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성경 (the Scripture)과 변증학(Apologetics)

예림의집 2016. 12. 29. 11:31

성경 (the Scripture)과 변증학(Apologetics)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

기독교 변증은 단순히 주어진 사실들(facts)을 통한 중립적 논쟁이 아니다. 모든 사실들(facts)이 하나님에 의해 해석된 것이 기 때문에 자연만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며 기독교 변증을 위해 도입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존재하는 사실들이 중립적인 것으로 믿고 해석하며 이해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중립성을 깨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특이하게도 반틸은 일반 계시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 목적에 있어서 필수적(necessary)이고 권위(authority)가 있고 충분하며(sufficient) 명백하다고(perspicuous) 주장한다. 사실 일반 계시로 인해 믿지 않는 자도 하나님을 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롬 1: 21).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 사실을 누르고(suppress) 부인한다. 이런 일반 계시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든 창조된 실재(reality)는 내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틸은 말하기를 “성경 이 계속 말씀하는 것처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온 우주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론 반틸은 일반 계시를 특별 계시와 동등한 가치를 두면서 특별계시의 필요성., 권위, 충분성, 명백성을 일반 계시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계시의 역할과 의미와 목적 에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틸은 다음과 설명한다.

 

만일 인간이 에덴동산에서조차 자연에 나타난 일을 바로 깨달아 알기 위해서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초자연적 계시를 꼭 필요로 했다면 인간이 타락한 지금에 있어서 초자연적 계시의 필수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초자연적 계시의 내용은 만일 인간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서로 다른 목적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욱이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할 수 없다. 반틸은 계속 설명하기를, “따라서 죄인을 향해 주어진 하나님의 정확무오하게 영감 된 계시인 성경은 우리들 앞에 주어진 빛으로서 우리는 그 빛 안에서 세상의 모든 사실들을 해석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그것이 자연적으로나 구속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세상만사를 포함하는 한 계획안에 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반틸은 이렇게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고 한편 특별 계시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성은 우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계시에 대한 이러한 반틸의 견해는 특별 계시인 성경이 일반계시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님 을 말하고 있다. 타락으로 인한 구속의 필요성에 따라 특별 계시가 주어진 것이며, 일반 계시나 특별 계시 둘 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차원에서 볼 때 동등하게 권위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반틸은 말하기를 “어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적 사실이어야 한다. 따라서 죄인이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것 보다 더 쉬운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일반 계시 역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특별 계시의 필요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일반 계시에 문제가 있어서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계시 역시 하나님이 계시라고 한다면 특별계시의 도움을 통하여 일반 계시가 주는 유익과 효력 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프레임은 일반 계시와의 관계에서 특별 계시가 주어진 목적 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 일반 계시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둘째, 타락 후 일반 계시에 대한 죄 된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셋째, 일반 계시를 통해서 이룰 수 없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듯이 일반계시는 특별계시 없이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 특별계시로 일반계시가 치유 된다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보완적이다. 서로 대치되고 한 쪽으로 인해 다른 쪽이 무시되고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개혁주의 안에서도 일반 계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신학(the natural theology)의 위험성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신학은 특별 계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지 특별 계시를 인정할 경우 일반 계시는 일반 계시의 원래적 역할과 목적을 회복할 수 있다. 자연이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경험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신성과 솜씨와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계시나 특별 계시는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권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 역시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흔히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은 능력, 영광, 혹은 지혜 정도로 한정하지만 칼빈은 이러한 속성 외에 하나님의 공의, 선(goodness), 의(righteousness) 등도 자연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누구라도 일반 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킬빈은 특별계시와 일반 계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참으로 우리를 위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신뢰하도록 초청하는 그의 피조물에 흔적으로 나타난 그 지식과 정확하게 같은 목적 을 가지도록 되어 있다.” 물론 여기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가 정확하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원래적 목적을 의미한다. 일반 계시도 하나님을 경외하여 신뢰하도록 하는 목적을 지녔지만 타락으로 인해 그 목적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만약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면 우리가 논한 모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Cognitio Dei Creatoris)은 소용없게 된다.” 이렇듯이 반틸은 칼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개혁주의의 핵심적 모토 중에 하나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지만 그렇다고 일반 계시를 무시하는 차원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불신자들을 향하여 기독교를 변증할 때는 일반 계시의 중요성이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반틸은 타락으로 인한 일반 계시의 무력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일반 계시는 사람이 항상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것처럼 분명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자신의 눈을 빼었기에 일반 계시에 나타나는 하나님 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구속의 은혜가 필요 없었다는 것 이다. 반틸은 성경관을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연결시킨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계시에 있어서 주권적이 아니면 어떠한 것에도 주권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주권적 하나님은 또한 지식의 영역에도 주권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별 계시인 성경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으며 우리 신앙과 삶의 궁극적 규범이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생명과도 같은 가르침이다. 뿐만 아니라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우주와 인간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출발점(starting point)과 준거점(reference point)으로 삼아야 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바로 알 수 없고 어떤 것도 가능하지도 않으며 어떤 것도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네 가지 특성, 즉, 권위(authority), 필요성(necessity), 명백성(perspicuity)과 충분성(sufficiency)을 강조하였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바로 성령의 영감(inspiration)에 근거한다. 성경은 그 자체에 궁극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궁극적 권위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의 말씀인 성경도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교회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모든 자에게 전해져야 하며 성경 자체 진리성에 관한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천주교는 마치 성경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개혁주의에서는 교회가 성경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성경을 필요로 하는 대상은 교회만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요 또한 온 우주이다.

성경의 명료성 혹은 명백성이란 성경과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것 사이에 인간 해석자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로마 천주교에 의하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 교회의 무오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교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면 교회를 구성한 인간의 권위가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해석도 인간의 손에 달려 있게 된다. 끝으로 성경은 성경 자체로 충분하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개혁주의 모토는 성경의 충분성을 대변한다. 성경의 충분성은 또한 이 말은 성경 자체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충분성은 앞서 논한 일반 계시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일반 계시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특별 계시가 성경 외에 또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시와

인간과 지연과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해석할 수 있는 계시는 오직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와 권위로서의 성 경(the Scriptures as the Ultima te Truth and Authority)

하나님을 전제해야 인간의 모든 경험과 지식 그리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정신적 질서가 가능하고 또 이치에 맞다고 하면 그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 하나님이 이슬람교의 알라 일수도 있고 힌두교의 브라만일 수도 있고 불교의 부처일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뒷부분에서 여러 종교들을 다룰 때 그들의 모순, 자가당착, 비합리성을 지적하겠지만 우리는 단지 어떤 유신론(theism)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유신론은 대부분의 종교들이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 유신론이 아니라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 이다. 이 기독교 유신론의 근거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일반계시 역시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별계시는 성경뿐이다. 참된 하나님은 오직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뿐이다.

그렇다면 코란이나 불경이나 바가바기타가 아니라 왜 성경만이 참된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러한 논의가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이나 논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 이성, 경험, 논리가 맞다는 것을 누가 혹은 무엇이 보장하는가? 결국 자신의 이성, 경험 혹은 논리가 맞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절대적 기준이나 된 것처럼 성경의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러한 판단이 옳은 것인지 확인할 길이 자신의 일방적 신념 외에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성경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식 세계관, 이슬람식 세계관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들을 다룸에 있어서 자기 논리나 경험을 근거로 자기가 맞다는 식으로 직접적인 대응을 할 수는 없다.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방법은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 입장에 서 보도록 하고 또한 타 종교들의 세계관에 들어가서 모순과 문제점들을 들추어내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뒷장에서 다루도록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맹신적이고 독단적인 주장이 아니다. 모두들 자기의 세계관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상황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 기독교 세계관의 진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타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모든 것을 바르게 해석 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라는 사실을

양보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양보는 다른 세계관에게 양보하는 것이고 자율적 인간의 판단에 양보하는 것이지 진리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양보해서는 아니 된다. 절대적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실(fact)은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사실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실들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실들을 바르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실들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처럼 다 알 수는 없고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알 수는 없지만 주어진 사실들을 바르게 알 수 있다. 그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서의 경전이 아니다. 또한 설교를 위한 참고서로만 볼 수도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들을 바르게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물론 성경은 구체적인 물리 공식이나 화학 원리나 경제 원리 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그런 목적을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다. 앞서 언급 했듯이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경험들을 의미 있게 하는 보편적 원리를 제공한다. 성경은 사과나무의 열매 맺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사과나무가 창조된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즉 사과나무 자체가 이미 해석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나무는 우연(chance) 위에 놓여 아무나 그 나무의 존재의 시작을 정하고 처음으로 그 나무의 의미나 가치나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그 동안 아무도 해석을 달지 않아 누구든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이 그 나무의 창조자가 되고 최초의 해석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면 자기가 스스로 나서 창조주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 그 나무의 궁극적 창조자나 해석자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편 불신자들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을 창조자로 또한 해석을 부여한 존재로 내세우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신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궁극적 해석자라고 할 것인가? 이것 역시 자신의 일방적인 해석 아닌가? 혹 누구도 해석을 달지 말자고 할 것인가? 사실 이렇게 요구하는 것도 나름대로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나무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해석 되어진 것이며 이 사실을 그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만큼 합리적인 주장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종교는 거의 없다. 있더라도 그들의 세계관은 일관적이지 않다. 기독교 성경의 위치는 단순히 인간의 이성적 혹은 경험적 판단에 의해 진위가 결정되는 그러한 종교적 경전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이다. 궁극적 기준이다.

성경은 모든 사실을 존재하도록 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고, 모든 사실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사실을 아는 유일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주어진 사실들(facts)을 중립적으로 보고 해석하고 그 사실들의 진실성을 이성으로 혹은 경험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들을 의미있게 하고 기능하게 하는 보편적 원리를 성경은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성은 하나님의 진리성과 함께 간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의 계시는 그 완정성과 절대성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완전성과 절대성은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전제해야 모든 것 이 가능하고 이치에 맞다고 하는 것은 절대성(the absolute)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자연의 일률성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주전자에 끓인 보리차를 유리컵에 따라 마시는데 하루는 보리차이고, 하루는 주스가 되고, 하루는 소금물이 되고, 하루는 입을 대는 순간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한 이렇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자연의 일률성(the uniformity of nature) 때문이다. 이 일률성은 내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고 내가 유리컵에 따라서 생기는 것 이 아니라 일률성이 있기 때문에 예측대로 보리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혹 많은 사람들은 내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였기 때문에 당연히 유리컵에 따른 물은 보리차이며 내가 마시는 것은 보리차가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당연성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러한 당연성은 우연히 주어질 수가 없다. 당연성은 일률적이고 일관적인 정규성(regulari ty)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우연(chance)이 이러한 정규성을 창출할 수가 있는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진화론은 최초 입자들이 우연히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 입자들이 진화가 되어 무생물도 되고 미생물도 되고 생물도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는 어떤 일률성이 있었어야 한다. 일률성이 없으면 물리적 화학적 반응이나 과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률성을 입자들이 혹은 무생물들이 혹은 미생물들이 혹은 생물들이 혹은 인간들이 만들어 가면서 진화가 되었겠는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먼저 일률성이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일률성은 어디서 와서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률성을 원래부터 있는 것으로 믿고 싶어 한다. 사실‘원래부터’라는 개념은 오히려 우연에 속한 개념 이다. 그러나 우연은 일률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만약 주사위 두 개를 100 번 던져서 두 개 주사위 합이 매 번 정규적으로 12가 나온다면 이것을 우연이라 하거나 원래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끓인 보리차는 유리컵에 100번 따라도 100번 같은 결과이다. 이러한 일률성은 우연히 발생될 수가 없다. 일률성은 너무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원래부터 있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일률성은 절대성을 요구하는 보편적 원리이다. 이것은 절대적 위격(person)이신 창조주로 인하여 부여된 것이다. 일률성은 주전자, 보리, 수증기, 유리컵, 물, 나의 행동, 낭의 의지, 나의 경험, 나의 이성 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사물, 도구, 실험, 과정, 인간의 경험, 인간의 사고 등의 것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며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다. 또한 진리이신 하나님도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가능하게 되고 작동 되었다면 이미 하나님이 존재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성을 바로 그의 계시인 성경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후13:8에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말씀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진리를 위하는 것뿐이다. 진리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다원주의적, 상대주의적 발상으로 “A에게는 진리이지만 B에게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곤 한다. 사실 이 문장에서 정의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A와 B에게도 진리이어야 한다. 즉 진리란 ‘~에게’라는 단서가 붙지 않는다. 진리는 누구와 상관없이 진리이어야 한다. A에게는 진리라는 식으로 A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고 B에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식으로 B가 진리의 반증적 기준이 될 수 없다. A 혹은 B가 진리의 기준 혹은 준거점(reference-point)이 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A나 B의 개입 이전에 이미 존재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진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가타부타 논할 수 있는 것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어떤 자명한 이치(axiom), 공식, 명제(preposition), 혹은 부정할 수 없는 지식 등으로 한정한다. 또한 인간의 논리나 이해에 부합되고 과학적 증명을 통과한 것을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 한정된 사실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사실인 것은 궁극적 진리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또한 이치, 공식, 명제도 초월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지식, 경험, 이치, 공식, 명제로 정의할 수 없다고 진리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논리, 경험, 공식, 명제에 따라 사실로 주어졌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체계가 더 궁극적인 체계이다 이치, 공식, 명제보다 더 궁극적인 것은 인격성(personhood)을 지닌 진리이다. 바로 그 궁극적인 진리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가 그 진리이다(요 14:6).”라고 하실 때 그 진리는 명제나 이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이 진리의 기준이요 권위요 내용이요 결과요 본질이다. 예수님이 배우고 따라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예수님에게서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진리에 속한 사실들이나 원리나 명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지각(perception)을 토대로 진리를 논할 수 있고 이성(reason)을 토대로 진리를 논할 수 있고 직감(intuition)을 통하여 논할 수 있고 오감(五感)의 경험을 통하여 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진리에 속한 제한 된 사실들을 찾는다고 해서 그 찾음으로 진리가 정해진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찾거나 말거나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위의 여러 방법들의 시도가 처음부터 가능하게 된 것이 진리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제한적 이고 후차적인 인간의 방법들과 정의(definition)로 진리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사실 인식론적 앎(knowing)에도 윤리적 당위(ought)가 들어있다 잘못된 지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은 맞는 지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지식이라고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맞는 지식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 인가? 이 확신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다른 것이다. 자기가 가진 지식의 옳음에 대한 당위는 지식 외의 것에 근거해야 한다. 그 근거의 필연성이 그 지식보다 더 궁극적인 진리이다. “맞아야 한다.”는 당위(ought)는 절대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위는 인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설령 힌두교 신도나 불교 신도가 자신은 환상 혹은 망상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것 이 환상 혹은 망상이 되기 위해서는 환상으로 혹은 망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지속되어야 한다는 당위(ought)는 환상 혹은 망상이 될 수 없다. 즉 어떤 절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절대성은 진리의 속성인 것이다.

진리란 사람이 자기 판단 기준이나 경험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과 경험조차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진리는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관점, 지각, 이성, 직감, 경험 등으로 한 사실을 이해하고 판단했을 때 그 이해와 판단을 가능하게 하며 이치에 맞게 해 주는 전제적 조건과 같다 예를 들어,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명제를 내놓았을 때 이 명제가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윤리적 당위만 아니라 그 명제를 가능하도록 하는 어떤 인식론적 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만약 그 명제의 단어 하나, 하나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고 단어들이 서로 연결 이 되지 않고, 논리적 흐름도 불가능하고, 주장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실체이고 듣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실체라고 하면 그 명제의 존재 자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즉 불가능한 명제이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라는 명제 자체의 진위는 사실 이차적 문제이다 사람마다 관점이 있고 견해가 있고 지각이 있고 이성이 있고 경험이 있고 논리가 있는 것인데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내려지든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일차적 문제는 그 명제가 주어진 것이 처음부터 가능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가능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근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는 그 명제보다 더 궁극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진리는 없다.”라고 히는 명제가 타당한 것이라면 이 명제는 스스로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 진리임을 증거하고 진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진리 외의 것이 진리로 인정해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우리가 변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 자체가 하는 것이다.

왜냐면 진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 여전히 생각하기를 어떻게 진리 자체가 진리를 변증할 수 있는가? 진리는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증명하고 지키는 것 아니겠는가? 진리의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믿지 않겠는가? 진리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주어져야 이해를 도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등의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질문들은 타당한 질문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진리가 어떤 인격체가 되어서 말을 하고 스스로 변증하고 확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나 우리의 존재를 비롯해서 모든 경험들과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가 직접 나서서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어 인간의 모든 작업이 가능하기에 진리임이 증거된다는 것이다. 진리가 없다면 반대로 그 모든 작업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진리가 스스로 반증되고 확정된다. 더욱이 비록 진리를 부정한다고 해도 진리가 있기 때문에 그 부정의 작업도 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위하는 것이요,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요, 진리를 의존해서 사는 것뿐이다. 불신자가 진리를 거슬러 악한 삶을 살아도 자기 정체성이나 악이라는 것도 진리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그도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진리가 주어진 범위 내에 우리는 그 진리의 도구로서 논리나 이성이나 경험을 얼마든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가 있다. 사실 진리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믿고 논리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확정하려고 한다고 하면 그 진리는 논리나 이성이나 경험에 의존한 진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논리나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 취소되거나 변경이 될 수 있고, 또 추상적인 개념에만 존재하는 형식적 진리일 수도 있고, 혹은 전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진리를 확정함에 있어 서로 다른 논리의 철학이나 이성 혹은 경험의 가치나 기준을 정할 또 다른 철학 혹은 기준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추론되고 확정되는 진리는 상대적이며 잠정적(contingent) 이며 형식적 진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추론과 확정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진리는 추상적 개념 내지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계시의 말씀으로 인해 매우 구체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진리이다.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하나님이 진리이며 그의 계시가 진리이다. 진리의 절대성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기능하다는 것이다. 진리를 절대화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궁극적(ultimate)인 것 이 될 것이고 하나님도 그것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궁극적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며 그의 계시 자체가 진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과 구별하기 힘들다. 그의 권위와 능력과 가치와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그의 계시이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의 역사와 경험들을 기록한 책이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과 속성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시간과 공간 안에서 기록된 다른 책들과 같은 차원에 놓아서는 아니 된다 성경은 또한 단순히 어떤 이치(axiom)나 원리(principle)가 아니다. 물론 성경에서 사실적인 이치나 원리를 추론할 수는 있지만 성경 자체가 이치나 원리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왜나면 살아계신 위격(Person)이신 하나님의 뜻과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 지식과 경험의 대상이기도 하다. 즉 먼저 우리의 지적 능력, 감성적 만족, 또한 의지적 접근을 통해 성경을 읽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 수도 없고 세상을 바로 알 수도 없고 또한 성경 없이는 죄로 물든 이성, 지성, 감성, 의지가 바르게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최고 기준이요 출발점이 된다.

고전적 변증학(Classical apologetic)을 지향하는 리고니어(Ligonier) 학파 변증학자들(R. C. Sproul, John Gerstne r, Arthur Lindsley)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근거는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반틸의 주장을 반박한다. 어떻게 지성 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일단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이 먼저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적 행위 이전에는 하나님은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반틸은 지성의 우선성(priority)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프레임(John Frame)은 이성 혹은 지성의 의미는 여러 가지일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논리가 될 수도 있고, 심리적 판단일 수도 있고, 판단 자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갖고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은 “이성은 어떤 진리의 기준을 인지하여야 하는가(What criteria of truth ought our reason to acknowledge?)?”라고 프레임은 말한다. 리고니어 학자들은 마치 이성은 반모순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과 같은 논리의 자체적 합리성을 의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반모순의 법칙으로는 추상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결과를 위해서는 또 다른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법칙은 종교적, 철학적 의미가 들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다른 법칙 에 관해서 논할 때 지성의 우선성이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지식을 추구함에 관련되지만 이성은 반드시 어떤 기준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그 선택은 종교적인 것이다 프레임은 강조하길, 라고니어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반틸은 이성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전제적 선택 없이는 기독교나 그 외의 어떠한 것도 논증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성은 어떤 진리에 대한 기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기준은 종교적 신념(religious commitment)에 달려있는 것이다. 프레임은 말하기를 그 기준은 기독교적 아니면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반모순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이 아니겠냐고 리고니어 학파를 비꼬듯 말한다.

리고니어 학파는 마치 반틸은 이성의 활용까지도 무시하고 단지 맹신적으로 성경을 숭상하는 성경주의(biblicism)을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이성적 동물인데 어떤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해도 이성의 활용이 앞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이성의 활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며 어떻게 이치에 맞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이 성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성의 자율성(autonomy)를 주장하는 것과 같으며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모순의 법칙이라는 논리 법칙도 하나님의 속성 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그 법칙에 의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경에 우선성을 두지 않고 지성에 우선성을 두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반틸은 그의 저서.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서론)을 이렇게 시작한다. “정통(orthodox)신학의 가장근본적인 것은 이미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하고 성경에 기록된 그의 무오한(inerrant) 계시를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스스로 존재하심을 신학적 용어로 자존성(自存性, aseity)이라고 한다. 그 뜻은 하나님은 그 자신 외에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 원천이시라는 것이다. 사실 그 원천이라는 용어도 하나님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스스로 충족되시고 자함적(自含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함적이시고 자존적인 속성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는 구별되지 않고 동일시된다는 의미도 있다. 성품과 존재가 다 완전하시기 때문에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궁극적인 선(the good)은 하나님 자신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선을 자신 외에 다른 그 무엇에서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선의 절대적 개념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떠나 그런 절대적 개념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

그래도 불신자들은 그런 자함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을수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 계시가 사실인지는 어떻게 아는가를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 하시니 사실인지를 안다고 답해야 한다. 그러면 그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밝혀 주는 증거는 무엇인가를 되물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궁극적 증거라고 답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질문과 답이 계속 돌고 돈다. 이러한 논리를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라고 한다. 이러한 순환논리 혹은 순환적 논법은 일반적으로 불합리하다고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최종적 답이 된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그들과 중립적 입장에서 입증될 만한 사실(facts)이나 증거를 제시하며 설득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프레임은 인간의 논법은 다 순환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처해 있는 제한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떤 한 사실(fact)을 알기 위해서는 그 앎을 위한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기준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에 그 기준이 궁극적이지 않다면 그 기준을 알기 위한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결국 끝없는 연속으로 나아가게 된다. 끝없는 연속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딘가 그 연속을 인위적으로 끊어야 한다. 그 대신 끝과 끝을 이어 순환적 고리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 이성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는 불신자가 한 사실(fact)을 이성으로 안다고 했을 때 그 이성의 진실성을 어떻게 아느냐 물을 수 있다 이 때 불신자는 끝없이 기준들을 댈 수도 없다. 결국 그 이성의 진실성을 이성으로 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성으로 그 진실성을 알 수 없다고 하면 이성이 궁극적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결국 불신자도 순환적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프레임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사고는 다 순환적일 수밖에 없다.

반틸은 ‘우리는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안다. 왜냐면 유일하게 성경은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왜냐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순환적임을 인정한다. 반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전혀 추론하지 않는 것보다 순환적으로 추론하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순환적 논법이야 말로 제한적 인간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논법임을 확신한다. (중략) 만약 우리가 살피려는 어떤 것보다 우리 자신이 더 크지(larger) 않다면 일반적으로 그것을 살필 때 여러 측면에서 보려 하며, 또한 그것에 관해 더 알기 위해선 계속 돌며(go round and round)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 보다 크지 않으면, 즉 초월적(transcendental) 아니면 순환적으로 추론하는 것 말고 다르게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순환적 추론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증거이다.

 

순환적 논법이야말로 인간에기 주어진 유일한 논법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강한 주장이다. 이 말은 사람마다 스스로 전제하는 바 지식 체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순환적 논법이라고 하여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합리주의자는 모든 그의 추론이나 논지에 있어서 이미 그의 이성의 우선성 혹은 궁극성을 전제하고, 경험주의자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 얻는 모든 지식에 앞서서 이미 인간의 경험 방법(인간의 오관)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과학적 진리도 어떠한 가설 혹은 전제 없이는 세워질 수 없다. 합리주의자나 경험주의자나 전제주의자 모두가 어떠한 사실을 해석할 때 각자 해석의 시스템을 가지고서 해석에 임한다. 다 순환적이라는 것이다.

반틸은 또한 순환적 논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에 하나님을 전제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을 순환적 논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 없이 추론되는 모든 논법은 결국 파멸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우리의 논법 혹은 추론을 단순히 순환적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실들을 다른 사실들의 존재와 의미와 같은 수준에 놓고 추론하거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이지 단순히 우주 안에 또 하나의 다른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와 접촉하신다면 그것의 시작(initiative)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그 어떤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반틸의 전제적 논법은 순환적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일반적 순환과는 다르다. 왜냐면 우리가 전제하는 것은 우리가 알려는 사실과는 다르고 진리와 거짓의 궁극적 기준이신 하나님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실들을 다스리시고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반틸은 자신의 논법을 단순히 순환적이라기보다는 나선형적(spiral)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궁극적 하나님을 전제하면 그 분으로부터 논법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인간 이성을 궁극적으로 놓든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놓든 간에 모든 인간의 생각은 순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기독교의 진리 체계를 순환적이라고 비판할 여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은 순환적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순환적 논법에 의존하는 것은 합리성을 포기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를 궁극적인 위치에 놓는 것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궁극적 위치에 놓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런 순환적 혹은 나선적 추론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대화에서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도 순환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고 자연 속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이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라고 비판하는 것도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된다. 자신의 순환논리로 거부하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논리의 법칙 혹은 논리의 철학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그 법칙 혹은 철학을 의존하는 논리로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일이다.

 

성경 안에서 변증학적 사례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우리에게 변증을 요청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변증 방법을 제공하는지 중요한 사례들을 상고하도록 하겠다. 물론 이러한 제한된 구절들을 통하여서만 변증학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 전체가 변증학의 도구요 또한 내용이요 근거요 목적이다. 그리고 일반 계시 모두가 변증학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단지 이러한 구절들을 통하여 우리의 변증의 자세와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 변증 원리를 찾고자 한다.

 

행 26:1-32

(행 26:1, 개정)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 26:2, 개정)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행 26:3, 개정)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행 26:4, 개정)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행 26:5, 개정)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행 26:6, 개정)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행 26:7, 개정)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행 26:8, 개정)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행 26:9, 개정)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행 26:10, 개정)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행 26:11, 개정)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행 26:12, 개정)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 26:13, 개정)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 26:14, 개정)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5, 개정)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26:16, 개정)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 26:17, 개정)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행 26:18, 개정)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9, 개정)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행 26:20, 개정)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행 26:21, 개정)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 26:22, 개정)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 26:23, 개정)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4, 개정)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5, 개정)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행 26:26, 개정)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행 26:27, 개정)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 26:28, 개정)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9, 개정)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행 26:30, 개정)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행 26:31, 개정)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행 26:32, 개정)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여기 사도행전 26장 1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명(辨明)한다고 기록한다. 여기 ‘변명하다’는 말은 기독교를 잘 봐달라거나, 잘못이나 부족함을 소위 변명한다는 말이 아니라 변론하고 증거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고 선포함에 있어서 단지 아그립바 왕이나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의 이성이나 경험이나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고찰(3-7절), 종교적 상식(8절), 바울 자신의 경험(9-18절), 복음 제시(19-23절), 역사적 증거(26절), 기독교 입장에 서 보게 하는 것(27-29절) 등의 방법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이렇듯이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여러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러 방법들을 동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고 있다(6절)’는 사실과 ‘소망을 인함이라(7절)’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방어 차원에서 자신의 입장을 잘 봐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이성이 경험이나 상식에 기독교의 진리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에 상대방이 맞추도록 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해 역사, 경험, 상식, 이성, 증거 등을 도입하고 있다. 자신이 믿는 기독교가 이러 이러한데 어찌 못 믿는 것으로 여기느냐는 것이다(8절), 바울의 이러한 변증은 단순히 방어적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적이다.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고 불신에 대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든다. 상대방의 잘못, 무지, 모순, 억지, 교만, 좌절 등을 지적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세우는 것이다. 결국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는 말을 하며 당황한다. 피하기 힘든 상황을 접하여 당황하게 되는데도 끝까지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설득(persuasion)과 증명(proof)은 다르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설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그립바 왕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바울이 증명을 못했다거나 기독교 진리가 비합리적이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에 대한 증명은 상대방이 인정해야, 심지어 모든 자가 인정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인정하는 것이나 설득당하는 것은 변증자의 몫이 아니다. 성령의 몫이다. 설득은 논쟁의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증명과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를 눈으로 보았어도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왜 이들은 설득당하지 않고 왜 이들은 믿지 않았을까? 증거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합리적이지 못해서도 아니다. 이들의 고집과 자신의 세계관(world view)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으로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함에 있어서 증거와 합리성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아니 됨을 깨달을 수 있다. 아무리 증거를 제시하고 합리성을 증면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 자신과 같이 될 때에 자신이 증거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기독교 진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져야 밝히 볼 수 있고 믿어진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질 때 부활이 극히 자연스러운 사실로 다가온다. 물론 기독교 진리는 기독교인에게만 진리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자에게 진리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기독교 진리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혹자는 기독교 진리를 그럴듯하다고 생각은 해도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면서까지 진리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철저한 불신자만 아니라 이러한 자도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궁극적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자신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나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독교 변증의 방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그립바 왕 개인의 이성의 판단이나 상식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바울의 세계관을 갖도록 권하는 것이 지혜로운 변증이다.

 

벧전 3:15

(벧전 3:15, 개정)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믿는 자들이 겪는 고난은 불신자가 겪는 고난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세상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변증’이다. 우리 소망에 관한 이유, 즉 진리, 의, 생명, 구원 등에 관한 이유를 변증하는 것이다. 변증은 언어 소통에 의한 사역이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변증하고 전함에 있어서 언어 소통을 불가피하다. 언어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언어로 변증할 때는 자연스럽게 논리, 지식, 상식, 역사적 고찰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아니 되는 것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함에 있어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주로 따로 구별하여 모시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삼위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전제나 준거점(reference point)에 앞서서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나 경험을 우선으로 하는 변증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성이나 경험은 궁극적인 전제나 준거점을 검증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나 준거점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성이나 경험이 황당하게 혹은 맹목적으로 혹은 우연에 따라 작동되지 않도록 해 주는 틀이 바로 궁극적 전제와 준거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연의 한 원리가 원리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원리가 적용되는 틀인 자연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원리가 기발하고 확실하다고 해도 그 적용의 틀인 자연이 매 경우에 따라 변한다면 그 원리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성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틀인 궁극적 전제나 준거점이 없으면 이성과 경험은 처음부터 무용지물이 된다. 자연이 매 경우에 따라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자연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작용되고 유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삼위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참된 변증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것부터이다.

 

고후 10:4-5

(고후 10:4, 개정)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고후 10:5, 개정)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기독교 변증은 단지 방어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것이 아니라 공격적임을 말씀한다. 세상의 진은 견고하고 높아져 있다. 그만큼 그들도 내세울 것이 있고 하나님을 대적할 만한 무기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단순히 우리가 믿는 진리가 옳다는 우리만의 확신에 안주할 수 없다. 세상의 진이 견고하고 높아진 만큼 우리의 진리를 파하려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직 참된 진리이신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자의 자세이다.

진리는 타협이나 동의에 의해 규정되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진리가 진리로서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또한 그 진리에 대항하는 모든 것들을 쳐부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100% 확실한 진리는 타협이나 동의가 필요 없다. 그 진리를 따르든지 그 진리를 다르지 않을 경우 파함을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관용이나 수용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를 진리 되게 하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을 대적한 자에게도 진리가 진리의 역할을 해야 구원의 길이 주어진다. 달리 방법이 있다면 진리를 대적하는 자도 수용할 수 있지만 달리 방법이 있지 않다. 진리의 길은 오직 한길이다.

 

행 17:22-34

(행 17:22, 개정)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행 17:23, 개정)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개정)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정)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 17:26, 개정)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행 17:27, 개정)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개정)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개정)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개정)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개정)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개정)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개정)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행 17:34, 개정)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여기 사도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먼저 아덴 사람들을 향해 종교성이 많다고 말한다. 즉 아덴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종교성은 하나님과 그의 특별 계시를 아는 종교성이 아니다. 자연을 통한 종교성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그들이 갖고 있는 종교성이다. 이 종교성을 바울은 참 하나님과 진리를 위한 접촉점으로 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지만 신을 찾고자 하는 그들의 종교성을 통하여 참 하나님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23절)’과 같이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추론되는 것도 아니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는 분도 아니요,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도 아니라고 증거한다. 참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가 친히 생명과 호흡과 만물(물리적, 정신적 다 포함된 만물)을 주시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이 출발해야 함을 말씀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말씀한다. 인간의 삶과 행동과 존재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단지 외형적인 삶과 행동과 존재만 아니라 내적, 정신적 영역까지 포함된다. 출발만 아니라 의마와 내용도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 바울은 헬라 시인(철학자)이 주장한 ‘인간은 신의 소생’이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의 철학을 아무 쓸 데 없는 것으로 돌리지 않는다. 더듬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접촉점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철학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며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면 하나님을 찾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신의 소생이면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기지 말아야 함이 당연하다.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전개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성이나 철학이나 상식이나 논리에만 호소하고 있지는 않다. 즉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만 만족하고 있지 않다. 단지 더듬어 찾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30절)”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회개의 요청은 바울 개인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계시와 복음에 따른 요청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참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말한다(31절). 증거가 주어졌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진리가 사실이기 때문에 증거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믿을 만한 증거가 주어졌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기롱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시 듣겠다며 혼란스러워 하기도 했다. 믿을 만한 증거가 주어졌다고 해서 기독교 진리가 변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의 입장에서 증거나 논리를 증립적으로 놓고 의존할 수는 없다. 또한 이러한 변증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34절).

 

빌 1:7

(빌 1:7, 개정)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관원들에게 복음을 변명(defense)하고 확정(confirmation)한 것으로 이해된다. 변명하는 것을 일종의 방어라 한다면 확정함은 일종의 선포라 할 수 있다. 선포라 하면 전도 및 설교를 의미한다. 변명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선포한 것이다. NLT(The New Living Translation) 영어 번역본에는 ‘확정’을 ‘Telling others’라고 번역했다. 일종의 전도로 이해한 것이다. 복음 사역에는 방어하는 것과 확정하는 것 두 면이 다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변증과 전도 혹은 설교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을 방어하는 것(변증)’과 ‘복음을 전하는 것(전도-설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전할 복음이 세상 믿지 않는 사람에 의해 쉽게 부정되고 변질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복음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개인의 종교적 신념 내지는 의견으로 소개되는 것뿐이다. 이 때 복음은 중립의 장(場)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중립의 장으로 빠져들게 되면 결국 복음은 사람의 손에 그 운명을 맡기게 될 것이다. 설령 기독교인이 중립의 장에서 논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해도 상대방이 복음을 받을 리는 미지수이고, 혹은 논쟁에 순복을 해도 복음에는 순복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의 개인적 신념도 아니고 또한 받는 자가 개인적 신념에 의해 변질되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생각하면 결국 복음을 중립의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고 복음은 스스로 방어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로들의 생각과 입장을 나누는 것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 전파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복음은 방어되고 변증되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우리 개인의 사고나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 그러므로 설령 우리가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과 중립적 입장에서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 없는 것이 복음이다. 진리를 외면한 채 전해지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 먼저 변증되어야 전도도 있고 설교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전도 및 설교와 변증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변증이라는 것을 오히려 복음과 거리가 먼 한 개인의 지적 놀이로 생각하여 전도에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전도는 순수하게 혹은 뜨겁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어떤 철학적, 논리적, 지적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즉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전달되리라는 잘못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세상 사람들은 아니 인간은 순수하게 진리를 전해 받지 않는다. 인간이면 누구나 포기하기 싫은 자신만의 궁극적 틀 속에서 살고 있다. 만약 복음이 자신의 틀과 이질적이면 복음을 거부하기도 하고 혹 복음이 자신의 틀과 이질적이지 않으면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인다 해도 복음에 순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틀에 복음을 순복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있어서 변증은 불가피한 것이다. 변증은 바른 전도와 설교를 위해 존재하고 설교와 전도는 변증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고후 2:14-16

(고후 2:14, 개정)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5, 개정)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개정)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복음을 변증하는 목적은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요, 그 결과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것이다. 복음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향기가 아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도 향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불신자들과 다른 종교들에게는 악취요, 우리에게만 향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향기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피우게 되면 싫든 좋든 그 냄새를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그러나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우리 기독교 진리 자체가 불신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이다. 단지 그들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멸망에 다다르는 것이다.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할 것 없이 모든 자들의 소망은 참 진리의 향기를 맡는 길뿐이다. 진리 자체가 동시에 악취이며 향기일 수 없다. 진리는 언제나 향기일 뿐이다. 문제는 그 진리를 향기로 맡고도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복종치 않는 불신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기독교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동시에 참 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참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둘 다 절망과 멸망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의 향기를 불신자, 이방인, 타종교인 할 것 없이 모든 자에게 전해야 한다. 달리 살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변증은 불신자들을 지옥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소개하는 것이다. 자신의 궁극적 틀과 세계관을 포기해야 그 향기가 향기로서 역할을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지식으로서이 역할을 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딤후 2;23-26

(딤후 2:23, 개정)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딤후 2:24, 개정)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딤후 2:25, 개정)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 2:26, 개정)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복음을 변증할 때 가져야 할 자세를 잘 말씀하고 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하고, 다투지 말아야 하고, 온유함으로 가르치고, 참기도 하고,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 수도 있고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변증의 자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여야 한다. 우리의 변증학은 머리의 변증학만 아니라 마음의 변증학이기도 하다. 변론하고 주장하고 무시하는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세를 가지고 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신앙적 성품이 우리의 논리보다 더 효과 있고 더 강한 변증 방법이 될 수 있다. 어떤 지식적이고 논리적인 것도 이 성품에 의해 좌우되기도 할 것이다.

윗 구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논리, 증거, 경험 등의 방법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여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함을 주셔야 진리를 안다. 회개함이란 일종의 세계관의 전환이다. 자신의 궁극적 틀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궁극적 틀로 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논리나 변론이나 증거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죄로 어두워진 사람은 진리를 분변할 수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의 은총을 통하여 진리를 바로 분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불신자에 의해 진리로 분변되어야 진리가 진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분변하든지 하지 않든지 진리는 진리이다.

 

롬 1:18-25

(롬 1:18, 개정)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19, 개정)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개정)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21, 개정)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개정)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롬 1:23, 개정)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4, 개정)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 1:25, 개정)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여기 19-20절에 분명히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들어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 있고 또한 인간 자신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작위로나 이유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의로 진리를 누르는(suppress)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 이유는 바로 진리를 불의로 누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다고 해도 정작 불신자들은 그 만물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다. 그들이 핑계치 못한다는 말씀은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불신자들이 만물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일종의 타락한 마음을 가진 인간은 22절 말씀처럼 스스로 지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역하며 하나님 대신의 다른 피조물(우상, 자신, 지식, 철학적 개념, 다른 인간 등)을 섬긴다. 이렇게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보지 않고 자신을 피조물로 보지 않는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든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과 꼭 상관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 즉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일반 계시를 통해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더욱이 특별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무신론자는 없다.

 

눅 2:34-35

(눅 2:34, 개정)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눅 2:35, 개정)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의 지상 사역 역시 변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시므온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할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많은 대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패함과 흥함과 비방이 표적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 편에 속했는가, 그 반대편에 속했는가, 그로 인해 비방을 받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표적(sign)이 되신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반립(antithesis)의 이유가 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 분명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대적과 거부와 왜곡이 가까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반립은 기독교 진리의 수호와 선포에 있어서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비(非)진리와의 타협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처사이다.

 

잠 4:23

(잠 4:23, 개정)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 말씀은 기독교 변증은 마음(heart)과 관련되는 영적이지 단지 머리에 관련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물로 우리의 변증에 있어서 논리나 이성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다. 여기 마음은 단지 감정적인 영역이 아니라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것보다도 신앙을 지켜야 한다. 신앙에서 생명의 근원이 난다. 신앙에는 지적인 것, 감정적인 것, 의지적인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죄악으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된 것이다. 렘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말씀한다. 생명의 근원이 나는 곳이 죄로 인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게 되었다. 엡 4:18-19에서는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씀한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 죄로 인해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게 되었다. 마음이 타락했다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진리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창 8:21에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말한다. 마음의 계획이라는 것은 의지적인 것만 아니라 지적인 요소도 포함된다. 이러한 마음의 모습을 모르고서는 기독교 진리를 제대로 변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모습은 초월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사람의 정체성은 뇌의 작용이나 몸의 화학 작용이나 감정이나 자극이나 환경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한 마음에서 발견된다. 마음은 인간 스스로가 변화시킬 수 없다. 마음의 변화를 위해 초월적인 역사가 필요하다. 위로부터 다시 나는 것, 즉 거듭남이 필요 하다. 이러한 것이 발생되지 않고서는 기독교 변증은 불가능하다.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결국 기독교 변증의 성공은 마음의 거듭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은 지적, 논리적, 철학적 작업이라기보다는 언약적 차원에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인정하고 모시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변증학은 성경 해석학,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과 뗄 수 없다고 하겠다.

 

잠 26:4-5

(잠 26:4, 개정)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잠 26:5, 개정)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이 말씀은 먼저 미련한 자(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입장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의 이성이나 판단이나 기준에 맞추어 대답했다가는 그와 같이 미련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미련한 자의 이성이나 경험이나 기준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미련한 이성이요 경험이요 기준일 뿐이다. 중립적이라 추측하여 그의 입장을 따랐다가 그와 같이 미련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세계관이 따로 있는데 그를 따라 대답했다가는 그 세계관의 희생무링 될 수 있다.

반면에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해야 한다. 미련한 자의 세계관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는 아니 되지만 역설적으로 미련한 자의 세계관을 파헤치고 허구성을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해야 한다. 세계관을 포기하도록 해야 기독교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세계관의 모순과 비합리성과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해 그들의 세계관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입장에 서 볼 필요가 있다. 세계관들이 서로 반립적(antithetical)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부딪혀서는 비효율적일 수 있다. 간접적으로 그들 입장에 서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세계관의 자기당착적이고 비합리적임을 깨닫게 해서 기독교 진리에 굴복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 진리가 가장 합리적이고 또한 모든 것이 이치에 맞음을 확신해야 한다. 이런 확신이 있을 때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지적하고 거짓됨을 알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련한 자는 자신이 지혜로운 줄 착각하게 된다. 이렇듯이 기독교 변증은 방어적이면서 동시에 공격적이어야 할 필요성을 잘 말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