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 연구
-그의 신 인식 방법과 관련해서 (김 주 한 교수)
I. 서론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또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대답도 다양하였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세상(또는 자연),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성을 규정짓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들은 기본적으로 성서의 창조증언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어왔다. 성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creatio ex nihilo)라고 증언한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은 두 가지 기본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 세상 피조물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전적인 타자이시다 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창조되지 아니하셨고 완전히 독립적인 분이시며 전적으로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온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래서 그 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 친밀하게 현재 하시고, 세상을 지금의 세상으로 존재케 하며 운행 하신다. 라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재하신다. 이렇게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은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내재하고 계신다. 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역설적이며 어찌 보면 모순된 주장처럼 보이는 이러한 창조확언들은 그레꼬-로만 시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면서 기독교 유신론으로 발전하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플로티누스의 유출설 등은 기독교 신론을 정교하게 형성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신론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서 한층 더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다양한 개념들과 사상들이 첨가되면서 더욱 보편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특별히 중세 스콜라주의의 융성기를 주도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과 기독교 신학을 탁월하게 결합시켜서 우주론적 기독교 신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은 사변적인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논증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방법은 자연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며 마틴 루터는 신 인식에 관한 이러한 방법을 거부하고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신 인식론에 있어서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주장하는 성서적 신앙에로의 복귀이며 루터 이후 오늘날까지 그의 십자가 신학은 많은 현대 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이시며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 진술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하나님 존재 증명에 관한, 즉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보다는-분명히 이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은 있지만-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 라는 점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후자의 질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루터의 신학은 칭의 론이 그 핵심에 놓여있고, 칭의의 근거로서 십자가 신학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십자가 신학은 루터가 하나님을 말하는 방법인 동시에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 신가를 설명하는 수단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오늘날 하나님 인식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고려(reflection)를 함에 있어서 많은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II. 십자가 신학의 배경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중세 후기의 스콜라 철학 사상과의 첨예한 대립에서 형성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서 중세 스콜라주의를 반박하였다. 루터가 논박한 스콜라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너무도 탁월하게 설계된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 방법이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학을 정교하게 종합시킴으로써 중세 스콜라 시대의 우주론을 형성하였다. 토마스는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 방법을 비판하면서 신 존재 증명 방법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이른바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Cosmological proof)방식이다. 토마스는 안셀름이 말하는 것처럼 신의 실재는 여타 사물들에 속해있는 어떤 객체적인 특성으로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토마스는 현 세계의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피조계를 관찰하고 그 피조물의 질서 체계와 본성을 유추해 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로까지 소급 해 간다. 토마스의 이러한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토마스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와 어거스틴 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모든 존재들의 궁극적인 근원 자가 되는 제일 원인(the First principle)을 상정하고서 그 원인으로부터의 존재들의 파생(derivation)을 말한다. 그의 스승 플라톤의 우주론-즉 오직 보편적인 이념(idea)만이 참으로 실재하고 현실성을 가질 뿐, 개별적 사물들이란 단지 보편적 이념의 모사(copy)에 불과하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란 이념이나 피안적인(other-world)성격을 지닌 어떤 원상(ur-form)과 같은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보편자에 관한 우리의 언술(affirmation)은 사실은 시공간의 테두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별적 사물에 대한 언술 일뿐이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판단은 다만 그와 같은 개별적인 사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무쌍한 개별적 사물들과는 무관한 불변의 형상이 존재 한다.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form)과 질료(matter)가 서로 접촉하면서 운동이 발생하고 거기에서 모든 존재들이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형상과 질료 사이에 발생하는 운동은 이 운동을 있게 만드는 최초의 원동자, 즉 부동의 운동자 이면서도 그 자체가 운동자 일 수 없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부동의 동자는 질료가 배제된 순수형상이어야 하고, 동시에 완전한 것이어야 하며, 다시 이러한 절대적인 궁극의 완성자는 오직 하나이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제일의 운동자, 즉 부동의 동자는 바로 신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러한 신 관념은 중세 신학의 유신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시대 사상의 기반을 제공한 사람은 어거스틴 이었다. 어거스틴은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였다. 그의 신학의 배면에는 희랍철학의 영향, 특히 신 플라토니즘이 깊숙이 깔려있다. 그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의 사상을 배웠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의 계층적 질서 개념을 배웠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이 세상 최고의 실재자인 하나님과 그 밖의 존재자들과의 관계 구조 속에서 사랑의 교리를 선포하였다. 어거스틴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하이에라키를 상정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들 중의 가장 최고의 정점(apex)에 위치해 계신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으로서 모든 존재들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부동의 동자로써 이 세계를 움직이시는 절대적 존재자(absolute being)의 개념을, 그리고 어거스틴에게서는 존재의 하이에라키에서 최고의 위치에 계시는 하나님 개념을 배웠다. 토마스는 이들의 두 사상을 종합하여서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이라는 스콜라신학의 거대한 체계를 세웠다.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 방식은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구조에 대한 설명들을 제공한다. 토마스는 창조 세계의 구체적인 특성들로부터 최종단계인 존재의 존재에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인과 사슬망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그는 자연과 초자연세계와의 연결, 이성과 계시의 상호조화, 철학과 교회 도그마와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토마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 하신다: 존재하게 하시는 분과 존재한 다른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저자이시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실로 그 피조물들을 존재케 하신 주인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그 피조물들을 실제로 존재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는 길은 피조 된 정신들에서도 가능하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토마스는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럽지만 낙관적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 방식은 13, 14, 15세기의 중세 세계관을 특징지었다. 모든 존재들은 목적에 의해서 설명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다 질서 정연한 세상에서 어떤 목적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태들(occasions)은 미래의 목적들, 즉 궁극적인 원인들(final causes)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세상 피조물들에 대한 이러한 목적론적인 설명은 모든 피조물들은 우주의 존재계층 질서 안에서 하나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러한 피조물들의 행동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구성한다. 바부어(Ian G. Barbour)는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전제 때문에, 그리스와 중세 과학은 주로 귀납적이기보다는 연역 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중세의 사고는 세상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인식되고, 경험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인간 지성의 합리적 파워들은 세상의 참다운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믿었다. 세상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잠재성들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세상 창조물들은 인간의 지성 안에 현재하며 또 그것들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 방식에 대한 이러한 입장들은 이성과 계시의 조화에 대한 그의 주장에 근거해 있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 철학과 성서 신앙으로부터 기인한 요소들의 분명한 종합을 보여준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자연과 계시 양자에 모두 열려있다. 자연적인 진리들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의해서 알려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반면에 계시된 진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의해서 드러난 정보를 포함한다. 모든 진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에 이 둘의 기본적인 자원들은 서로 서로 상응한다. 따라서 토마스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이성이란 신앙에 중요한 서언(preamble)이다.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포함하여 어떤 신학적인 진리들을 세울 수 있다. 이를 두고서 바부어는 토마스의 하나님의 개념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와 성서의 인격적인 아버지는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제일 원인은 성서 신학의 역동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 창조자와 동일시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의 이해에 대한 몇 가지 진술들을 요약해 보자: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있게 만든 창조물들의 저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피조물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자연계의 설계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연계에 계속적으로 활동하시고 자연계를 지배하시고 유지하시는 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은 현상세계를 통해서 모든 존재를 있게 만드는 절대적 존재자에게로 까지 도달할 수 있다. 루터는 토마스와 후기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서 설계된 이러한 신 인식 방법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명명하면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가 주장한 신 인식 방법을 비판하였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루터가 스콜라주의 신 인식방법을 비판하고 내세운 "십자가 신학"의 특징들을 검토할 것이다. 여기에서 스콜라주의 신 인식 방법과 루터의 신 인식 방법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III. 십자가 신학의 주요한 특징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의"하이델베르크 논제"(the Heidelberg Disputation)와 "노예 의지론"(De servo arbitrio), 그리고 그 밖의 루터의 글들을 분석하여야 한다. 루터가 95개 테제를 발표하고 난 후 교회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신을 코너에 몰아넣으려는 세력에 대항해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설명해야 했다. 그 기회는 1518년 4월 26일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어거스틴 수도회 분회에서 왔다. 루터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속한 수도회 관구장의 대리로서 사회를 보게 되어있었으며 그 수도회의 창시자인 어거스틴 신학의 인간타락에 관한 교설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되어있었다. 루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개혁신학을 설명할 수 있는 테제들을 준비하였다. 이 토론을 위해서 루터는 40개의 테제들을 준비했는데, 그 중에서 28개 테제는 신학에, 그리고 12개 테제는 철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테제들은 인간의 죄성,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 의지의 노예, 구원의 문제에서의 인간의 협력 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관한 주장들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의 기본적인 개혁신학의 내용들이다. 이 테제에서 루터는 신 인식에 관한 중세 스콜라주의를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고 이와 반대로 그가 제시한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불렀다. 이 테제들 중에 몇 개는 그의 십자가 신학의 중심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테제 1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만드신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롬 1:20)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That person does not deserve to be called a theologian who looks upon the invisible things of God as though they were clearly perceptible in those things which have actually happened [Rom. 1:20]).
테제 20.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는 것들을 인식하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He deserves to be called a theologian, however, who comprehends the visible and manifest things of God seen through suffering and the cross).
테제 21.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실 그대로 말한다.(A theologian of glory calls evil good and good evil. A theologian of the cross calls the thing what it actually is).
테제 22. 행위들 속에서 인식되는 대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그러한 지혜는 인간을 극히 득의양양하게 하며, 맹목적이며 완고하게 한다.(That wisdom which sees the invisible things of God in works as perceived by man is completely puffed up, blinded, and hardened).
테제 24. 하지만 그러한 지혜는 그 자체가 악이 아니며 율법도 회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는 인간은 가장 선한 것들을 가장 사악한 방법으로 오용한다.(Yet that wisdom is not of itself evil, nor is the law to be evaded; but without the theology of the cross man misuses the best in the worst manner).
이러한 테제들에 대해서 루터는 보충 설명을 한다. 테제19번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신학자들" 그리고 로마서 1장 22절에서 사도에 의해서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들로 불리 우는 사람들의 예에서 분명 하다. 게다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미덕, 신성, 지혜, 정의, 선함, 등등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의 인식은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들거나 지혜롭게 만들지 못한다.
테제20번에 대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등"이나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반대해서, 즉 하나님의 인간적인 본성, 약함, 어리석음에 위치해 있다. 고전 1장 25절에서 사도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약함과 어리석음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식을 행위를 통해서 오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금 고통 속에서 인식되기를 바라시고. . . 하나님을 그의 행위 속에서 명백하게 표명된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가 그의 고통 속에 감추어진 대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 . . 참 신학과 하나님의 인식은 요한 복음 10장[요한 14: 6]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테제 21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을 덧붙인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광의 신학자는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보다는 업적을,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일반적으로 말해 악보다는 선을 더 좋아한다. 이들은 사도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고 부른 사람들이다(빌 3:18).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와 고통을 싫어하고 업적과 공적의 영광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 부르고 한 행위의 악을 선이라 부른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고통과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지자들은 십자가는 선이고 업적은 악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업적이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특히 업적으로 훈도 받는 옛 아담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가치하며 그의 업적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먼저 고통과 악에 의해 자만이 꺾여 지고 파괴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선행에 의해 오만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의 테제들의 주된 내용은 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테제들에서 루터의 주된 관심사는 스콜라 신학의 핵심적인 시스템을 반박하면서 특별히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신학의 오류들을 확연하게 드러내기를 원하였다. 루터는 신 인식에 관한 이들 스콜라신학자들의 주장들을 비판하면서 그의 십자가 신학을 발전 시켰다.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관한 테제들에서 우리가 토론해야 할 내용들을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해서 검토해보기로 하자.
첫째는 하나님에 관한 자연지식(혹은 일반지식)과 특수지식(혹은 고유지식)과의 관계성 문제이다. 로마서 1장 19-20절을 인용하면서 루터는"본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 한다.라는 일반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일반지식"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특수지식"사이를 구분한다. 루터가 말하는 일반지식이란 "하나님은 존재한다. 라는 사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사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등"의 지식을 말한다. 하지만 루터에 의하면 이러한 일반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본질을 인식할 수 있었어야 했는데 대신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환상에 의존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예배하였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우리 자신의 사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려는 모든 시도들을 반대하였다. 요한복음14장8절 9절을 주해하면서 루터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은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루터에게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 세상 사물이나 인간 이성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콜라신학이 저지른 오류는 정확히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일반계시를 통해 특수계시의 내용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루터는 자연이나 역사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인 혹은 피상적인 지식을 얻어내는 것은 가능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는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아낌없이 찬양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로마서 1장 20절을 창조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어낼 수 있다는 성서 증거로서 인용한다. 루터는 또한 하나님은 국가나 왕, 개인들을 통해서 그의 목적들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하면서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루터의 정치 윤리는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일하신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스콜라주의에 대한 루터 비판의 핵심은 이것이다: 스콜라신학의 신 인식 방법, 즉 인간 이성의 사변적인 추론을 통해 자연이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모든 시도들은 쓸데없거나 심지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서 1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구절을 그는 고전 1장 21절 이하와 연결시킨다. 즉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 역사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가면 뒤에 숨어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서 다가갈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가면을 향해서 다가간다. 따라서 자연과 역사 안에 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는 없다. 스콜라신학의 하나님은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고안되고 인간의 이미지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님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이러한 영광의 신학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둘째는 십자가 안에서 감추이시고 계시된 하나님(absconditus Deus, Deus revelatus)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루터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시고 드러내 신다. 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의 위엄(majesty)속에 감추어 계신다. 따라서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조차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더럽혀져있고 왜곡되어 있어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참다운 지식에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지금 비천함, 고통, 실패,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함으로서 알려지시기를 원하신다(위의 테제 20 참조). 따라서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한 유일하고 참된 신뢰할 만한 근원이다. "대 요리 문답"에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주장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성육신 하시고 종의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쓰고 계신 가면이 아니다. 그는 육체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하나님이다. "신의 본성인 그 분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인간이 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나사렛 예수에게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현존이 죄스러운 인간들의 눈에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임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이다(위의 테제 19, 20참고). 하나님은 이러한 역설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루터의 계시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며 언제 활동하시는지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신앙과 모험으로 인도한다. 루터는 지적하기를,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위한 공간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믿어지는 모든 것은 감추어 있어야 한다."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이 십자가의 죽음과 약함 속에 그의 계시를 숨기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신앙은 함께 가야 한다. 하나님에게 가면(veil or mask)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인간과 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중개자로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편에서 볼 때 필수적인 요소이다. 루터는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을 "주제 넘는, 건방지고, 뻔뻔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벗어난 그 다른 곳에서 얻은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우상의 뿌리이다. 라고 외친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안에서 그의 본성과 의지에 대한 계시를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감추어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그 계시를 파악하려는 이성의 모든 시도들을 거부하는 감추어진 계시이다(crucis sapientia nimis hodie est abscondita in mysterio profundo). 실로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십자가 아래 감추어 계신(absconditus Deus)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실 때 "하나님의 가시적인 것들은," 즉, "그의 인간적인 본성, 약점, 어리석음"은 명백하게 된다. 실로 하나님의 권능은 약함 속에서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비천함 속에서 행진하며 하나님의 생명은 그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역설에 있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로웬니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숨어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 스스로를 감추이신다.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겸손 속에서"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그 자체가 감추어계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정확히 하나님에게로 상승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영광의 신학들에 대한 반대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철저하게 하향구조이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신에게로 접근하려는 일체의 모든 시도들을 거부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달려있다.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를 단지 나약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십자가 신학자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영광의 신학자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어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영적인 공격(assault)과 하나님 인식과의 문제다. 루터에 의하면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우리가 십자가에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고통 속에 감추어 계신 하나님을 본다.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치욕스런 패배, 고난, 비참함, 약함, 죽음 등이다. 하나님께서 고통 속에 자신을 감추실 때 하나님의 가시적인 것들, 즉 "인간의 본성, 약점, 어리석음"은 명백하게 된다. 따라서 참 신학자는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통과 십자가에서 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겸손 안에서만 인식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고통 속에 감추어 계신 다면 "하나님의 활동들은 언제나 매력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그 자체가 약함 가운데서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절망과 아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라는 루터의 주장은 그의 신학적인 모티브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본질적인 주장은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알려질 뿐만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알려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통과 시련(안페히퉁)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수단들로 인식된다. 루터에게 이 안페히퉁(Anfechtung)의 문제는 그의 신학을 기초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주제였다. 안페히퉁은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련을 주신다. 이러한 영적인 시련과 공격의 결과로서 신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불안과 근심, 걱정 등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안페히퉁의 궁극적인 자원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이시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시련을 주시고 영적인 고통과 공격을 주시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기 확신과 오만함을 파괴시키시고 그를 전적인 절망과 겸손의 상태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이며 이전에 가졌던 모든 의롭다고 생각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마침내 완전히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는 우리와 우리의 모든 업적을 무로 여기게 만들며 우리가 당하는 삶의 시련과 유혹은 우리를 바로 이 십자가로 인도한다. 따라서 신자는 안페히퉁을 강조하는 그와 같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의도를 인식한다면 그와 같은 시련과 공격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안페히퉁을 통해서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그의 구원을 결과하시고 보증하신다. 루터가 안페히퉁을 "기쁨의 절망"(delicious despair)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분노아래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계시의 은폐성과 안페히퉁 사이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그와 같은 고통들을 가장 값진 보배들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정확히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계시되었지만 그러나 감추어진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외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십자가와 인간의 선행과의 관계성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십자가" 혹은 "고통" 그리고 "행위들"을 뚜렷이 대조시킨다. 우리가 그의 테제들에서 본바와 같이 행위와 십자가에 관련된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미묘한 의미 변화가 있다. 테제 21에서 루터는 "행위들"을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테제 21을 설명하는 말미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 선행을 언급한다.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은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과 유사하다. 루터의 견해에 의하면 중세 교회와 스콜라신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부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였다. 루터는 스콜라주의자들의 신학적인 작업의 대부분을 이성을 통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보았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인간의 선행에 의한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화해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성과 행위의 결합을 루터는 "영광의 신학"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접근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조건적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주석들에서 이 점에 관해서 심도 있게 논의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로움은 신앙을 통해서 일어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을 통한 의로움의 약속은 무조건적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견해에 의하면 십자가는 의로움에 대한 모든 인간의 주장과 하나님의 호의(favor)를 얻기 위한 모든 인간의 노력들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 위에서 루터는 중세 영광의 신학과 자신의 십자가 신학과의 차이를 말하면서 영광의 신학을 비판한다. 영광의 신학에서 인간은 하나님에게로 상승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만 한곳, 즉 영광, 권능, 능력 그리고 종교 등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거침돌이 되고 방해가 된다. 이것이 곧 영광의 신학이 범하는 실수이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자기 의를 선택하도록 하며 이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십자가 신학은 의로움을 향한 인간 노력의 무익함을 폭로하고 자기 구원을 향한 인간 의지 자체가 공허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광의 신학자는 하나님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다 현재 하신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서 십자가의 신학자는 "참 신학과 하나님에 관한 인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임을 안다. 하나님을 세상 어디에서나 찾으려는 것은 "경솔한 사고"(flighty thought)이다. 빌립이(요한 14: 6) "영광의 신학에 따라서" 그리스도께 물었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예수께서는"나를 본 사람이 곧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셨다(요한 14: 6). 여기에서 루터는 빌립이 그리스도 밖에서도 하나님은 알려지고 발견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광의 신학자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라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신학자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계시 안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현존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사야서 강해에서 루터는 말한다.: "참으로 당신은 감추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Vere absconditus tu es Deus).
IV. 십자가 신학의 현대적인 의미들
지금까지 우리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중심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중세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자 그의 개혁운동의 이론적인 무기였다. 루터는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인간 사유 활동의 일체를 포함하여)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거나 또 그러한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순히 고전적인 의미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할 말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라고 외치면서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던 루터의 신학은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항해서 세운 전략이었지만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이후 수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시대에 뒤지거나 그 중요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씨름하고 고민했던 신학적 관심사는 여전히 오늘날 현대 교회와 신학에도 적용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십자가 신학은 언제나 현대적이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복음의 재발견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토론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갖는 의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감추어지고 드러난 하나님(the hidden-revealed God)계시의 의미는 나 자신의 삶 안에 있는 모든 의로움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모든 죄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사건이다. 죄인은 자기 의화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고통 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에 의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칭의 론과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일맥상통한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무죄 방면하시고 의롭게 여기신다. 둘째로 말씀 없는 십자가 신학과 십자가 없는 말씀 신학과의 관계성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 신학과 말씀 신학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극단적인 금욕과 고행, 수련을 통해서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려는 수도원적인 영성 운동은 말씀이 빠져버린 십자가 신학의 왜곡된 모습이다. 그러나 말씀과 십자가의 불가분리성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은 말씀 선포 안에 현재한다. 말씀 없는 십자가 신학은 중세 신비주의 모방 경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선행이나 경건, 금욕, 고행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의 선행의인화(works-righteousness)로 인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 없는 말씀 신학의 위험성도 동시에 간파해야 한다. 십자가 없는 말씀 신학은 현대 세속화된 교회에서 매일의 십자가를 일종의 업적의 의(meritorious righteousness)로 변형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어떠한 시도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십자가와 고통의 수용에 의해서 확증되고 증거 되는 것이라는 점을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희망의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가시적인 것들-약함, 고통, 가난, 비참, 불행, 어리석음-은 드러난다. 실로 하나님은 그의 약함 속에서 그의 가장 강한 힘이 놓여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어 계신 하나님의 강함은 분명한 약함 속에 숨어있으며 그분의 지혜는 분명한 어리석음 속에 놓여있다. 십자가 신학은 지금 여기에서 절망과 약함,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의 신학이다. 절망과 파괴의 한 가운데 하나님은 실로 계신다.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감추어진 현존과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루터의 선언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이 버림받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현존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넷째로 기독교의 보편성은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확보된다. 서구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형성된 포스트 모던니즘은 어떠한 전통적인 진리 체계나 가치들도 더 이상 절대적이며 당연한 것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믿는 기독교 하나님은 보편자이시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라고 계속해서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은 자연이 파괴되고 압제와 고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의 한 복판에 실제로 서 계시는가? 라는 질문과 연결 지어서 대답이 추구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보편성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고난의 현장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삶 한 가운데 함께 하시고 그 고난 속에 감추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주제로 삼아야 할 핵심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인들의 삶과의 관계성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고난을 감내하면서 고난과 박해 하에서도 겸손하게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덜어주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인들 각자로 하여금 자신의 십자가를 보게 한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금욕적이거나 윤리적인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소외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의 생명연대로 부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이점이 바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윤리이며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윤리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김주한: 교회사학. 한신대 신학과와 동 대학원(신학석사)을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 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을 졸업한 후에 보스톤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기장 총회교육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신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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