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찬양팀 영성 훈련

헌신(출 32:25-29)

예림의집 2017. 6. 19. 08:53

헌신(출 32:25-29)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희생을 드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자기들 곁에 없다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모세를 더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만약 보이는 것이 자기에게서 사라질 때 사람은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자기의 미래를 책임져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들의 미래는 모세가 책임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세가 없자 그들은 자기들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안정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집 전셋집에서 예배를 모이는 것보다도 조그마해도 좋으니까 

우리 땅에다가 아담한 예배당을 지어서 예배를 드리면 더 은혜가 될 것같고, 더 기쁨이 될 것 같고, 더 힘이 날 것같고, 더 안정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예배당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처음 시작할 때 예배당 건축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잘 지어진 예배당을 바라보면서 마음뿌듯해 하고, 든든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천국에서는 티끌만큼도 필요없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수요일에 ‘천국갈 때 예배당 지고 갈 것도 아닌데 왜 예배당을 원하는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마음에 안드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천국에서 필요 없는 것들에는 마음두지 맙시다. 천국에서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이것이 믿음이고, 천국을 아는 자입니다. 예배도 눈에 보이는 예배만을 즐기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희생을 드리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것을 즐기다 보니 악기에 관심을 두게 되고, 돈이 있는 교회는 몇억씩 하는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게 됩니다. 


저는 2년 전에 서울 양재동의 횃불 회관에 설치되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관리하는 분들은 오르간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독일제인데 3억인가를 들여서 설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관리인에게 "이거 소리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물론이죠. 돈이 얼만데, 이거 치면 은혜가 저절로 되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비싼 악기, 소리가 좋은 악기를 가지고 반주를 하면 찬양에 은혜가 저절로 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귀에 들리는 것을 즐기는 우상입니다. 

실제 서울에서는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교회를 찾아간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몇억을 가지고 악기를 사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몇억이라 할지라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이프 오르간이 일반 피아노보다 더 은혜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가대가 없으니까 예배가 허전하다든지, 강대상에 시든 꽃을 그대로 꽂아 놓은 것까지 신경을 쓰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고 있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안정을 찾고 평강을 찾아보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할 때 모세에게로 모여드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레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즉 레위인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희생을 드리는 일에 함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서있던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에게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레위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이 날에 레위 자손의 칼에 죽은 자가 삼천명 가량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레위인이 그 아들과 형제를 친 것을 가지고 여호와께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헌신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헌신한다는 것을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는 것을 가지고 헌신이라고 이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헌신은 그런 의미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긴 하였어도 결국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을 몽땅 죽인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아들과 형제를 죽인 것을 가지고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레위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을 나누어서 자기들의 분깃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레위지파들만은 분깃이 없습니다. 즉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살 터전이 없는 것입니다. 땅이 있어야 천막을 칠 수 있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서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다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레위인은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하나님은 레위인이 성막에서만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오는 제물을 가지고 양식을 삼도록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손에 쥐고 있으므로 안정을 찾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다는 것은 결국 미래가 확실치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비록 레위인이 성막의 일을 전담했다고는 할지라도 땅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땅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요즘 이러한 레위인의 규례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직장을 가지지 않고 교회에서 교회에 관계된 일만 하는 목사를 비유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 레위인이 오늘날 목사를 말한다면 목사는 그 어떤 재산도 가지면 안됩니다. 땅도 집도 가지면 안됩니다. 오직 남이 주는 것을 가지고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목사는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레위인은 지금의 목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레위인은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족속이 아닙니다. 제사의 제물이 그들의 양식입니다. 즉 하나님이 레위인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신 18:2에 보면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살기란 그야말로 여호와의 은혜가 아니면 되어질 수 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레위인을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얻은 기업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얻은 기업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레위인을 통해서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다면 레위인이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도구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레위인이 레위인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는 레위인에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위인이 심판자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장차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금송아지를 섬긴 형제, 친구,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레위인이 형제 친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금송아지를 섬긴자들을 죽인 것은 여호와의 편에 선다는 것은 형제나 친구 이웃까지도 초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서 어긋나 있는데 형제요, 친구라 해서 타협하고 양보해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편에 선자는 형제나 친구들에게까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잘못됨을 보여주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헌신이란 여호와를 위해서 무슨 큰 일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편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에 어긋나 있는 것은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이고 전부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여호와께 헌신하는 삶입니다. 내 전체를 여호와께 드린 삶인 것입니다. 

오늘날 레위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전부로 삼고 사셨습니다. 머리 둘곳도 없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에 붙들려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둘 곳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내가 사는 집이 좋니 나쁘니 하면서 불평 불만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멸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 편에 서서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서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 땅에 보여주신 것이 곧 예수님의 헌신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호와께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곧 멸망 받을 죄임을 심판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린 예수님에게서 돈버는 기술이나, 복받는 비결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헌신의 삶에 대해서 배울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여호와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는 헌신의 삶을 소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