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플로렌스 영(Florence Young)

예림의집 2017. 7. 7. 16:22

플로렌스 영(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 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녀의 오빠는 퀸즈랜드에서 커다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는데, 그 농장을 방문하고 그녀는 인생의 항로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녀는 비참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복음전파에 기꺼이 헌신한 것이다.

플로렌스는 어렸을 때부터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해 성경을 배워왔기에, 1882년부터 시작한 교육 선교를 잘해 낼 수 있었다. 처음엔 10명으로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점차 사람들이 몰려와 곧 80명이 되었고, 그 중 절반은 주일 외에도 매일 저녁 배우러 왔다. 내리쬐는 뙤약볕 속에서 하루 12시간 혹은 그 이상을 사탕수수를 베는 작업은 노동자들에게 살인적인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귀중한 휴식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들으러 몰려왔다.

사역이 성공하자 플로렌스는 사역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그 가운데 같은 플리머스 형제단 교인이었던 죠지 뮬러가 보내온 지원금은 퀸즈랜드 카나카 선교(카나카:수입해 온 노동자를 일컫는 말)를 준비하고 있던 그녀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곧 그녀는 가르치는 사역을 맡을 남자 선교사들을 모집하였고, 선교 구역 내에 있는 농장주들에게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 결과 19명의 선교사들에게 수 천 명의 노동자들이 배우려고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후에 자기 부족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도 있었다.

1890년 플로렌스는 중국 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중국내지 선교회에서 봉사하기 위해 떠났다가, 1900년에 다시 남태평양으로 돌아와 이미 많이 변해버린 선교사역을 지도하였다.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법으로 금지되면서 1906년경에는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플로렌스와 그녀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최근에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명칭을 남태평양 복음 선교회(South Sea Evangelical Mission)로 바꿨고, 플로렌스의 두 조카가 이 선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10명의 다른 친척들이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동참하였으며, 생동감 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솔로몬 제도는 계속 부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