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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영성

예림의집 2016. 11. 16. 18:57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영성


1. 들어가는 말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 Martin Luther

초기인류의 역사 속에서 부패와 타락이 만연하였을 때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를 택하셔서 인류를 갱신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중세후기 교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갱신하고 복음의 능력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마틴 루터를 사용하셨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루터의 시대인 15세기 말엽,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대한 갈망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제도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던 ‘종교회의 운동’이나, 기독교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던 ‘인문주의 개혁자’들의 출현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수많은 개혁의 목소리 가운데 루터를 가장 선두에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루터는 은혜가 없던 시대에 은혜를 위해 싸웠고, 회칠한 무덤에서 파낸 유골에 키스하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제 하나님의 아들에게 키스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온갖 거래에 대한 제의와 타협의 달콤한 목소리들이 이제 그만 돌아서라고 유혹할 때도 성경의 돛대에 자신을 묶고 진로를 고수했다.” 댈러스 신학교 목회학교수인 레그 그랜트는 자신의 책 『소설 마르틴 루터』에서 이렇게 루터를 평가한다.

교회의 전체 역사를 놓고 볼 때 마틴 루터만큼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엇갈렸던 인물은 드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가리켜 교회의 통일을 파괴한 반란자요,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은 산돼지요, 수도원 주의의 기초를 파괴한 반항심에 가득 찬 수도사로 묘사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순수한 복음의 전파를 가능케 한 위대한 영웅이며, 성경적 진리의 수호자요, 부패한 교회를 개혁한 인물로 추앙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결국 구교와 신교(혹은 Catholic과 Protestant)를 가르는 분기점 역할을 하였고, 교황청의 몰락과 대분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유하고 부패했던 교회는 마침내 신앙과 신념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진통을 겪으며 마침내 개혁과 자정의 길을 걷게 된다. 이처럼 루터는 ‘종교개혁’이라 일컬어지는 교회 갱신운동의 중심에 서서, 교회역사는 물론 서부 유럽과 인류역사의 판도변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루터의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 신학’이다. 루터의 인생을 관철하는 키워드는 ‘의로움’이다. 어린 시절에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수도사가 된 후로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철저한 고행의 삶을 경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일반적인 ‘의’ 개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이 루터의 발견이다. 이러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부와 권력으로 부패하여 고난의 자리에서 멀어진 교회를 향해 경종을 울린다.

더욱이 이러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학위를 위해 연구실에서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긴박한 개혁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땀과 피로 쓴 신학이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되어 황제의 ‘주장철회 압력’을 받았을 때 루터가 황제 앞에서 했던 답변 속에 당시의 긴박성과 루터의 진실성이 담겨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본 발제물에서는 종교개혁자이며 또한 신비가였던 루터의 생애와 신학을 고찰함으로써 루터의 영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루터 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인 내용과 발전과정에 대한 맥그레스의 탁월한 식견을 통해, 오늘날 갱신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한국교회에 루터의 개혁정신과 십자가 신학이 어떻게 적용되어질 수 있을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시대적 배경

1) 종교개혁의 토양 - 중세후기 서부 유럽의 시대상황

● 교회의 타락 - 교황과 성직자들이 권력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며, 도덕적으로 부패

● 근원으로의 회기에 대한 갈망 -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헬라철학과 고대 사본 대량 유입

● 대중들의 불만 가중 - 지주들의 착취로 인한 경제상황 악화와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

● 봉건제도의 몰락 - 민족주의(Nationalism)의 등장으로 라틴어에서 각국어 사용

● 과학의 발전과 세계관 변화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새로운 가치관, 종교관의 요구

● 인쇄술의 발달 - 새로운 생각들과 출판물의 급속한 보급

● 인문주의 학자들의 활발한 활동 - 성경과 교부의 가르침으로의 회귀와 개혁주장

2) 종교개혁의 촉발

중세에 들어와서 서구의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수도원들의 활기와 생명력은 사라져가고, 교회들은 대형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면죄부 판매와 성직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고, 젊은 신부 루터는 비텐베르크 캐슬교회의 문에 95개 항목의 반박문을 내걸고 정면으로 맞섰다. 그 날이 먼 훗날 종교개혁 기념일이 되리라는 것을 루터는 알지 못하였다.

3. 루터의 생애와 영성


1) 출생과 성장기

●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농부 한스 루터 와 마가레타 루터 사이에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한스는 빈농출신에서 광부로 전업하였으며, 후에는 광주(鑛主)로 자수성가한다.

● 소년시절 그의 부모와 선생님들은 매우 엄격했으며, 학교 공부시간에는 채찍으로 맞는 경우도 있었다. 루터가 전 생애를 우울증과 신경불안증에 시달린 이유에 관해 일부 학자들은 루터의 유년시절을 주목한다.


2) 대학, 청년시절

● 1501-1505(23세)에 에르푸르트에서 인문학사 과정을 마쳤다.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윤리학, 그리고 형이상학을 공부하였으며,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하여 오캄의 유명론을 배운다.

● 대학을 졸업한 1505년 그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전공할 예정이었으나, 벼락으로 인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뒤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가 1507(25세)에 에르푸르트에서 신부로 안수 받는다.


3) 비텐베르크(Wittenberg) 시절과 95개 논제

● 그의 스승이자 어거스틴 수도원 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지력과 종교적 영성이 뛰어난 젊은이로 인정하여 1509(27세)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프레드릭에게 천거한다. 이후 비텐베르크는 그의 삶의 중심지가 되었고 프레드릭은 격변의 세월 속에서 루터를 보호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

● 1510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규칙을 강화하고 재정비하도록 대표로 뽑혀 로마에 간다. 공무를 마치고 로마 교황청의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심한 절망에 빠지게 되고,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의 세속화를 목격하고 개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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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년 10월 31일(35세) 루터는 교황 레오10세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내용을 포함한 ‘95개 논제’를 라틴어로 기록하여 캐슬교회의 문에 붙였고, 만성절(All Saints Day) 축제를 맞아 비텐베르크를 찾은 방문객들의 공감을 얻으며 삽시간에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퍼져나갔다.


4) 다양한 논쟁들

● 1518년 교황은 루터가 속한 어거스틴 수도회에 치리를 부탁하였고, 결국 루터는 자신의 동료 수도사들 앞에서 ‘십자가 신학’을 설명하는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발표한다. 그 결과 교황의 기대와는 달리,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의 가르침에 지지하고 동조함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이 개최되었고, 노련한 논쟁사 엑크의 승리로 끝났다. 루터는 종교회의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오류라며,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 신자가 모든 교황이나 종교회의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루터 스스로 이단을 옹호하여 스스로 이단에 속한다고 인정케 한 것이다.

● 1520년 교황은 엑스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칙령을 통해 “산돼지가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았다”고 선언하며 루터를 파문하고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미 루터에게 동조하는 세력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학적으로 그에게 동조하는 종교인은 물론, 수많은 인문주의자들과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루터의 대열에 합세하였다.

● 루터는 종교개혁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종교개혁 3대 논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포로>, <크리스천의 자유>를 같은 해인 1520년 8월과 10월, 11월에 각각 발표하였고, 그 해 12월10일 교황의 출교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서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한다.

● 교황 레오10세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1521년 보름스(Worms) 제국회의에 루터를 소환하였고, 황제 및 독일 제국의 대 영주들 앞에서 주장의 철회를 강요받지만 끝내 거부한다. 그 후 그는 삭소니 지방의 선제후 프레드릭의 도움으로 1521년-1522년 기사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바르트부르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다. 루터는 1522년 신약성경을 출판하였고 1534년 구약성경도 출판 하였다.

● 1524(42세) 이후 종교개혁은 농민전쟁의 그림자 아래 위협받게 되었다. 초기에 농민의 편에 섰던 루터는 프레데릭 선제후의 죽음을 계기로 농민들을 비판하고 제후와 귀족들의 편에 서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뮌처나 농민들의 강한 비난을 받는다.

● 1525(43세) 수녀 출신의 캐더린 본 보라와 결혼을 하여 여섯 자녀를 둔다. 루터의 가정생활은 행복하였으나 그는 항상 육신의 병에 시달렸고 종교개혁가로서의 힘든 투쟁의 삶을 살았다. 루터는 아픈 몸을 이끌고 바쁜 삶을 살면서도 이주에 하나씩 책이나 소책자를 써냈다.

● 루터는 보름스제국의회에서 종교재판을 받을 때부터 불면증으로 시달렸으며, 담석증으로 매우 오랫동안 고생 하였다. 또 귀의 염증으로 시달리기도 하였고 나이가 들수록 협심증세가 발전하여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렇게 다양하고 혹심한 병에도 불구하고 그의 평생에 창조적 에너지와 능력은 계속 유지 되었고 그의 병으로 인하여 영적 유혹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1546년(65세) 고향 아이슬레벤 방문 중 사망한다.


4. 루터의 신학과 영성

1) 이신득의(以信得義)

● “어떻게 하면 의로우시고 준엄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수도사로서 갖는 루터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지 못한 존재라는 공포감은 청년 루터 수도사를 괴롭혔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마치 소년 시절에 경험한 교사와 아버지처럼 가혹한 재판관으로 생각되었다.

● 루터는 이 고민을 풀기 위해서 수도원의 모든 규율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완벽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얻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선행과 고행이야말로 루터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기에 충분해야 했지만, 루터는 항상 자기 자신의 죄악성과 이로 인한 공포감을 심하게 느꼈다. 루터에게 있어서 죄란 인간이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행동이나 생각들 이상의 무엇, 즉 하나의 상태였다.

● 그의 대 발견은 아마도 로마서를 강해하기 시작하였던 1515년의 사건으로 추정된다. 로마서 1:17을 곰곰이 묵상하던 중 “하나님의 공의”가 신자들에 대한 처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오히려 의인들의 공의, 혹은 의가 인간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이 의롭거나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켜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기에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이며, 믿음과 칭의 모두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2)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

●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최종적 권위로 정립시켰다. 가톨릭측에서는 정경의 결정이 교회에서 이루어진 만큼 교회가 성경보다 우선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하였지만, 루터는 성경과 교회 모두를 존재하게 한 것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성경이 교회나 교황, 그리고 전통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하였다.

● 기본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처럼 창조적이고 능력 있는 말씀이 예수님으로 성육신하셨으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계시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행동이시다.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계시되셨다. 또한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던 악의 세력을 극복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곧 하나님의 승리였다.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그 가운데서 예수님 즉 성육하신 말씀을 만나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만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는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그 일부분에 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였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에는 일련의 행동규범만 있고 복음을 발견할 수 없기에 ‘지푸라기’라 하였고, 요한계시록 역시 문제거리였다.


3) 십자가 신학

● 루터는 순전히 합리적, 혹은 자연적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에 관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통적 신학에 동의하였으나, 이것들은 모두 진정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천국으로 기어오르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며, 이러한 노력들을 가리켜 “영광의 신학”이라 불렀다.

● 하나님의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신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영광의 신학 대신 “십자가 신학”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신학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하는 장소, 혹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적 계시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 십자가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약하고, 고난을 받으시며, 걸림돌이 되신다. 이는 곧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행동하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만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이성, 혹은 양심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이미 깨달았다고 생각하였던 모든 관념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4) 율법과 복음

● 우리는 신적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게시 가운데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율법과 복음이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조적 관계는 하나님의 계시야말로 동시에 심판의 말씀이자 은혜의 말씀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동행하며 심판에 관해 들음이 없이 은혜에 관해 들을 수 없다.

●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들의 죄의 심각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심각성 때문에 복음은 그토록 놀랍고 좋은 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용서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율법의 성격이 변화한다. 이전에는 견딜 수 없는 짐이었던 것을 이제는 감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콤하게까지 느껴진다.

● 율법과 복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계속적인 긴장 관계는 곧 기독교 신자가 “죄인인 동시에 의롭다” 칭함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칭의란 죄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만인 제사장, 교회와 성례

● 루터의 만인 제사장 교리는 교회의 공동체적 의미를 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더 이상 계급주의적 제사장 제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믿는 이들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반드시 필요하며, 그 속에서 상호 협력하여 서로에게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신자들의 덕을 세운다.

● 교회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례이다. 진정한 성례는 반드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된 것이어야 하며, 복음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상징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통해 루터는 단지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 성례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임재하시는 형태에 관해 루터는 기존의 화체설에 반대한다. ‘화체설은 형이상학의 결과물이며, 행위적 희생으로서의 미사이론에 연루되어 믿음에 의한 칭의에 반한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성찬을 단순한 상징, 혹은 영적 실재의 표식으로만 여기는 입장에도 반대한다. ‘신자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행동을 통하여 바로 그 몸과 피의 혜택을 입게 된다’고 했는데, 이는 후대에 “공재설”이라 불린다.


6) 두 왕국, 교회와 국가

● 루터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왕국을 설립하셨다고 말한다. 한 왕국은 율법에 속하고, 다른 한 왕국은 복음에 속한다. 국가는 법률 아래서 운영되어야 하며, 그 목적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죄악은 곧 혼란과 파괴를 불러올 것이다.

● 반면 또 다른 왕국인 교회에 속하는 신자들은 복음 아래에 있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국가가 복음에 의해 성취되거나, 혹은 국가가 정통 신학을 옹립하여 이단들을 박해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반드시 동료 신앙인들에 의해서 국가가 통치될 때에만 이들에게 순종하겠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통치자들은 복음이 아니라 법률을 준행해야 한다.

● 복음의 왕국에서 세속의 통치자들은 아무런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 두 번째 왕국에 관한 한 기독교 신자들은 국가에 속해 있지 않으며 아무런 충성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신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입은 죄인이므로 국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7)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

● 루터는 성서와 어거스틴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했지만, 영성적으로 독일의 신비주의와 계보를 같이한다. 그는 도미니칸 신비주의자였던 에크하르트와 타울러의 저작들을 애독했으며, 14세기 후반에 어느 무명의 저자가 쓴 신비주의 전통의 독일신학(Theologia Germania)에 큰 영향을 받았다.

●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직접적으로 그가 즐겨 읽었던 요한 타울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루터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을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적인 연합으로 표현하였다. 물론 이것은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 루터가 가르친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은 그의 유명한 사상인 ‘속성간의 교류’(exchange of properties, communicatio idiomatum)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될 때 신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간의 교류가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쁨의 결혼에서 나타나는 결합으로 표현한다.


8) 겸손의 영성

● 루터는 『시편주석』전반에 걸쳐 겸손의 영성(pietas humilitatis)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진정한 겸손은 자연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화를 위한 올바른 자세로서 강조되고 있다.

● 루터가 겸손을 강조하게 된 결정적인 신학적 동기는 인간의 죄성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성을 철저히 앎으로써, 즉 의(Iustitia)에 대한 인식이 아닌 죄(Peccatum)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겸손에 이르게 된다.

● 겸손이 강조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의’가 칭의에 있어서 아무런 공로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버리고 죄인이라는 것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칭의의 길이다.


9) 개인경건

● 루터가 하루에 할 일이 많으므로 아침에 세 시간씩 기도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일 년에 성경을 두 번씩 읽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성경을 일 년에 두 번씩 읽는다. 성경이 큰 나무이고 성경의 말씀 하나 하나가 나무의 가지라면, 나는 성경의 말씀 하나 하나를 알고 또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나무의 가지 하나하나를 다 흔들어 보았다."

● 루터는 마귀를 영적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물질세계에서 감각하고 투쟁하였다. 루터가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 마귀가 방해를 해서 잉크병을 마귀에게 던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루터는 가톨릭교회를 향하여 불같은 비판을 뿜어냈지만 그는 가톨릭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하니라 개혁하고자 하였다. 1522년 루터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루터의 이름을 따서 종교개혁 운동과 교회를 칭하고자 하였으나 루터는 여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 모든 당파 이름을 지우고 우리를 다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이라고만 부릅시다. 나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주적 교회를 섬기기를 원합니다."


5. 루터의 주요저술

루터의 저서는 600페이지 이상의 방대한 책이 100권이 넘을 정도로 활발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큰 파급효과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저술활동과 인쇄를 통한 보급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루터의 저술들은 크게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쓴 책들과, 교회의 개혁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쓴 책이나 논문들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아래와 같다.

● 『시편강해』 :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을 강의한 것은 1513-15년 이었고, 넓은 여백이 있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였다. 루터는 그의 스승 요한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와는 달리 히브리어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시편을 주석했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이 『시편강해』를 “개혁자로서의 본격적인 첫 출항”(the first major voyage of the Reformer)이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루터의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 『로마서강해』 : 1515-16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이신칭의 교리를 확신한다. 중세교회의 공덕의 가르침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이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 『갈라디아서강해』 : 1516-17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

● 『히브리서강해』 : 1517-18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

● 『제2차 시편강해』 : 1518-21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

●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 : 1520년 8월,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 출판한 논문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부분에서 루터는 1천년 가까이 서방세계의 사회, 경제, 법조, 종교 사상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로마의 세 가지 담’, 즉 교황의 특권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논박한다. 둘째 부분에서 루터는 개선이 필요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27항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취급했다. 조국 독일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루터의 복음적인 조국애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논문은 독일 국민들을 감격시켰으며, 오늘날까지 독일 국민문학의 최고봉으로 자리하고 있다.

● 『교회의 바벨론 감금』 : 1520년 10월, 로마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반박한 논문이며, ‘바벨론 감금’이란 성례전의 왜곡된 가르침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면 성례전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논점에 따라 당시 교회의 7가지 성례 곧, 세례, 성찬, 참회, 안수례, 견신례, 결혼례 그리고 임종시의 도유식을 포함한 일곱 가지 중 두 가지, 곧 세례와 성찬을 진정한 성례전으로 분류 하였다.

● 『크리스천의 자유』 : 1520년 11월, 크리스천의 생활에 적용된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을 기술한 논문이며, 교회 내의 갈라진 틈을 메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신비주의 색체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많은 교황 지지자들에 의하여 좋게 평가되기도 했다.

● 『독일어 신약성서』 : 1521-22년 기사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바르트부르크에서 망명 생활 중 1522년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

● 『노예의지에 관하여』 : 1525년 출판된 논문이며, 루터는 이 논문에서 에라스무스를 공식 비판함으로써 인문주의와 결별

● 『대교리문답서』 : 1529년 교리를 쉽게 설명한 글

● 『사랑하는 독일 국민에게 권고함』 : 1531년 황제에 대한 저항권에 대해 설명

● 『독일어 구약성서』 : 1534년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


6. 원문발췌 : 『루터의 십자가 신학』

(알리스터 맥그레스, 컨콜디아사, 2001)

이 책은 옥스퍼드 신학대학 학장이며 루터 신학 전문가인 알리스터 맥그레스의 작품으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형성되어지는 과정과 십자가 신학의 내용을 전해준다. 루터의 작품들을 분석하여 신학의 변천과정을 유추하였고,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도 소개하고 있다.

루터의 신학 중 특히 비텐베르크 시절이 시작되는 1509년부터 엑크와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이 있었던 1519년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를 1부와 2부로 구분한다. 1부는 1509-14년까지 다양한 철학과 신학사조의 영향을 받았던 중세 후기 루터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형성배경이라 할 수 있겠다. 2부는 1514-19년까지 자신의 고유한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키는 신학적 전환기 혹은, 신학적 ‘혁파’시기의 루터를 기록하고 있다.


I. 배경 - 중세 후기 루터(1509-14)

● 중세 후기의 교회 내부에 교리 문제에 대한, 특히 칭의 교리에 대한 상당한 혼란이 있었으며, 이러한 혼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교육을 받지 못한 성직자들에 의해 악화되었다. 16세기 초에 만연해 있던 이러한 혼란들은 1509-19년에 루터의 신학적 사상들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p.22

● 칭의 교리는 펠라기안 논쟁 중에 있던 초기 서방교회 내부에서 주요 논쟁의 주제로 다루어졌다.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어거스틴은 칭의 문제에 관해 예비적인 해명을 수행하였으나 해석의 모호함을 남겼고, 이후 이런 모호함을 해결한 529년 오렌지의 제2차 종교회의는 칭의 교리를 취급한 가장 중요한 종교회의로 간주된다. 이후 루터의 사망 1년 전인 1545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칭의 교리를 다루기까지 천여 년의 시간동안 교회는 칭의 교리에 관해 침묵을 지켰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중세의 어느 신학자도 2차 오렌지 종교회의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조차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로 인해 중세의 신학자들은 칭의에 관한 자신들의 가르침의 근거를 카르타고 종교회의의 교리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중세 후기의 교회에는 칭의 교리에 관한 상당한 혼란이 있었으며, 이러한 혼란은 종교개혁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였다. pp.24-26

● 교회의 개혁과 영성의 회복, 이 두 가지는 교회의 상황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당시의 중요한 주제였으며, 1517년 10월 31일, 변방의 대학인 비텐베르크에 무명의 교수가 붙인 학문적 논의를 위한 95개 논조는 그러한 수많은 요구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학문적 논박을 위한 논제의 게시는 당시 독일의 대학에서 흔한 일이었으며, 루터보다 6개월 전 학장인 칼슈타트는 칭의교리에 관련된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151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95개 논조는 수년 동안에 걸쳐 누적되었던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이제껏 유럽에서 알려진 가장 커다란 지적, 영적 대 지각변동의 큰 불길이 점화되었다. pp.28-29

● 루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도 아니었고, 교회를 단번에 사로잡을 ‘참된 신학’을 이미 손에 쥔 채 비텐베르크에 당도한 신비롭고 고독한 운명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증거들은 루터의 신학적 통찰이 당시 루터가 공부했던 에어푸르트와 비텐베르크에 지배적이었던 인문주의와 새 길(via moderna)의 유명론, 그리고 그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어거스틴 수도회의 신학, 이 세 가지의 주요한 사상적 흐름의 영향 아래 비텐베르크에서 체류하던 오랜 기간에 걸쳐 생겨난 것임을 말해 준다. p.36

● 인문주의 운동이 넓게는 종교개혁의 신학적 발전에, 좁게는 특히 청년 루터의 신학적 발전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그 영향력은 루터의 신학적 발전의 본질 보다는 수단과 우선적으로 연관된다. 원어로 성서본문에 접근하지 않았다면, 그 원어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이 없었다면, 성 어거스틴에 접근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결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고, 라이프치히 논쟁 후 결정적인 시기 동안에 인문주의자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그 초기에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다. p.62

● 새 길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①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본래 가치가 없다. ②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 의해, 그리고 본래 가치 없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들을 칭의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공적에 따라 칭의를 가능케 한다. 즉 계약이라는 조건하에서 인간의 행위가 칭의를 가져온다고 생각한 반면, 그 행위의 본래적인 가치는 하찮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펠라기우스적으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길과 연관된 칭의 교리들은 종종 ‘펠라기우스적’ 혹은 ‘반(semi)펠라기우스적’ 이라고 낙인찍혀 왔는데, 그 이유는 새 길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칭의에 관한 모든 논의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죽음에 대한 언급 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pp.70-71


II. 혁파 - 루터의 전환기(1514-19)

● “내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다’는 말씀의 내적관계를 밤낮으로 생각하던 중에,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의’를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그러한 ‘의’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문장은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기록된 것처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를 지시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천국 그 자체에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 순간 이후, 내게는 성경 전체의 모습이 새로운 빛처럼 보였다.” p.106

● 하나님의 의, 또는 이와 유사한 개념들에 대한 루터의 이해는 본질적으로 새 길에 의한 이해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는 이러한 틀로부터 벗어나 결국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통해 ‘십자가 신학’이라는 그 자신만의 위치를 형성했다. 십자가 신학의 형성은 수년간에 걸쳐 일어났고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초기에 루터가 겪은 난제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 질문에 루터가 새로운 답을 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신학의 전체적 내용이 개정되어야만 했다. 결국 이것이 십자가의 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p.108

●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 어떻게 죄인 된 인간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루터 이전의 사람들을 괴롭혔던 질문이요, 또한 청년 루터가 그렇게도 관심을 가졌던 질문이다. 에어푸르트에서 루터는 유명론의 대가 오캄의 직계제자인 가브리엘 비엘을 스승으로 모셨고, 따라서 루터의 초기신학은 하나님의 의를 계약적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이들의 생각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후기신학에서는 점차 기독론적 해석을 통해 강조점과 본질에 있어서 새 길의 이해와 명확한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pp.112-116

● 루터는 갈라디아서 2:16 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 “칭의에 대한 경이로운 새 정의! 의는 보통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의’란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주는 미덕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다.” 1515-16년 루터가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이후로 의를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주는 미덕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이 시작되었다. pp.120-121

● 루터는 “믿음의 의, 그것으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했으며, 그가 말하는 믿음의 의는 3가지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①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의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서의 의 ②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유효한 의 ③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 자체로서의 의. pp.122-123

●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1515년 말엽에 새 길의 구원론과 완전히 결별한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활동적 은총의 개념을 채택하여 은총이 인간에게 주어질 때, 인간의 역할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했다. 믿음은 명백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죄의 포로로 잡혀 있어서 은총의 도움 없이 의를 행할 수 없다는 것과, 인간 스스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펠라기우스적인 것으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은총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의지는 의를 행할 어떠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 아래 놓여있다.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자유의지는 죄 아래 놓여있고 하나님을 따라 선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예의지’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옳다.” pp.140-141

● 루터는 육(caro)과 영(spiritus)을 각각 인간의 우월하고 열등한 능력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측면 아래 놓인 전(全) 인간에 대한 묘사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는 전인(全人), 즉 육과 영 모두와 관련이 있다. 비록 개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는다. 따라서 전인(全人)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 즉 내적으로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의롭다 칭함 받는 의는 인간에게 주어진 낯선 의(iustitia extra nos), 다시 말해 믿는 자들에게 속해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의(義)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낯선 의로 덮으시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외투로 롯을 감싸는 보아스나, 자신의 날개로 병아리들을 덮어주는 어미 닭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한다. 믿는 자들은 외부적으로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통해 의롭다 칭함 받지만, 내부적으로 죄인이며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있다. pp.144-145

●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특징 : ① 하나님은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계시된다. 십자가 신학은 사변적인 것에 예리하게 대립하여 서 있는 계시의 신학이다. ② 하나님은 바로 이 참된 계시 안에 숨어 계신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오직 믿음의 눈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므로 감추어져 있다. ③ 이 계시는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이나 피조 질서 안에서 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다. ④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 신학자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 나타난 그의 계시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⑤ 십자가 신학의 근본적인 의도는 단지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알려진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그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전에 그는 먼저 완전히 비하된다. 그리고 비하시키기도 하시고 의롭게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신학자는 그와 같은 고난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배로서 간주한다. pp.160-163

● 기독교인은 자신의 영적인 삶의 진보를 위하여 계속해서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되는 시험의 경험을 통해서 일어난다. p.186

●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연구가 세계대전 직후에 이루어졌다. 문명의 파괴와 유기 가운데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는가? 갈보리의 유기 사건에 숨겨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루터의 선언과 십자가에 버려진 그리스도에 대한 루터의 선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할 수 없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하나가 히틀러에 대항한 혐의로 처형당한 칼 괴르델러(Karl Goerdeler)이다. 그는 처형 직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잠 못 이루는 밤에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인간들의 개인적인 운명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아니하시는지를 묻곤 하였다. 그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여러 해 동안 피와 고난의 강을 허락하셨으며, 인간에게 일어난 태산 같은 공포와 절망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손가락도 까닥하지 않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고 고난 받도록 허락하셨다. 이것은 하나의 심판을 의미하는가? 시편기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하나님께 화가난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 그리스도시여,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pp.195-196


7. 루터의 영성과 한국교회

위키백과의 영성에 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이 낱말이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 따라 다음의 세 가지 것들을 의미한다. “① 궁극적 또는 비물질적 실재(實在, reality) ② 자신의 존재의 에센스(essence, 정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내적인 길(inner path) ③ 의거하여 살아야 할 준칙으로서의 가장 깊은 가치들과 의미들.” 명상이나 기도, 묵상 또는 관조(contemplation)를 포함한 영적 수행들(spiritual practices)은 각 개인 자신의 내적인 삶(inner life, 내적인 생명)을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한다. 이러한 영적 수행들은 바르게 수행되었을 때 그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경험들에 도달하게 한다고 여겨진다. ① 더 커다란 실재와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을 통해 더 커다란 자아(自我, self)에 이르는 것 ② 다른 사람들 또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 ③ 자연이나 우주(cosmos)와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 ④ 신성(神性)의 영역(divine realm)과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

이상의 정의를 종합해 보면, 영성이란 ‘궁극적이거나 비물질적 가치에 붙잡혀 살아가는 영적인 삶의 상태’를 말한다. 신학은 종이 위에서 구별되지만, 영성이란 삶의 정황 가운데 드러나는 특성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은 신학과 구분되어진다. 신학이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입장이다. 신에 관한 혹은 신적인 삶에 관한 굳건한 신념체계가 곧 신학이다. 그러나 영성은 입장이라기보다는 걷는 길이며,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생각이 표출되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이것이 신학과 영성의 불가분의 관계이다. 신학은 영성으로 살아져야 한다. 신학이 삶으로 표현되어 영성으로 열매 맺지 못할 때의 괴리감만큼 신학은 무용지물의 탁상공론이 된다.

루터만큼 신학과 영성이 조화를 이루는 인물 또한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루터의 신학은 곧 루터의 삶을 통해 루터의 영성과 만난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종교개혁 500돌을 맞아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루터에게서 믿음의 신비로움을 새로 배워야 한다.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며, 또한 정서적 동감도 아니다. 그것은 곧 삶이다. 루터의 개혁 이후 많은 현대 신자들은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 정도로 전락시켰고, 결국 20세기의 독일 신학자 본훼퍼(Dietrich Bonhoeffer)가 ‘값싼 은혜’라는 용어를 통해 현대 신자들의 피상적인 영성과 헌신을 지적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우리 한국의 교회의 모습은 마치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의 부패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드높다. 편만한 물량주의, 기복신앙, 대형교회 지향주의, 금전선거, 교권주의, 교회의 상속과 매매, 교파 및 교단의 분열과 무질서, 말씀과 영성이 배제된 흥행적 부흥회, 교회 안에서의 주도권 싸움 등의 현상을 바라보며 많은 걱정을 한다. 이러한 시대이기에 더욱 더 우리는 루터에게 돌아가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의로움의 샅바를 붙들고 얍복강의 씨름을 했던 루터를 다시 만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루터가 목 놓아 부르짖었던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믿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십자가의 은총으로 다시금 돌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나 교회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위임을 강조했다. 오직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던 루터의 신학은 말씀을 중시했던 루터의 삶으로 이어진다. 1520년 교황의 칙서는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이어진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루터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프레드릭은 자신의 기사단을 시켜 루터를 안전하게 대피하게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프레드릭은 자신에게 조차 루터의 은신처를 말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바르트부르크에서 기사로 위장하여 살아가던 루터의 마음은 어땠을까? 존재의 위기, 정체성의 혼돈, 과연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수없는 회의...그러나 그 시절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서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필생의 작업을 이룬다. 삶의 최대 위기 순간에 말씀을 붙들었던 루터이기에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외침은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밖에 보이는 교회를 개혁하기보다, 한 사람 자신을 개혁하기 원했던 루터의 진정성이 눈물겹다.

루터는 물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을 품고 해산의 고통을 겪어 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질 수 있는가?”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가?” 의에 관한 이러한 물음은 루터가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해답을 찾기 까지 쉼이 없었다. 결국 물음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간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리가 물음을 제단하고 가위질 하고 있지 않은가? 주어진 답에 의존하게 되면, 답을 주는 자의 권위에 또한 종속되어진다. 루터는 그러한 권위에 도전했고, 답을 따라 살아가던 이들의 가슴에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 물음은 중세의 새로운 사회 질서와 크리스천의 자유를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 자신을 계시 하신다’고 하며 ‘십자가 신학’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당시 교회의 신학을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올라가는 신학’, 즉 ‘영광의 신학’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신학 하는 방향과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실제 삶의 모습에 있어서도 두 신학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부유해진 교회와 삼중의 황금 관을 쓴 교황은 ‘영광’의 하나님을 추구하였지만, 죽음의 위협을 항상 용기로 맞서야 했던 루터의 삶의 자리는 ‘고난과 십자가’였다.

십자가 신학은 자만하고 승리감에 차 있으며 부유하고 교만한 교회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며, 그 교회에게 십자가의 뿌리를 환기 시킨다. 명백한 약함과 어리석음의 장면인 갈보리에서 전적으로 버려지신 유기의 장면은 세상과 교회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신학자의 패러다임이다. 교회가 절망감과 무력감을 인식하는 곳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계속되는 교회의 실존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한다. 교회의 매우 약함 안에 교회의 가장 강력한 능력이 놓여 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분명한 약함 뒤에 놓아두고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지혜를 명백한 어리석음 뒤에 놓아두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지금처럼 기독교회의 약함과 어리석음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신학이다.

물량주의적인 교회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도된 한국교회의 물줄기는 십자가 신학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루터의 신학과 영성이 한국교회에 참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시켜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참된 복음으로, 그리고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복음과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길을 기꺼이 걸어갈 것이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2012년 3월. 높은소리 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