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변증학 서론

예림의집 2016. 10. 30. 14:36


변증학 서론

변증학은 신학의 한 부분으로 주로 기독교 철학에 가까운 학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에게는 좀 어렵고 따분한 학문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신학이 그렇듯이 변증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진리를 수호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것이다. 목적이 이렇다고 하면 그 정의도 이 목적에 맞추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변증학을 이 목적에 부합하여 다시 정의하자면 ‘우리가 가진 바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진리를 변론하고 선포하며 그들의 불신을 지적하고 교만을 꺾는 학문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학을‘모든 영역에 성경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변증학 역시 성경을 적용하는 학문이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조직신학이나 교회사나 해석학과는 달리 철학을 더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을 적용하고 또 그리스도를 높이는 목적을 위해 있는 신학의 일부분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큰 차이는 없다. 단지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논리나 경험이나 역사 등을 통하여 성경을 검증하고 인정하지 않도록 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어떤 연구 대상으로 삼고 그것의 역사와 언어 구조와 내용을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을 부정히는 것 이 아니라 마치 이러한 인간의 학문적 작업을 통하여서만 성경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으로 잘못 인식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증학을 기독교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된 학문으로 보면서도 성경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변증학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학문이 성경에서 시작해야 한다. 비록 성경이 수학 공식이나 과학 원리나 경제 원리를 가르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실재 (reality)의 원천과 원리, 존재의 근원, 인간의 삶의 원리, 지식의 원리 등을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중력의 법칙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력이 질량(mass)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력을 논하기 전에 질량을 논해야 한다. 그런데 질량이 처음부터 어디서 왔는지 존재론적(ontological) 원천을 알아봐야 하고, 왜 중력이 일관성 있게 지구상에 나타나는지 그 특성에 관한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이유를 물어야하고, 인간이 어떻게 중력이라는 지식을 얻게 되었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epistemological) 물음을 물어야 하고, 내가 가진 중력에 관한 지식이 옳은 지식인가 하는 윤리적(ethical) 물음을 물어야 한다. 이러한 물음들은 과학 자체에서 발견할 수 없고 과학으로 답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보편적 원리와 구체적 현상들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계시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에 관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사실(fact)도 독립적으로 혼자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고 혼자 존재하는 것도 없다. 모든 사실들(facts)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어떻게 사실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고, 사실들이 어떻게 서로 구분되며, 그 사실들이 어떻게 존재하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와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가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단 신학만 아니라 실재(reality)의 모든 사실들을 바로 알려면 그 분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 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성경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학문적 작업, 예를 들어, 신학, 철학, 논리, 과학, 경험, 상식 등을 통하여 성경을 증명하고 설명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성경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고 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적 작업은 작업대로 독립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둘 다 맞고 또 어떤 변에서는 둘 다 틀리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의 작업을 통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라고 주어졌다. 천사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 한다면 인간의 지식적 혹은 경험적 채널을 통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또한 성경은 성경대로 내버려두고 신비적인 방법 혹은 영적인 방법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라고 주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의 작업이 개입되어야 성경의 가치가 주어지고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채널을 통하여 이해되고 적용되는 성경이라고 해서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이 성경보다 우선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이다. 인간의 한정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 반드시 모든 실재의 사실들이 보편적 원리들과 연결 되어야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에 칫솔에 치약을 짜 이를 닦는 한 사건이 있다고 하자. 이 사건 혹은 이 사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치약 튜브를 짜면 일률적으로 항상 치약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나의 손가락의 압력으로 치약이 나온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어떤 일률적인 원리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자연의 일률성(the uniformity of nature)이다. 그리고 자연의 일률성을 제공하신 분이 바로 창조주이시면 그 창조주를 아는 길이 바로 그의 계시인 성경이다.

자연의 일률성만 아니라 도덕적 절대성(the moral absolute), 논리의 법칙(the law of logic), 합리성(rationality), 인간 존엄성(dignity), 통일성(coherence), 개체화(individuation) 등의 보편적 원리가 있어야 주어진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보편적 원리들은 개체적인 사실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실들(facts)이 알아서 보편적 원리도 만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아니다. 또한 원래부터 보편적 원리들이 있던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있다는 것은 어떤 우연성(contingency)을 의미하는데 우연성과 보편적 원리들은 부합되지 않는다. 보편적 원리는 자연의 일률성처럼 어떤 질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발생했다는 것은 질서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편적 원리 혹은 질서는 어떻게 생겼을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럼 이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그의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해는 하나님의 계시를 준거점으로 삼아야한다 물론 기독교 변증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 경험, 논리, 증거, 직관 등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것들의 궁극적 근거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의미 있고 이치에 맞도록(making a sense)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반계시 및 특별계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할 때 하나님의 계시, 특별히 성경을 단지 참고 서적이나 경전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경험 등을 가능하게 하고 이치에 맞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유일한 근거로 삼아야 한다. 변증한다는 자체도 무의미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심지어 불신자가 기독교 진리를 거역하며 대항하는 것도 사실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 하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왜나면 불신자의 논리나 이성의 활동 역시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나 이성적 활동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부정적인 사실들이라도 어떤 근거로 불신자들은 그 사실들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한 근거와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의 계시 는 거기도 미치고 스올(음부)에 우리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는 거기에도 미친다(시 139:8 참조).

이렇듯이 기독교 변증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야 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서의 제목을 『계시와 변증』이라고 잡았다. 본론에 들어가서는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있어서 왜 하나님의 계시가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근거가 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본서는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적(presupposi tional) 변증학을 해설하며 발전시키며 적용하는 데 그 몫을 다할 것이다. 전제주의적 변증학이야말로 가장 개혁주의적이며 성경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전개될 것이다. 단지 기독교 진리가 다른 진리보다 좀 더 좋고 좀 더 확실하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진리가 100% 확실하고 참되며 다른 대안은 없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것은 독단이나 독선이 아니다. 진리는 1%도 타협되어서는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가 진리로서의 역할을 해야 모두가 살 수 있다. 진리 없이는 상생(相生)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제주의적 변증학의 핵심적 내용을 전반부에서 다루고 후반부에 서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여러 철학들과 세계관들(worldviews)을 전제주의 입장에서 비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