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나단과 로잘린드 고포드(Jonathan and Rosalind Goforth)
고포드는 1859년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 주의 서부에 있는 한 마을에서 11명의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18세 때 회심하였고, 「로버트 머레이 맥케인의 회상록」을 읽고서 즉시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헌신하였다.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위해 그는 녹스대학(Knox College)에 입학했지만 학생들 중 자신만이 선교와 하나님께 헌신의 열정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신학생들이 그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었고 졸업할 때쯤에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고포드는 1885년 봄에 도시 선교사역에 참여하면서 로잘린드 스미스(Rosalind Smith)를 만났고 그해 말 약혼을 하고 결혼하였다. 그리고 녹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캐나다 장로교회가 중국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내지 선교회에 지원하였고 1888년 고포드 부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하남 성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고포드는 중국에서의 사역 초기부터 능력있는 전도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중국인과 접촉하기 위한 그의 방식은 그 당시 선교사들의 방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고포드는 유럽풍의 자기 집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하여 접촉하고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포드의 집에는 언제나 손님들이 북적댔고 고포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뒷날 고포드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방식의 전도 때문이었다. 이런 좋은 열매들도 있었지만, 고포드 부부는 중국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자신들도 자주 앓아누웠을 뿐 아니라 11명의 자녀 중 5명이 병으로 죽었다. 화재, 홍수, 도둑으로 인한 피해도 있었고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 그들이 당한 최대의 곤경은 1900년 의화단 사건을 피해 1,600km나 되는 먼 길을 쫓겨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역경 속에서도 중국의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그들의 비전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시작했던 고포드의 순회 전도 사역은 그 후 계속된 부흥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의 부흥회 사역은, 그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온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던 부흥의 물결에 깊은 감동을 받고나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그는 그가 목격했던 부흥의 놀라움을 간직한 채 만주로 갔는데 곧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 후 그는 만주지방과 중국을 여행하면서 사역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병들어 죽거나 나이가 들어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고포드는 7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열정에 가득차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녔다. 심지어 눈이 어두워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중국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역을 계속했고, 74세가 되었을 때 그는 캐나다로 돌아가서 마지막 남은 18개월의 생애동안 순회 여행을 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헌신된 일꾼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수많은 동양인들 사이에 복음의 뚜렷한 증거를 남기고, 잠든 채로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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