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선교의 기원은 교회도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어떤 특정 그룹도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께 기원을 둔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시기 위해 변방(장애)을 가로질러 오신 선교사이다(성육신). 순수하게 영이신 분이 물질 세계를 말씀과 영으로 만드신 사건도 선교로 볼 수 있다. 아들이 성육신 하심도 선교이고 오순절에 성령의 오심도 선교이다. 그렇게 볼 때 선교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선교를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는 것보다 교회의 일로 보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바네크(Warneck)는 그의 “복음적 선교학”(Evangelishe Missionslehre)에서 선교가 삼위 하나님에 근거됨을 언급하였다. Karl Hartenstein은 1933년에 이 사상을 더 충분히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 결과는 빌링겐 선교대회에 반영되었다. 1952년 빌링겐에서 있었던 그 선교 대회를 선교적 대 전환점으로 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회를 선교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한다. 종래의 선교 개념은 교회 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선교를 인간의 일로 여기는 듯한 경향이 있었다. 선교사를 ‘우리 선교사’라는 말은 그러한 사상을 반영한 좋은 예이다.
빌링겐 회의의 보고서에서는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 보고서의 글귀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선교 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근거를 가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교의 체계적 정립은 그 대회 이후 George Vicedom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책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 책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은 선교에 있어서 ‘행동하는 주체’(Acting Subject)라는 것이다. Vicedom은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란, 우선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이시고 위임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소유자이시고,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는 선교의 주역(das handelnde Subject)이시다” (George Vicedom, 하나님의 선교, 박근원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16).
그는 선교신학을 하나님, 즉 삼위일체 주님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한다. 그는 선교가 하나님의 내적 근본 질서에 근거된 것으로 말한다. 신의 내적 근본 질서가 파송의 과정으로서 선교의 근거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그 목적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간들에게 그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은사들을 전해줌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교의 목표인데 그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이유 인즉, 그 나라는 현세적인 형태일 수 없고, 실현될 것을 바라는 희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견지 할 것을 강조한다. 미래는 구속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단순히 미래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과거에 이룩한 구속 사업을 중시하는 가운데 미래를 바라야 할 것을 말한다. 그것에 대해 Vicedom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곳에 있고 이 완료 시제에 근거하여 미래에 도래할 것이다”라는 말로서 불신자에게 선포될 수 있다“(Ibid p50).
여기서 우리는 찬란한 과거를 현재에 재현시키고 이상적인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려는 비세돔의 사상을 본다. 즉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 포개어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이다. 그것은 말세만을 대망함으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사상을 배격하고, 현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끔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already)라는 근거 위에 ‘아직 아니’(not yet)로 나아가야 할 것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선교를 관찰할 때 종래의 선교 이해와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사상이 말하는 선교 철학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 다른 점을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것은 종래의 선교 목표인 ‘교회 세우는 일’(implantioecclesiae)의 약화를 뜻한다. 종래의 선교관은 교회가 없는 지역에 가견적인 제도적 교회를 많이 심는 일, 즉 교회 확장이 선교의 목표였다. 그로써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타자를 위한 존재’(Church for others)로 봄으로 교회의 중요성은 교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함에 있다고 본다. 그 이론적 근거는 삼위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그 바깥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나 바뀌어졌다. 즉, 종래의 ‘하나님---> 교회---> 세계’라는 구원 사역의 차서는 ‘하나님---> 세계---> 교회’라는 차서로 바뀌었다. 교회는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의 역사하시는 징표에 민감하여 그의 일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둔다. John Tayor와 Johannes Aagaard에 의하여 발전된 하나님의 선교 사상은 하나님의 선교를 삼위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의 선교(missions)이어야 함을 말하였다. 즉, 도시, 농촌, 학생, 특수 그룹 등, 인간의 일에 관심과 참여를 강조한다. 나병, 말라리아, 무지와 약함, 그리고 가난을 위한 치병과 도우는 일은 모두 선교이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선교사들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God acts in history)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세속 역사의 일치 병행은 불가하다. 즉, 전자는 후자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 방해 요소는 사단의 세력 등이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은 심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로서, 그리고 해방자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카톨릭의 해방 신학자 Gustav Gutirrez는 ‘행동 신학’(Doing Theology)을 가지고 상황에서의 정의 실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출애굽은 해방의 원형이고 선지자나 예수님은 정의 실현자로 규정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하여 모든 내용을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 메시아의 행동,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행동만 강조한 나머지 선교적인 선포가 약화 될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서의 구원 행위는 사회적 일로만 하려 들면 불가능하다. 역사상 참 구원의 역사는 무엇이든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된다. 포도나무이신 그와 연결되지 않는 구원의 추수는 불가능하다. 만약 예수없이 행하는 복지 사업, 해방 운동, 공의 운동 등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참 포도나무되신 주의 성령의 인도 없이 행하는 것은 참 구원의 사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 구원의 사업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계획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하여 새 하늘을 창조함이 그의 목적인 것이다(계 21:1). 주님은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셨다. 그런 고로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희망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화해의 사역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세계적인 평화와 공의는 그 실현이 요원하다. 그것의 최종 목표는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그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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