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존 콜러릿지 패터슨(John Coleridge Patteson)

예림의집 2017. 7. 16. 07:37

존 콜러릿지 패터슨(John Coleridge Patteson)


1827년 영국의 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수준 높은 교육을 시키고 싶어하는 그의 부친에 의해 이튼과 옥스퍼드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부친의 친구이자 뉴질랜드의 첫 번째 성공회 주교인 조지 셀윈(George Selwyn)으로부터 기독교 사역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졸업 후 헌신하였다. 패터슨은 성공회 사제로서 서품을 받고 1855년 태평양으로 떠나기 전까지 12개월을 지방 교구에서 일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것 역시 셀윈 주교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셀윈 주교는 남태평양에서 10년 이상 사역해 왔는데 그의 넓은 교구를 관장하기 위해 패터슨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패터슨은 1856년 셀윈과 함께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도착한 직후 그에게 처음으로 멜라네시아 시찰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패터슨에게 시찰 이상의 것을 가져다주었는데, 그 여행을 계기로 그는 멜라네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선교선인 서던 크로스(Southern Cross)호를 타고서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배에 태우고 선교사로 훈련시키기 위해 뉴질랜드로 데려왔다. 그것은 다소 비교리적이었으나 패터슨과 셀윈은 이 소년들을 훈련시켜 사역자와 교사로 만들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파송해 복음사역을 하는 것만이 남태평양 지역을 복음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멜라네시아 소년들이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만큼 충분하게 교육을 받으면 패터슨은 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도록 권장했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이나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는 훈련시킨 젊은이들을 파송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복음사역에 뛰어들어 일하기도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재파송 되었다.

그러나 멜라네시아에서 계속 사역하던 중에 패터슨은 자신이나 자신에 사역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패터슨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섬들에 대한 외부 세계의 상업적 이해가 팽창된 데 있었다. 19세기에 이르자 사탕수수와 목화 재배 농장이 고소득 사업으로 부상했고, 그에 따른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사업이 생겨났다. 이런 유럽인들의 죄악상은 패터슨의 사역에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 노예상들에 대한 저주와 그들을 자신과 구별하려는 패터슨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청년들을 배에다 태워가는 그의 선교방법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를 쉽게 풀 수가 없었다. 그가 함께 데리고 있던 소년들에게 학교교육을 납득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낙심된 상황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사역을 추진해나갔다.

1871년 9월 여행 중이던 패터슨은 아침 성경공부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뭍으로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실종되었고, 그를 찾으러 간 사람들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게 되었다. 나중에 패터슨이 살해당했음이 밝혀졌다. 살해당한 사람이 친절하고 점잖은 선교사였음을 안 원주민들은 놀라 시체를 깨끗이 씻어 배로 가져왔던 것이다. 패터슨의 시체는 수장되었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에 주의를 끌게 되어 마침내 노예 밀매는 근절되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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