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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

예림의집 2017. 2. 18. 18:24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


1.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배경

바야흐로 16세기는 종교 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 사이의 대립으로 상호 논쟁이 격렬했던 시대라 할 만하다. 루터주의자들은 교황제도와 더불어 가톨릭 신학의 부패된 신학구조를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루터의 사상이 중세 후기의 사상가들 그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이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힙 입어 밝혀지고 있다. 이 중에서 20세기 초 가톨릭 학자 데니플(H.Denifle)의 연구보고서인 “Luther and Luthertum” (1904-1909)은 매우 탁월하다. 데니플을 포함한 이들은 연구에 의하면, 루터의 신학적 배경이었던 중세 후기의 사상가들이 루터의 인격, 신학적 발전과 입장을 더 잘 이해하는데 새로운 전망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러한 중세 후기 신학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유명론과 신비주의다. 따라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그 배경이 되는 중세 후기 사상인 유명론과 신비주의와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유명론과 십자가 신학

"유명론(Nominalis)"은 ‘우주가 이성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본질들은 독자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아니하며, 단지 이름뿐이거나 한낱 발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실재는 오직 개체들, 즉 개별적인 사물 들 뿐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관점을 갖는 유명론은 ‘보편적 본질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실재론과 반대된다. 유명론 적 사고형태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포르피리우스(232-305)로서 그는 그 기원을 아리스토텔레스에 둔다. 중세에 유명론은 실재론에 대한 강한 반발로 등장하였고, 콩피에뉴의 로스켈리누스(1050경-1125)가 이 이론을 옹호하였다. 아벨라르는 중도적 관점을 찾으려고 시도하던 중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두 관점에 관한 논쟁을 두드러지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오캄의 윌리엄(1280-1349)이 유명론을 되살리고 최초로 솔직한 유명론 체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유명론의 중요한 개념 5가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명론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개체주의’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보편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보편자가 개체에 앞서서 그리고 분리되어(ante rem)존재한다는 것은 실재론의 주장이다. 반면에 유명론의 견해에 의하면, 보편자는 단지 관찰 가능한 특수자로부터 추상화된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로 유명론은 ‘하나님의 전능성’(potentia absoluta)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가 하려고 하지 않는, 결코 하지 않았던, 결코 하지 않을 많은 것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절대적인 힘은 하나님의 제정하신 질서를 고려치 않고 절대적으로 고려되어진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셋째로 유명론의 특징은 주지주의(Voluntarism)이다. ‘의지가 우선이냐 이성이 우선이냐’하는 논쟁은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 도미니크 학파와 프란시스코 학파,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를 거쳐오면서 격렬하게 논쟁되어 온 문제이다. 주지주의는 이성에 대한 의지의 우선을 내세운다.

넷째로 유명론의 특징은 회의주의(skeptism)이다. 자명하고 분석적으로 알려질 수 있고, 감각 경험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명제들에만 진리라고 함으로써 철저히 경험적 진리 관을 내세웠다.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은 외적 실체일 뿐이지 결코 형이상학적 진리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그들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유명론의 특징은 신앙주의(fideism)이다. 인간탐구의 적절한 영역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거부는 이성과 신앙의 분리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진리의 발견이나 이해에 있어서 이성은 불필요하며 교회의 권위에 대한 신뢰 즉 신앙만이 요구된다는 입장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유명론과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의 관계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는 관계가 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관계가 없다는 설이다. 먼저 그 관계성을 부인하는 계열의 학자인 리터(Gerhard Ritter)는 세 가지 점에서 루터가 유명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첫째로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과 구원관계 설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유명론의 주지 주의적 경향은 오캄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루터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義’ 사상과 하나님의 반이성적이며 변칙적인(arbitrary) 인간구원과는 상반된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매일 행한 후기 스콜라주의 관행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단정짓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리터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혀 지난날의 신조나 교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신비만을 붙잡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한편 긍정적 평가를 내린 사람 중에 발터 폰 뢰베니히(Walter von Loewenich) 교수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루터는 오캄 학파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오캄주의의 근거 위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루터와 오캄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적한다. 오캄주의 체계에 있어서 신앙과 이성의 분리 즉 정확한 분리의 주장을 그의 신학에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챨스 앤더슨(Charles. S. Anderson)은 오캄이 성서에 의존하여, 토마스 신학이 신학적 탐구에서 이성을 신뢰한 것을 공격하였다는 점, 에르푸르트 대학의 루터의 선생들은 오캄주의자들이었고, 루터도 초기에는 오캄을 존경하는 스승으로 불렀다는 점을 들어 유명론과 루터의 관계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두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답하고 있는가? 루터가 스콜라주의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루터는 유명론과 같은 입장을 취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스코투스, 비엘, 오캄 등을 모두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인간의 의지를 통해 인간구원에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을 마니교의 교리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 이단시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는 선을 행할 수도 덕을 쌓을 수도 없다고 함으로써, 유명론의 근간을 이루는 의지를 무참히 짓밟는다(12-26항). 또한 55항-81항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용납하신다는 오캄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결국 루터의 삶의 배경으로서 유명론의 영향은 있었던 것이지만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중심 뼈대들은 유명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 연구 즉, 시편과 로마서 연구를 통한 이신칭의를 깨닫기 시작한 이후에 형성된 신학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명론은 가톨릭의 형이상학적 보편적 체계를 해체시키는 공헌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원천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2) 신비주의와 십자가 신학

한편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중요한 개념 혹은 용어들이 신비주의자들의 그것들과 유사하여, 십자가 신학의 뿌리를 신비주의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신비주의"(Mysticism)의 본질은 궁극적 존재와 갖는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특히 기독교적, 성경적 신비주의는 힌두교의 비인격적 접근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체를 강조한다.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말하는 합일은 인격을 말살하는 융합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관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사랑 및 의지가 하나님과 갖는 합일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명상적이고 인격적이며 실천적이었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대개 종교가 지나치게 틀에 박힌 시대에 발생한다.

이러한 신비주의 가운데 루터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중세의 신비주의의 대표적 유형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관계되는 일면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따라서 중세 신비주의의 여러 유형 중에서 타울러 그리고 새로운 경건을 선택하여 그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타울러(Tauler)

타울러의 신비주의는 14, 15세기를 지배하였으며, 모든 사람의 영적 건강을 위해 굉장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타울러는 영성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서 높은 인격을 요하는 실천적인 기독교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설교들이 이를 입증하는데, 그는 성경인용도 거의 하지 않고 개인의 간증도 전혀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조심스럽게 해명하였다.

타울러의 신비주의를 한 마디로, “영혼 속에서의 하나님의 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 이르는 네 단계를 말하였는데, 첫째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대한 명상이며, 둘째 단계는 산고(birth pain)로서의 시험이며, 셋째 단계는 영혼 안에 하나님이 태어나시도록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며, 넷째는 인간의 모든 개성이 파괴되며 영혼 속에 하나님이 태어나시는 단계이다. 인간은 이러한 네 단계들을 통하여 “신성화된 인간”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루터는 타울러의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루터는, 타울러가 내세우는 비밀스런 말씀(Secret Word) 즉 영혼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 거룩한 속삭임으로 말해지는, 우리 안에 창조되지 않은 말씀(the uncreated Word)을 듣는 것은 위험하다고 간주한다. 이는 우리 인간은 정화된 말씀도 충분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절한 신앙은 화육한 말씀만을 필요로 한다. 적절한 신학은 신비주의 신학과 반대에 위치한다. 타울러에 있어서 고난과 시험은 우리의 영적인 되어감의 과정의 표시이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의 표시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시험과 고난은 신비적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험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이 활동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정반대인 것이다.


2)새로운 경건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이라는 새 운동은 제도화된 교회의 죽은 경건에 반대해서 살아있는 경건(living piety)을 내세우는 운동이다. 이 새로운 경건은 흔히들 수도원전 경건이라 부르는데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Campis)에 의해 대표된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은 겸손이다. 겸손은 지식보다 더 낫다. 예수 자신은 겸손의 모델이다. 우리는 예수의 길을 가야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과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축복을 경험할 때는 자신을 하나님을 명상하는데 까지 끌어올릴 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요점이다. 그러나 소위 수도원적 경건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말하는 경건 혹은 고난, 시련, 십자가 등의 개념과는 다르다. 지금까지 신비주의의 여러 유형을 살펴보았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중세후기의 신비주의 사이에는 사상적 접촉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신학과 신비주의는 실례 적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데에서 외적으로 일치했다. 십자가, 겸손, 시련 등은 루터가 그의 신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루터가 사용할 때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십자가 신학과 정반대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비주의가 말할 때에는 궁극적으로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닌 철학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비주의의 구원론 혹은 수도원의 이상인 겸손 등은 십자가 신학의 그것과는 다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계시의 신학이며 계시를 믿는 믿음의 신학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광의 신학이다. 궁극적인 차이는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내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비주의는 계시에 의해 말하기보다는 추론과 경험에 의해 말하므로, 계시에 근거해서 말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는 다르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보다는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세우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십자가 신학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진리들을 루터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