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해설 1~15장 요약 및 적용
제1장 성경
오늘날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청난 핍박속에서 수많은 이단과 외경의 유혹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일꾼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시고 완성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의 주제는 성경이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최고의 권위가 전통이나 인간의 이성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수도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교회에게 주시며 자신의 모든 뜻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다.
그렇다면 현재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정경이라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회의를 통해 정경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정경은 그 이전부터 정경인데 단지 회의를 통해 정경으로 확인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시기록은 이로써 종결되었고 더 이상의 성경은 있을수 없다. 따라서 외경이 성경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기는 하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므로 정경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감으로 증거하신 그 자체에 권위가 있다. 성경의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경외감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 그럴때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하신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조명은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말씀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함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되지만 구원에 필요한 꼭 알아야 할 것들은 아주 쉽게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어떤 자들이라도 성경을 통해 구원에 이를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그 자체이므로 해석상 종교상의 모든 논쟁들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을 통해 검토되고 결정되어져야 한다.
묵상-사랑하는 친구중에 외경에 빠져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다. 그 친구는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다.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있었던 친구였지만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지 못함으로 결국 진리로부터 멀어졌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제2장 하나님과 성 삼위일체
현재 기독교의 대부분의 이단들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반드시 삼위일체 교리를 훼손시켜야지 그들 자신의 교리와 교주체제가 성립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완전하시고 무한하시다. 죄가 없으시며 거룩하신 분이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시며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홀로 자족하시고 피조물의 도움이나 영광을 받을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의 근원으로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그분에게 예배와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한분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신다. 성부는 스스로 계시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셨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로 나셨으나 지음을 받거나 출래하지는 않으셨고 세 위격이 함께 영원하시며 함께 동등하시다.
삼위하나님에 잘못된 견해중 하나는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을 나무나 태양 한 사람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삼위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며 서로 사랑하시며 서로 대등하신 분입니다.
묵상- 나의 구원을 위해 삼위하나님은 서로 협력하신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행하시고 성령님은 그것을 적용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이중 예정 교리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다.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은 볼섹과 불링거다. 볼섹은 하나님의 택함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불링거는 선택만을 작정으로 보고 유기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택한 결과라고 보았다. 그들은 이중예정교리를 택할 경우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고 말것이라고 말했다.
칼빈의 작정에 대하여 기술하면 하나님은 장차 일어나게 될 일들을 정하셨다. 죄의 조성자는 아니시며 죄를 지을 가능성에도 불고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따라서 세상의 우연성은 없고 임의성만 있게 된다. 인간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그 어떤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예견된 믿음이나 선행에 의하여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 따라 인간을 택하신 것이다.
작정교리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교리는 이중교리와 유기 교리이다. 누구는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셨지만 누구는 영벌을 받도록 예정하셨다. 이 부분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나 이 부분은 사실이며 죄인이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따질수 없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세전에 이루어졌으며 구원으로 예정된 수가 정해져 있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없다. 하나님은 구원의 수단들 즉 믿고 의롭다 칭함을 얻고 양자가 되고 성화되고 구원에 이르는 과정들도 영광의 방향으로 미리 정하셨다.
정리하면, 선택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려는 것이고 유기도 하나님의 공의를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예정교리 앞에 비로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으며 감사할수 있으며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신앙의 길을 걸어 갈수 있다.
묵상-예정교리와 유기 교리를 보면서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수 없다. 한편으로는 유기로 작정된 영혼들이 불쌍하여 마음이 답답해져 옴을 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며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예정을 확실히 믿으며 주께서 맡기신 사역을 성실히 감당하는 길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제4장 창조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하여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
6일 창조설에 반대하는 이론: 하나님은 세상을 6일동안 창조하셨는데 6일을 현재의 시간개념과 동일하게 볼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제2창조설: 천지창조를 1창조로 성육신을 2창조로 본다. 1창조는 육의 창조로 보고 2창조는 영의 창조로 본다. 따라서 성육신 자체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천지창조 또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으로 본다.
간격이론: 창세기1:1과 1:2 사이에 수백만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는 것으로 진화론을 반대하지 않고 수용한 이론이다.
인간의 영혼의 멸절설과 수면설: 의인은 영생이나 악인의 영혼은 수면에 들어가거나 멸절한다는 이론을 말한다.
천지창조를 6일 창조로 보지 않을 경우 그 자체로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으로 무신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제2창조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가 이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지 못함이다.
간격이론은 당시의 만연한 진화론 사상에 대립하지 않고 타협하는 이론으로써 이러한 무신론은 공산주의, 인본주의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 모든 것은 사라지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생과 영벌만이 존재하게 된다.
묵상-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비록 죄로 인해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천지만물을 보호하고 계시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잘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일 것이다.
제5장 섭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난후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호하시고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데 악은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악을 조성하시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뜻에 반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악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한계를 정하시고 정돈하시고 관할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도록 하시는가? 성경의 다윗의 인구조사와 바울의 가시를 예를 들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교만하거나 더 큰 죄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작은 죄에 빠뜨리시기도 하신다.
악인의 죄도 섭리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악인들을 사용하신다. 이런 점을 볼때 인간 스스로 죄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심을 통해 죄악에 노출하기도 하신다.
묵상-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있으실까? 세상에 아주 작은 일에도 관심이 있으실까?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하심에 대하여 부정적일 때가 훨씬 많았다. 가정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리심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돌아볼 때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삶속에서 더 깊이 느끼고 싶다.
제6장 인간의 타락, 죄, 그 형벌
하나님은 왜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셔서 죄를 짓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셨지 죄를 짓도록 부추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선악과를 주셨다. 아담은 이것을 먹을지 안 먹을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때 그것을 선으로 사용하지 않고 악으로 사용하실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빼앗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해결하고 정돈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아담의 죄가 왜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는가? 자신의 죄도 아닌데 죄가 전가되는 것은 부당하나 아담은 자연적 의미의 대표이자 언약적 의미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에 대한 결과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선악과하나 먹었을 뿐인데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 진노의 자녀, 심판받을 자로 전락하였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영적단절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좋은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중생한 자들도 똑같이 죄를 짓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생한 자들에게도 여전히 본성의 부패가 남아있어서 죄를 지을수 있다. 불신자와 다른 점은 죄를 인식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는 거룩한 본성의 작용이 있다는 것과 그 죄가 상습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묵상-아담의 죄가 전가된다는 것이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아담의 죄가 전가 되었음을 몸으로 알 수 있다.
제7장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차이는 무엇인가? 행위언약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지키는 여부에 따라 영생과 사망의 결과가 오는 것을 말하고 은혜언약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
구약백성들도 온전한 구원을 받을수 있나? 구약의 율법과 제사는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구약의 은혜언약은 이것들을 통해서 나타났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죄사함과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은혜언약과 신약의 은혜언약의 관계는? 구약의 제사들을 신약에서는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신약에서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의 언약이 더 못한 것도 아니고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언약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언약으로 보아야 한다.
묵상- 어릴 때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때 그 믿음이 나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믿음조차도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차츰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감사함과 평안이 찾아왔다.
제8장 중보자 그리스도
성자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나? 성자께서는 인간 본성의 모든 특성들을 취하셨지만 죄를 취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인간아버지로 인해서 잉태된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 되셨기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수 있다.
성부께서는 왜 성자에게 중보자의 직분을 맡기셨나? 인간은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으며 인간의 제한성 때문에 오감으로 느낄수 있는 선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떠분이신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뜻 가운데는 중보자로서의 자신의 직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사도신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장차 재림하실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결과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기에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치 않다.
구속 사역의 적용은?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계시하고 그 말씀을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이 믿고 순종하게 함으로 구속 사역을 이루신다
묵상-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을 성령을 통하여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9장 자유의지
타락전과 후에 자유의지는 어떻게 다른가? 타락전 인간의 자유의지는 절대적인 선을 따를 가능성과 악을 따를 가능성을 둘다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후에는 절대적 선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회심할 마음조차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인은 죄안에서 죽어있고 하나님의 의에 이를수 없게 되었다.
신자의 자유의지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신자의 자유의지는 어느정도 선한 쪽으로 사용이 되나 인간본성의 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죄를 지을수 있다. 신자는 선을 행하려고 하나 도리어 악을 행할 때가 더 많다. 신자는 영화의 상태에서만 절대선을 행할수 있으며 그때에댜 비로소 예수님과 같게 될것이다.
묵상- 신자인 내가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마음과 행동을 할때가 너무나 많다. 마음속에 두가지의 생각이 끊임없이 싸움을 느낀다. 하나님이 부르실때까지 겸손히 깨어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제10장 유효적 소명
유효적 소명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중생시키는 역사가 있는 소명을 유효적 소명이라 한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고 교회에 나와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분명 있다. 이것은 외적 소명만 있는 자들이다.
유효적 소명의 특징은?
은혜성-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만 유효적 소명이 주어진다.
유효성-유효적 소명을 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고 주님과 교제하게 된다.
불변성-유효적 소명은 변하지 않고 불변하다.
숭고성-유효적 소명을 받은 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묵상-한번 부르심으로 나를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 부르심을 나의 안에서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11장 칭의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인데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교리를 말한다. 칭의는 법정적 의미로 쓰이며 죄인이 그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원래는 죄인인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고 칭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칭의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며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게 된다.
칭의로 의롭게 되었다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가? 칭의를 통해 성도는 의로운자가 되지만 여전히 죄를 짓게 된다. 따라서 그 죄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칭의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죄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지만 신자는 죄로 인하여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칭의된 자들은 성도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묵상-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의롭다고 칭하셨는데 나의 삶은 그렇지 못할때가 훨씬 많다. 어떨 때는 내가 과연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는가라고 생각할 만큼 마음의 죄가 올라온다. 그러나 신자도 여전히 죄를 지을수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형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징계하신다는 글을 읽으며 마음의 위로가 되며 하나님이 두렵기 보다 가깝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제12장 양자됨
칭의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다. 신약 당시에 양자는 지금과 달리 친아들과 같은 자격을 가진다고 들은 적이 있다. 양자가 됨으로 우리는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 있고 죄인이나 종의 자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다. 또한 양자됨으로 인해 징계는 받으나 결코 버림당하지 않는다. 양자됨으로 하나님의 모든 복들을 상속받을 자격이 생기게 된다.
묵상-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들로서 나가기 보다 웬지 모르게 어렵고 부담스럽고 죄인의 자격으로 나간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느낄때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부터 깊이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자관계인 것은 맞으나 그것이 가슴깊이 절절히 느껴지게 되도록 성령님께서 지금도 이끄시고 도우심을 믿는다.
제13장 성화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성화가 이루어진다. 성경은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 객관적 표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기도이다. 기도는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하여 하나님을 닮게 한다.
또한 섭리가 있다. 신자가 이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의 섭리하에 순경과 역경을 통하여 신자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
성화와 중생의 관계는? 중생은 단회적이고 창조적이며 완성적 사역이다. 성화는 일평생 계속되는 과정이고 성장적 사역이며 점진적 사역이다.
성화와 칭의의 관계는? 칭의는 의롭다고 하는 법정적 선언 행위이며 형벌에서 단번에 벗어나는 것이다. 성화는 내부의 심령상태를 만드는 것이며 죄로인한 부패와 더러움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묵상-일평생 하나님앞에서 성화의 과정을 살아야 하는 것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결국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케 하실 그분을 의지하고 믿음의 경주를 다하리라 다짐한다.
제14장 구원하는 믿음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중생 칭의 성화를 통해 신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또한 그 믿음이 자라게 되고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음의 삶을 살게 된다.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먼저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 부활과 다시오심에 대한 지식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되고 그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
묵상-이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고 자라게 되는데 말씀을 맡은자로서 설교자로서의 나의 사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한 무거운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성도들의 믿음의 문제가 걸려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숙여진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문제는 설교와 설교자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전하는 설교자로 살아야 함을 다짐한다.
제15장 생명 얻는 회개
참 회개란? 회개는 죄로 인한 참된 애통과 죄에 대한 단념이며,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행하겠다는 신실한 헌신이다. 죄에 대한 지적인 이해, 감정적인 인정, 의지적인 결단을 포함한다. 회개와 믿음을 합해서 회심이라 하고 회심은 전 생애를 통해 계속되어야 할 신자의 도리이다. 생명얻는 회개는 중생과 칭의를 가져오는 일평생 단 한 번 있는 회개를 말한다. 지정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전인격적인 회개이다.
성령훼방죄는 누가 짓는 죄인가? p293 중간에 나오는 이 죄에 대한 결론 부분에서 이 죄는 중생자가 짓는 것도 아니고 일반 불신자의 죄도 아니고 구원 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등한 성령의 역사를 받은 자들이 짓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생한 자들은 절대로 중생이 취소될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할때는 이런 결론이 맞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늘의 은사와 성령에 참예한 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이 어차피 유기된 자들이라면 일반 불신자와 달리 구별하는 이유가 없을 것이다. 성령을 모르고 거역하거나 알고 고의적으로 거역한 자들을 구별하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차라리 중생한 자들이 버림을 당하는 유일한 경우로서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중생한 신자에게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사용할수도 있지 않을까? 아담이 절대적인 선을 행할 자유가 있었을 때에 죄로 인하여 타락한것처럼 중생한 자도 아직 영화의 단계로 들어가 예수님처럼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고의적인 불순종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 이상 나가면 이단이 될까봐 여기서 멈추어야 겠다. 이렇게 생각해 본 이유는 p291에 인용된 성경구절이 속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아서 이다.
묵상-나에게 생명 얻는 회개가 언제 있었을까? 중2때 교회를 처음 나가면서 좋았던 것은 사람이었다. 선생님도 잘해주시고 예쁜 여자들도 많고 선배들도 좋아서 교회를 나가는게 마냥 즐거웠다. 중3 수련회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도를 했다. 내가 죄인이고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심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그날이 생명 얻는 회개의 날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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