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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예림의집 2014. 10. 13. 17:50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시간에는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으로 말한다면 우리 인간만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심을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런 용어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파격적인 은혜”, 파격(破格)이란 일정한 관례나 격식을 과감히 깨뜨리는 것을 파격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이 땅에 내려 보내셔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에서부터 그 파격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그 은혜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입니까?


그러나 이 은혜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은혜를 받은 수혜자로서 양심에 위배되지 않게 최소한 내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을 복은 무엇입니까?


1. 파격적인 용서를 누립니다.


엡2:4-5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를 죄에서 살려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파격적인 용서를 바라바에게서 봅니다. 예수님 대신에 놓임을 받은 바라바라는 죄수, 폭동의 주모자요 살인자인 바라바, 제일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죄인이었지만 구주를 잘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대신에 놓임을 받았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이야기도 그 파격성을 보여줍니다. 일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는 빚을 빌기에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바이고 우리가 바로 탕감 받은 빚진 자란 사실입니다.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최소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비난 받아 마땅한 극히 비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6:15에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는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바꾸면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파격적인 용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혹시 기도해도 심령이 막혀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보혈의 복음에 섰지만 여전히 그렇다면 용서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용서하지 못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큰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파격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롬9:15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긍휼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버리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야기입니다.


롬9:13에도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불공평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 이야기가 바로 선택적 사랑입니다. 마치 농부가 모종을 심을 때 자기 원하는 대로 심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우리가 의롭거나 공로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파격적인 사랑을 긍휼이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긍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사 중 가장 많이 쓰인 말은 [라하밈]인데 이는 주로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형이 동생에 대하여 가지는 혈육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103:13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이것이 긍휼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항상 파격적입니다.


불란서 혁명 때의 일입니다. 어느 무더운 날 여학생 셋이 길을 가다가 다리에 상처를 입은 젊은이들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때 두 여학생은 못 들은 체하며 지나갔으나 한 학생은 구급약을 구해 와서는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후 두 달이 지난 한밤중에 어떤 젊은이가 기숙사에 달려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데리고 어딘가 사라졌는데 얼마 후 기숙사에 일어난 난동으로 모든 학생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이 누구였을까요? 이건 누구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천사인지 잠시 천사로 쓰임 받은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 청년이 바로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입고 싶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성령의 사랑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요일4:11-13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3. 파격적인 도우심을 받습니다.


시41:1-3에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면 병도 고쳐주십니다.


히스기야를 아시지요. 유다의 제 13대 왕,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흑생종과 같은 암인데 등에 생겨나 낫지 않는 것입니다. 흑색종은 칼을 대면 전신으로 퍼지기 때문에 손도 댈 수 없습니다.


왕하 20장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아에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저의 오랜 목회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힌트 주시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통곡했습니다. 낯을 벽으로 향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 대해 칼빈은 “불신자처럼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인내로 이겨내기 위해서”라고 했고, 로빈슨은 “자신의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기 위해서”, 그레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께만 향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세로 이어지는 기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노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하나님만은 아시리라고 믿는 쌓아놓은 진실함을 하나님과만 대면하여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약을 가르쳐 주셔서 무화과를 종처에 붙인지 사흘 만에 완전히 녹아 낫게 하시고 그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셨습니다. 긍휼은 죽을 자도 살립니다.


빌 2장에도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죽을병에서 구원해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27절).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질병만이 아닙니다. 물질도 그렇습니다. 잠11:25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구제하는 자에게 풍족함을 주십니다. 훈련 차원에서라도 우리 성도는 그냥은 안 됩니다. 성경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4. 긍휼은 심판도 이깁니다.


약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했습니다. 심판이란 법에 의한 처단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한 치의 예외도 없습니다. 그런데 긍휼은 그 심판도 이긴답니다.


마5:26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세상법도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말세에 사는 길은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6,25때 인민공화국 군 단위 세포위원장을 지낸 노인이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어떻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느냐는 말에 자기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계속 살리는 일만 했더니 전쟁이 끝나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L.A 폭동 시에 멀쩡한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평상시에 흑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던 어느 집사님 댁이었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고 살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웃들로부터 무자비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말했습니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들을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이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다"(욥29:12-16). 이런 긍휼의 사람을 어찌 버리시겠습니까? 그랬기에 욥은 그 고난 속에서 깨끗하게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일본 동경에서는 노인의 30%가 죽을 때 혼자 죽는다고 합니다. 장례 준비가 전혀 없이 혼자 죽는 분들은 장례식을 못 치르고 바로 화장에 들어갑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혼자 죽는 노인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더욱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긍휼을 원한다면 긍휼을 베풀면서 긍휼을 구하십시다. 병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교회에 좋은 시설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영혼 구원이 급선무이지만 우리가 그 육신을 돌보면서 기도하고 전도하면 그들은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긍휼을 더 원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긍휼을 입는 길이기도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크게 받는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