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구약신학의 시작과 발전
이 장에서 우리는 성경신학과 구약신하그이 주된 흐름을, 그 시작으로부터 1차대전 후에 일어난 구약신학의 부흥에 이르기까지 개관하려고 한다. 이 역사적인 개관을 통해 우리는 구약신학의 범위, 목적, 성격과 기능에 대한 최근의 논쟁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려고 한다. 구약신학은 성경신학의 일부이므로 전자는 후자를 떠나서 연구될 수 없다.
1. 종교개혁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스콜라 신학과 교회 전통에 대항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투구호가 된 개신교의 성경 해석원리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와 함께 후대 성경신학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후대 사람들이 이해한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성경신학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이 시대에는 “성경신학”이란 용어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신학을 가리키거나, 혹은 ②성경 자체가 담고 있는 신학을 가리킬 수 있다. 후자의 의미로 볼 때, 그것은 구체적인 한 신학의 분야이므로, 우리는 그 기원과 발전을 간략하게 서술하려고 한다.
루터의 두 해석 원리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was Christum treibet)”은 “문자와 영”의 이분법과 함께 성경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저해요소가 되었다. 급진적인 개혁자들 중 후대의 성경신학과 유사한 방법을 발전시킨 사람은 1530년대 초기의 인물인 클레이트와 피셔였다.
종교개혁으로부터 약 백년이 지난 후 비로소 “성경신학”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크리스만의 작품 『독일 성경신학』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디스트의 작품 『성경신학』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안에는 새로 시작된 분야의 성격에 대한 가장 초기의 통찰이 나타난다. “성경신학”이란 초기 개신교 정통의 전통적인 “교리 체계”를 지지하기 위해 두 성경에서 무차별하게 “증빙 자료(proof-texts)”를 찾는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교의학의 시녀로서 “성경신학”의 역할은 개신교 정통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칼로비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이전에 주경신학(theologia exegetica)으로 부르던 것을 성경신학에 적용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dica probantia로 불려지고 후에 collegia biblica로 명명된 성경적 “증빙 자료”는 교의학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칼로비우스가 성경신학을 개신교 정통 교리를 지지하는 보충적인 분야로 만든 것은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정통 교의학의 보충적인 분야로서 성경신학은 슈미트, 휼세만, 마이우스, 바이어 그리고 바이즈만의 성경신학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킨 독일 경건주의는 성경신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경건주의에서 성경신학은 메마른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경건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스페너는 “성경신학”으로 개신교의 스콜라주의를 반대하였다. 경건주의의 영향은 “성경신학”으로 정통의 교리 체계를 반대하는 헤이만, 도이치만, 바이드너의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
1745년에는 “성경신학”이 교의신학(조직신학)으로부터 명백하게 분리되었고, 전자는 후자의 기초로서 인식되었다. 이것은 성경신학이 교의학의 시녀 역할을 하는 데서 벗어난 것을 뜻한다. 이 새로운 발전 속에는 성경신학이 교의학이 경쟁자가 되어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분야가 될 수 잇다는 가능성이 내재되었다. 이 가능성은 계몽주의 시대에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실현되었다.
2. 계몽주의 시대(1700-800)
계몽주의(Aufklaerung)시대에는 성경 연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 몇 가지 영향에 의해 발전되었다. 첫째로, 그 어떤 형태의 초자연주의도 반대하는 합리주의의 반발을 들 수 있다. 인간 이성은 지식의 최종적인 기준이요 궁극적인 원천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무오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는 성경의 권위는 부인되었다. 둘째로, 새로운 해석법인 역사비평학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자유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셋째로, 비터와 아스트룩에 의해 성경에 적용된 과격한 문학비평을 들 수 있다. 끝으로, 합리주의는 그 본성상 성경의 영감에 대한 정통적 입장을 부인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성경은 다른 고대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지고, 다른 고대 문서를 연구하는 것처럼 연구되었다.
부분적으로 경건주의의 자극과 또 합리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은 뷰싱의 작품(1756-58)에는 처음으로 “성경신학”이 교의학의 경쟁자로 나타난다. 그는 “스콜라적 신학”이라고 불리는 개신교 교의학을 공허한 추측과 생명없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에벨링은 “단지 교의신학의 시녀 역할을 하던 것으로부터, 이제 성경신학은 지배적인 교의학의 경쟁자가 되었다”고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해석학의 혁명”에서 주된 촉매 역할을 한 사람은 합리주의자 세믈러로서 그는 네 권으로 된 그의 작품 『자유로운 성경 연구를 위한 논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영감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포하며 성경은 순전히 역사적인 문서로서 다른 문서들처럼 순수하게 역사적이고 따라서 비평적인 방법론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성경신학은 전통적인 교의학과 대치되는 역사적 연구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성경신학을 교의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자카리애가 쓴 네 권의 성경신학 책(1771-75)이다. 교의학과 해석학에 대한 새로운 학풍의 영향을 받고 그는 세심한 주석에 근거한 신학적 가르침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성경 각 권은 자체의 시간과 장소와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자카리애는 성경의 영감을 믿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성경적-주석적 방법을 가르쳐준 어네스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인 주석과 정경적인 성경 이해는 자카리애의 사상에서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측면의 중요성은 신학에 있어서 이차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따르면, 두 성경을 구별할 필요성이 없어지며 그 둘은 서로 상호 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카리애의 관심은 여전히 그가 그렇게도 불순물을 제거하고자 했던 교의적 체계에 있다.
후프나겔과 합리주의자 폰 암몬의 작품은 그 구조와 구성에 있어서 자카리애의 것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후프나겔의 성경신학은 “교의학을 지지하는 성경적인 증빙 자료를 역사비평학적 방법으로 모으는 것”이었다. 폰 암몬은 세믈러와 철학자 레싱과 칸트의 사상을 가지고 보다 “철학적인 신학”을 실제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구약성경보다 신약성경을 더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로부터 약 4년 후에 바우어에게서 이루어질 독자적인 구약신학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새로운 사상의 기수로 합리주의자였던 개블러는 성경신학에 대해 쓴 적도 없고 쓰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1787년 3월 30일에 한 그의 취임연설을 통해 새 방법론의 발전에 가장 결정적이고 항구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해는 성경신학이 교의신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순수하게 역사적인 분야로서 자리를 굳히는 이정표를 마든 해였다. 개블러가 다듬은 그 유명한 성경신학에 대한 정의를 보라.
성경신학은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거룩한 저자들이 거룩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 바를 전해 준다. 이와 반대로 교의신학은 교훈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특정한 신학자가 자신의 능력, 시간, 시대, 장소, 교단 혹은 학파와 다른 유사한 요건들을 따라 거룩한 것에 대해 철학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신학에 대한 개블러의 귀납적이고, 역사적이며, 서술적인 접근은 세 가지 중요한 방법론적 고찰에 근거하고 있다.
①영감은 배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성자의 이해력과 자연적 통찰을 결코 파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신적 권위”가 아니라 “그들(성경 저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②성경신학은 성경 저자 개인의 개념과 사상을 조심스럽게 모으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지 한 사람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저자들의 견해는 성경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모아야만 하며, 잘 배열하고, 일반적인 개념에 바로 연결시키며, 서로 조심스럽게 비교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제를 문학비평, 역사비평, 철학비평의 도움으로 일관성있게 역사비평학적 방법론을 적용함으로 이룰 수 있다.
③역사적 학문으로서 성경신학은 그 정의상 “옛 종교와 새 종교의 여러 시대를 구분해야만” 한다. 성경 신학자는 어떤 사상이 기독교 교리에 중요한가, 즉 어떤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며” 또 어떤 것이 “우리 시대에 불필요한가”를 찾아내어야 한다.
비록 성경신학을 위한 개블러의 구상이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짜임새 있는 선언은 성경(구약과 신약)신학의 미래에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엄격하게 역사적인 성경신학을 세우겠다는 목표는 아이크혼의 제자였던 바우어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바우어는 『구약신학』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처음으로 구약신학 책을 출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결과야 어떻든 바우어는 성경신학을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분리한 사람이다. 그의 구약신학은 ①신론, ②인간론, ③기독론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비평적 합리주의자”로서 바우어는 합리주의가 강조하는 역사적 이성의 지지를 받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성경(구약과 신약)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성경의 다양한 증거를 역사비평학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특히 오늘날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두 성경 사이의 관계 문제를 제기하였다. 더구나 개블러와 그 후 바우어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해 열렬하게 지지된 순수한 역사적 분야로서 성경신학의 성격은, 서술적 작업 성격에 대한 질문에서와 같이, 오늘날의 논쟁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블러와 바우어는 성경신학과 구약신학을 독립적 분야로 세운 창시자들이다.
3. 계몽주의로부터 변증법적 신학까지
우리는 앞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성경신학이 교의학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데서 벗어나 그 경쟁자로 부각되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 새로운 역사적 방법론은 여러 철학적 체계에 굴복하고 또 지배를 당하며 그 후 보수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도전을 받고 결국 “종교사 학파(Religionsgeschichte)”의 방법으로 사라져 갔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약 수십 년간 변증법적 신학이 활개를 칠 때 성경신학은 다시 새 힘을 얻었다.
19세기 초에는 몇 개의 중요한 작품들이 나왔다. 카이저는 1813년부터 1821년 사이에 성경신학에 대해 세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합리주의적 방법론을 따르면서, 초자연주의는 어떤 형태든지 거부하였고 구약 종교의 역사적-유전적 발전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는 “종교 역사”의 방법론을 처음으로 적용한 자이며, 모든 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측면들을 “보편적 종교(universal religion)”의 원칙 아래 종속시켰다.
개블러의 제자인 드 베테의 『성서 교의학』은 합리주의를 떠나는 운동의 첫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는 프리즈를 통해 소개받은 칸트 철학을 받아들여, 성경신학을 철학의 체계와 연결시킨 최초의 성경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믿음과 감정을 높은 차원에서 종합하여, 히브리 사상으로부터 유대 사상을 거쳐 기독교로의 “유전적 발전(genetic development)”을 찾아 내었다.
중도적인 합리주의자 폰 쾰른이 1836년 출판한 두 권의 작품은 그 전반부에서 구약의 성경신학을 다루고 있다. 그는 드 베테가 철학을 성경신학 안에 가져온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폰 쾰른은 신정정치의 시각 속에서 역사적 성경신학을 제시한다. 그는 이전의 학자들처럼 배타주의(particularism)와 보편주의(universalism)의 갈등 구조를 따라, 히브리 사상-유대주의-기독교의 역사적인 발전 사상을 끄집어 내고 있다.
바르케는 “성경신학의 합리주의 시대가 한때는 필요했으나 이제는 퇴색된 것”으로 본다. 그는 그의 책, 『성경신학: 구약성경의 종교』에서 헤겔 철학의 정(자연 종교), 반(영적 종교=히브리 종교), 그리고 합(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종교=기독교)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자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구약성경의 자료를 배열할 때 그 체계는 성경에서 끄집어낸 범주를 따라 만들 것이 아니라 밖에서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구약성경의 “독자적 전체성(independent totality, 즉 구약은 신약과 상관 없이도 독자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에 관한 “종교사적 접근”을 시도하엿으며, 그는 그의 선생 바트케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19세기 중엽에 강력한 보수주의 반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구약신학에 대한 합리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을 반박하며, 역사비평학적 방법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신적 계시를 믿으며 온건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는 자들이었다. 헹스턴버그는 그의 책, 『구약성경의 기독론』에서 역사비평학적 방법론이 부당하다고 말하면서, 두 성경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았다.
구약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받아들이면서 보다 온건하게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 사람은, 작고한 후에 구약신학을 출판한 스토이델과 헤이버닉, 그리고 욀러 였다. 스토이델은 문법적-역사적 방법을 강조하고 파괴적인 역사비평적 방법을 거부하였다. 그는 구약성경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였으나 협소한 의미에서의 “문자적 영감(축자영감)”관은 반박하였다. 그는 헤겔 학파의 주관성에 대해 강하게 바판하였으나 자신을 “합리적인 초자연주의자”로 분류하였다. 그는 구약신학의 구조를 교의학의 신론-인간론-구원론의 체계를 따라 구성하였다. 헤이버닉은 구약 종교가 “원시 종교-율법-선지자들”의 형태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믿었으며 신론-인간론-구원론의 체계를 따랐다. 이와 동시에 그는 두 성경을 구별하며 교의학적 정통주의의 원리를 희석시키려고 하였다.
욀러는 가장 깊고 지속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는 개블러 이후 구약신학을 성경신학으로 이해하는 이론과 방법을 방대하게 다룬 책을 출판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의 대작 『구약신학』은 불어와 영어로 나왔다. 욀러는 일면 슐라이어마허가 소개한 바와 같이 구약성경을 낮게 평가하는 마르시온적 성향을 비판하고, 또한 헹스텐버그가 주장하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전적인 동일성(total uniformity)을 비판하였다. 그래도 자신은 두 성경의 통일성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다고 믿었다. 욀러는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을 구분하였으나 구약신학은 더 큰 정경적 맥락 속에서 올바른 기능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구약신학이란 “문법적-역사적 주석에 근거한 역사적 학문으로, 성경 문헌의 내용을 그 글이 원래 쓰여진 역사적 상황과 저자의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언어의 법칙을 따라 새로 다듬어 내는 작업이다.” 성경신학은 “역사적-유전적” 방법을 따리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적-유전적” 방법이란 역사적-비평적인 주석이 아닌, 문법적-역사적 주석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신학은 이 방법을 따라 구약 종교의 “우기적인 발전 과정”을 다루어 주어야 한다. 욀러의 구약신학을 “19세기의 성경신학 중 구원사적으로 접근한 빼어난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신학은 헤겔이 영향을 받아 “자료를 유전적으로 다루려고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완전히 케케묵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보수주의자들 중 멘켄, 벡, 그리고 특히 폰 호프만 같은 신학자들은 “구원사 학파”에 심취하였다. 19세기의 “구원사 학파”는 ①“말씀에 표현된” 하나님 백성의 역사, ②성경의 영감 사상, 그리고 ③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역사의 (예비적)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 가지 명제에 근거하고 있었다. 폰 호프만은 성경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일직선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역사의 능동적인 주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그의 뜻과 목표는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사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목적이며 구원사는 그 목적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에 구약성경은 구원사적인 선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신학은 이 점을 드러내어야 한다. 성경 각 권을 구원 역사의 뼈대 속에서 각각 논리적인 자리를 갖고 있다. 성경은 교리를 입증하는 증빙 자료집이나 교리의 저장소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성취에 이를 때 완성될 하나님이 행동을 역사 속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의 발전에 미친 “구원사 학파”의 영향은 상당한 것으로서, 오늘날에 와서는 상당히 변했고 새로운 형태로 주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구약신학에 사실상 치명타를 가한 “종교사 학파” 때문에 구약신학이 그 빛을 잃어가기 직전에, 에발트의 기념비적인 대작이 네 권으로 출판되었다. 에발트의 보수적인 작품은 독일 학자들로 하여금 거의 한 세대에 걸쳐 벨하우젠에 의해 유행된 이스라엘 종교의 현대주의적 재구성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영향을 미쳤다. 에발트의 제자였던 힛지히와 딜만은 그들의 사후에 출판된 구약신학을 썼다. 에발트는 자신의 주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을 옹호하였고 힛지히는 “사상사”를, 딜만은 “계시사”를 썼다. 이들은 모두 구원사적 시각을 강조하였다.
1878년은 벨하우젠이 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서문』이 출판된 해로서, 구약신학에 대한 “종교사적(Religionsgeschichte)” 접근이 승리를 거두기 시작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구약(그리고 성경)신학은 ①그라프와 쿠에넨에 의해 제안되고 벨하우젠에 의해 인기를 끌게 된 오경 비평에서 P문서의 후대성과, ②그라프-쿠에넨-벨하우젠 학파가 구약의 자료들에 대해 새로 부여한 연대에 기초하여 재구성된 이스라엘 종교 역사가 보여주는 완전히 새로운 도구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종교사 학파”의 또 다른 특징은 진화론적인 발전을 역사적-유전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에 있었다. 이 새 학파는 “진화의 원리에서 역사의 모든 비밀을 푸는 주술적인 열쇠를 찾는 헤겔과 다윈의 사상을 따르던” 그 당시의 지적인 기류를 타고 있었다. 구약신학이란 칭호는 이 새 시대에 카이져, 슐츠, 피펜브링, 데이빗슨, 그리고 스타데가 사용(혹은 오용)했으며, 스멘드는 보다 더 정확하게 사용하였다.
약 40년간 구약신학은 종교사학적 접근에 의해 그 빛을 잃었다. 종교사 학파의 만개된 역사지상주의(historicism)는 구약성경의 통일성을 최종적으로 부수어 버렸고, 구약은 서로 연결이 안되는 시대의 자료들을 수집한 것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은 다른 이방 종교를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방법은 구약신학과 구약을 이해하는 데 모든 점에서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본질적인 내재적 일관성을 둘 사이에 있는 역사적 연관성과 인과적 연관성이라는 가느다란 실 하나로 이어졌을 뿐이다 그 결과, 둘 사이의 동질성에 대한 확실한 입증은 전혀 할 수 없고, 단지 인생 체험의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만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구약 연구에서 역사 지상주의의 횡포”를 깨뜨리고 구약신학을 재발견하며 회복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4. 구약신학의 부흥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약 10년 동안 변하는 시대정신(Zeitgeist)과 한께 구약(신약)신학이 부흥하게 된 몇 가지 요인이 생겼다. 덴탄은 “구약신학이 르네상스”에 기여한 세 가지 요인을 제시하였다. 그것들은 ①진화론적인 자연주의에 대한 믿음의 상실, ②역사적 진리는 순수한 과학적 ‘객관성’으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대한 거부감, 혹은 그런 객관성을 정말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③변증법적 (신정통주의)신학에서 계시 사상으로 돌아가는 경향이었다. 자유주의의 역사실증주의는 전적으로 옳지 않으므로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1922년 쾨니히가 쓴 『구약신학』의 출판과 함께 처음으로 구약신학에 대한 흥미가 생기고 있다는 징조가 나오T다. 그는 구약성경의 신빙성에 대해 높이 인정하였으며 벨하우젠이 주장한 구약 종교의 진화를 부인하고 해석에 있어서 문법적-역사적 방법을 정확하게 사용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구약신학은 이스라엘 종교의 발전 역사를 구약 신앙의 특정한 신학적 요소의 역사와 결함한 일종의 “혼합체”였다.
1920년대는 구약신학의 성격을 활발하게 토론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1923년 스택은 종교사학(Religionsgeschichte)과 종교철학과 성경신학의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2년 후 스토이어나겔이 쓴 중요한 논문이 나왔다. 그는 구약신학이 이스라엘 종교 역사에 보충적인 역할을 하는 순수한 역사적 학문으로서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6년 아이스펠트는 구약신학은 신학자의 믿음이 갖는 입장에 따라 결정되는 비역사적인 학문이며 따라서 주관적이나, 이스라엘의 종교 연구는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신학의 토론에 뛰어들었다. 지식과 신앙, 객관성과 주관성, 상대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은 아이크롯트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아이크롯트는 양면이 다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아이스펙트의 제언이 탐탁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아이크롯트는, 개블러가 구약신학을 역사적 학문으로 본 것은 본질적으로 정당하며 전제가 전혀 없는 이스라엘 종교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자료의 선택과 구조를 짜는 과정이 순수하게 객관적이 될 수 없으므로 모든 학문에는 주관적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구약신학의 “황금 시대”는 1930년대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젤린과 쾰러는 신-인간-구원의 순서를 따라 중요한 구약신학 책을 내었다. 아이크롯트는 통괄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교차법(cross-section method)을 시도하였고, 피셔는 그의 책,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증거』 제 1권을 출판하였다. 묄러, 하이니쉬, 프록쉬, 바압, 라이트, 프리젠, 임슈트, 폰 라드, 페인, 다이슬러, 포러, 침멀리 그리고 맥켄지가 중요한 글들을 썼다. 버로우즈, 보스, 블렌킨솝, 그리고 레만이 “성경신학”이란 표제로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영과 쇼필드는 각각 보수적이고 또 중도적인 관점에서 구약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단편들을 내었다.
차일즈는 미국에서의 “성경신학 운동”에 대한 훌륭한 개요를 제시하였다. 그가 볼 때 이 운동은 비록 유럽의 성경신학에서 연유된 것이지만 1910년부터 1930년대 사이에 있었던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의 논쟁에서 성경을 둘러싼 싸움의 대치 상황이 만든 결과였다.
구약(그리고 성경)신학이 제기한 주된 문제에 대한 의견의 일치는 찾아볼 수 없다. 근본적인 이슈에 대해 여러 배경을 가진 학자들과 학파들은 계속 폭넓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장에서 역사적인 개요를 제시한 것은 다음 장들(2-4)이 다룰 구약신학에 대한 최근의 논쟁에 담긴 기본적인 이슈들의 주된 뿌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교의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도 변증학이 필요한가/PPT (0) | 2014.09.29 |
---|---|
제3장 성경 (the Scripture)과 변증학(Apologetics) (0) | 2014.09.24 |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I 제 4절 교의신학의 방법, 제 5절 조직신학의 분해 (0) | 2014.09.22 |
교회의 정체(政體) (0) | 2014.09.22 |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해설 1~15장 요약 및 적용 (0) | 201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