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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예림의집 2014. 10. 13. 17:5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시간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954년 노벨문학상을 탔던 미국의 작가 E.헤밍웨이(1899∼1961)가 쓴 중편소설 "노인과 바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노인은 능숙한 어부였지만 그는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석 달이 가까운 애타는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85일 째 그토록 갈망하던 고래 같은 큰 고기를 천신만고 끝에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노인은 그 고기를 배에 묶고 의기양양하게 항구를 향하지만 불행하게도 상어 떼를 만나 항구로 돌아왔을 땐 노인에게 남긴 것은 앙상한 고기 뼈와 마음의 상처밖에는 없었습니다.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사는 우리 인생들이다.’ 여러분, 인생살이 만족하십니까? 우리가 갈망할 것은 세상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면 그는 마지막은 이 노인과 같은 허탈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진정한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하셨습니다. 배부를 것이라는 것은 만족할 것이라. 영혼의 만족은 물론 삶의 만족까지를 포함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 만족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의를 갈망하세요. 사람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배고픔과 갈증입니다. 사흘 굶기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목마름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 심정으로 의를 갈망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의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원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합니다. 이 “의”는 신적 본질의 속성이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기도 하고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도 합니다(롬1:16). 인간의 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의가 믿음으로 우리에게 와진다는 점에서 이 주님의 의를 믿는 믿음을 주리고 목마를 만큼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리고 목마름이란 고통의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를 온전히 믿음으로 입지 않으면 난 살 수 없다는 갈급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를 갈망해야 할까요?


1.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시는 그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이 양심의 화평을 누리는 칭의의 생활화를 갈망해야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양심의 정죄감이 너무나도 강하여 진실로 갈망하고 담대히 적용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신득의 교리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양심의 정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믿는 것도 죄에서 구원 받은 것도 아닙니다. 믿기를 원하지만 말고 믿어 양심의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 양심의 정죄 때문에 얼마나 우리 심령이 죽습니까? 그 죽음을 피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에 서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열 번째 죽음의 재앙이 애굽 전역에 임했을 때 문설주와 문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안에 거함으로 죽음의 재앙을 면했듯이 나의 죄를 책임지신 보혈의 공로를 믿고 사죄의 확신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 심령은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이지만 죄 없다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칭의라고 하는데 의인(義認)이라고도 합니다. 의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칭의란 무죄선고를 넘어선 의인선고입니다. 즉 본질상은 아직도 죄인이지만 예수께서 내 죄를 십자가에서 사해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4:5-8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신자를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더라도 애통하는 맘은 되지만 정죄감은 안 됩니다. 죄를 고백한 후에야 보혈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세요. 늘 강조했듯이 성도는 회개하기 전에도 보혈입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서 영원히 의롭다 하신 이 전천후 칭의의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생활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전천후 칭의 확신 아니면 답이 없어요. 그러므로 답은 이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복음의 의에 바로 서는 믿음을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주가 물러갑니다. 우리가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양심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당당히 누릴 자로 확신하며 나아갈 때 저주는 물러가고 진정한 만족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2.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의를 덧입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롬6:1-3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앞에서 칭의를 말하더니 이제는 성결과 성화를 말합니다. 성결과 성화도 내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라. 즉 성도는 죄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혔고, 못 박혔을 분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런 새사람으로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나 성화를 신학적으로는 구별은 하나 구분은 하지 않습니다. 성결과 성화 영화 승리 모두 믿음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서 죄악이 꿈틀거리고 삶에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그래도 나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고 믿는 믿음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이 진리를 말하면서 13절에 당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아래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물이 되어 늘 겸손과 경외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로 복음을 실상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시제는 복음 안에서는 이미이지만 믿음 안에서는 이제 시작이거나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공로로 새롭게 하면 심령에 행복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시5:12에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와 온전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죄를 버리는데서 옵니다. 각인의 삶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유혹이 오고 시험이 와도 엎드려 또 엎드리며 복음에 서고 또 그 복음에 서서 감사함으로 승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빛의 자녀로 살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엡5:8-10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갈망해야 할 세 번째 의입니다.


입는 의도 중요하지만 의의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칭의와 성화의 원리를 차례로 말한 다음에 12장부터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절)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직분에도 충성하고 은사에도 충실하고 교회에도 충성하고 사회에도 본이 되고 나라에도 충성하고 영혼 전도에도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삶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고훈 목사의 글에서 보면 도시의 중심가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어느 집사님이 새해를 맞아 결단하고 30여 년 동안 열어왔던 식당에 처음으로 ‘주일은 쉽니다.’란 표지를 내걸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긴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종업원 10명을 교회에 등록시켰습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그날 근무하는 것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종업원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그렇게 한 것은 강단에서 주일성수의 메시지가 가슴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믿는 것도 중요하다. 둘째는, 주일날 문을 닫으면 안 믿는 사람이 장사가 잘되니 이 또한 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 어찌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들도 말씀과 성령 안에서 늘 은혜를 받아 성경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말씀 한 말씀 더 순종할 때마다 그 순종함에 따르는 은혜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늘 순종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하면 우리는 종교라는 또 하나의 짐을 져야 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모셔들이므로 그 의를 힘입어 더욱 고도의 성결함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주님의 의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살 수 없다는 갈급한 심정으로 믿음 안에서 칭의 성결 성화 영화에 이르러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가장 배부르고 만족한 복된 삶을 이루어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