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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대문자 사본

예림의집 2017. 3. 2. 11:10

글-대문자 사본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헬라어는 소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문자만을 사용하여 가로로(오른편으로) 글을 써 나갔으며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의 글은 마치 문자를 길게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초기 한글 성경도 이런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다른 글의 형태는 9세기경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사본은 모두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대문자 사본이다.

양피지나 우피지에 필사된 신약성경 사본들은 파피루스 사본에 비해 그 양이 많고 거의 완전한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서기 331년 콘스탄틴 황제가 개종하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면서부터 교회는 박해시대보다 질이 좋은 신약성경의 사본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고 때맞추어 발명된 질 좋은 양피지/우피지가 이에 사용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개종 기념으로 성서 50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는데, 그 중 둘 혹은 셋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양피지/우피지에 헬라어 대문자로 필사된 신약성경 사본들을 "대문자 사본(Uncial Manuscript 혹은 Majuscule Manuscript)로 분류하며-파피루스 사본은 별도로 분류된다- 두 종류의 기호를 사용한다. 기호가 두 종류인 것은 사본학/원문비평학이 발달하는 과저으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신학자들은 처음에 대문자 사본을 하나 발견할 때마다 영어 철자의 순서를 따라 A, B, C, ......Z 등으로 기호를 붙엿다. 발견되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스물 넷을 넘자 학자들은 헬라어 철자 중 영어 철자와 중복되지 않는 것으로 계속 사용했고 1844년 독일 신학자 티센도르프에 의해 시내산 기슭의 St. Catherine 수도원에서 "시내사본(Codex Cinaiticus)"을 발견하자 그 우수성에 감격하여 특별히 a이라는 기호를 붙였다.

후에 사본학/원문비평학이 보다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1908년 그레고리는 대문자 사본의 기호를 01, 02, 03,...0301로 조성하였다. 즉 시내사본은 알렙 혹은 01로 표시되고,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A혹은 02, 바타칸 사본은 B 혹은 03으로 표시된다. 후에 발견된 대문자 사본에는 숫자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기호만 붙어 있다.

양피지/우피지에 필사된 신약성경의 대문자 사본은 NA27에 201개가 등록되어 있는데 이 중 위에 언급한 세 사본이-대문자 사본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본 중에서- 사본학/원문비평학상 가장 귀중한 사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01과 02는 대영박물관의 사본전시실에, 03은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시내산 사본에 대해서는 D.C. Parker, Codex Sinaiticus: The story of the World's, London/Peabody: The British Library/Hendrickson, 2010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