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낮선 일(opus alienum)을 통하여 본래의 일(opus proprium)을 이루신다.
루터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히브리서 강의(1517-18)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히 2장 8절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하나님의 인도방식을 다시 꺼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으신다. 또한 그를 높이시기 위하여 낮추신다.” 그는 그리스도 역시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낮아짐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말했을 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인도방식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고 본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십자가를 지고 따름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히 2잘 24절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악마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비밀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의 독특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성도를 낮선 일(opus alienum)을 통하여 본래 하고 싶은 고유한 일(opus proprium)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신다. 마귀를 통하여 생명의 원수 죽음을 없애신다. 그리고 본래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도 사는 날 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시험당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기억하고 그에게 스스로 성례와 본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짐을 통하여 시험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이시고, 높이시기 위하여 낮추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예수님의 생애, 노 크로스 노 크라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대속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신자의 십자가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십자가 신학을 정립하라. 사고를 자극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을 읽으라. 공부하면서 십자가 안지는 사람은 거짓말 장이이다. 조금 더 씹어 먹을 수 있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책을 읽으라. 십자가 신학은 고달프게 사는 인생을 가르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안주하지 말고, 방학 때를 나를 위하여 사용하라. 영어 성경도 읽어야 한다.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등. 스스로 속이지 말고, 십자가를 지라.
Deus absconditus
숨어계신, 숨겨진 하나님(hidden God). 하나님께서는 항상 십자가 안에 자신을 숨겨서 계시하신다. 십자가를 가면으로 사용하신다.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아퀴나스: 우주 만물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류이다. 루터는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추론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려면 십자가로 가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뺀 것은 자신의 경험일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이야기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Sub contraria speciae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코드를 맞추어 일치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거슬려 응답할 수 있다. 때로는 원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때로는 이성과 맞지 않게 역사하신다(사 55:).
Opus aliemum(낮선 의) -> Opus proprium(본래 의)
오히려 사탄을 허용하심을 통해서 신자들의 하나님을 은혜를 깨닫고 생명을 주신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 사탄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지혜.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을 자기 식으로 배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이 아니시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이성과 합치시키려고 하면 끝없이 고통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신자를 구원하는 방식을 그는 십자가 신학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이 사실을 우선 히 12장 1절에서 6절의 해석에서 설명한다. 그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징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주장한다. 그리고 징계가 당시에는 쓰라리게 보이나 이를 통하여 연단될 때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본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그는 히 12장 11절의 난외 주해에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란 말로 대체한다. 앞에 언급했던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고난에 관계된 구절들을 모자이크하여 십자가 신학의 틀을 형성하였다.
“성경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개념들이 병행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심판과 의, 진노와 은총, 사망과 생명, 악과 선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대저 여호와께서 … 일어나시며 …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사 28:21)’의 구절에서 언급된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4편 1절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에서 표현된 것처럼,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양심을 기쁘시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 구절은 ‘당신은 나를 중시하셨으며 향상시키셨습니다.’의 뜻이다. 이런 것은 은총이 주어졌을 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로마서 5장 4절에는 ‘연단은 소망을 이루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이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 신학을 발견한다. 또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장 18절과 23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다.’라고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게 하신 후 환난을 보내시어 그를 훈련시키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를 다루시는 지혜이다. 루터는 이런 지혜를 십자가의 지혜 혹은 십자가의 신학이라 부른다. 모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십자가라는 정반대, 낮선 일을 통해서 구원하신다. 히 12:1-9 징계,
영광의 신학(thologia gloyriae)
천주교에서 영광을 강조.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시는 것. 사람들을 전도할 때 부정적인 것보다 좋은 것을 설명해야 된다고 주장함. 루터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찾아오셨다. 영광의 신학자들은 결과적으로 저주받은 자들이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킨다.
우리는 십자가 신학을 말한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우리의 삶 속에 병이 안 고칠 수도 있고 부자가 안 될 수도 있다. 십자가 신학은 전천후 신학이고, 영광의 신학은 편 가르기 신학이다. 우리의 영광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 신학만이 진정으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축복할 수 있다. 곤란을 주셔서 곤란 중에 축복을 주시는 귀가 막힌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능력이 된다. 성경 전체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데 아무런 고난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역경과 고난과 멸시를 당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주어야 한다. 진리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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