민 선교사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 자신의 슬픔을’ 묻겠다고 서약했다.


찰머스가 이 섬에 온 지 5년이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이 일하던 지역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대신 이방신의 신전은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제사 의식은 밤에 숨어서나 행해졌다. 원주민들은 진실함을 가지고 사역하는 찰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찰머스는 항상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901년 봄, 그는 젊은 동역자 톰킨즈(Tomkins)와 함께 사나운 식인종들의 지역으로 알려진 뉴기니아의 플라이 강(Fly River) 유역을 탐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자 구조대가 보내졌는데, 구조대가 가서 얻은 것은 찰머스와 톰킨즈가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들에게 잡아먹혔다는 소식뿐이었다. 그 끔찍한 소식은 기독교계를 경악시켰으나 찰머스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뉴기니아에서 사역했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찰머스는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