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Missions의 개념
"Missions" 는 특별한 어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음의 빈곤 지역에 전하기 위해서, 타신앙자 또는 무신앙자들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그리고 속한 공통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를 맺는 기능적이고 번식하는 지역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신약교회의 직접적인 복음 영향권과 그의 변경 너머로 공인된 사람들을 보내는 것(파송)을 의미한다 (Missions is a specialized term. By it I mean the sending forth of authorized persons beyond the borders of the New Testament church and her immediate gospel influence to proclaim the gospel of Jesus Christ in gospel-destitute areas, to win converts from other faiths or non-faiths to Jesus Christ, and to establish functioning, multiplying local congregations who will bear the fruit of Christianity in that community and to that country: George W. Peters, A Biblical Theology of Missions, Chicago: Moody Press, 1978, P11).
*John Taylor와 요하네스 아꼬르(Johannes Aagaard)같은 사람들은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체(Missiones Dei)”로 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 한 번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헤아릴 수 없는 특별한 선교체-- 마을과 도시들, 어부와 도시 거주자들 학생과 농부들 등등에 대한 선교체--로 형성된다. 또한 Missions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즉, 그의 사역 내에 오로지 특정 단체나 개인들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가 봉사에도 이른다. 즉 발전에의 참여,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할 때 그의 이름으로 완수하도록 부름 받은 전체 다양한 봉사들에 참여함에 이르게 한다.
-지상명령(복음 전해서 영혼 구원), 교회 개척이 우선순위이지만
-사회봉사(사회 기여), 고아원, 병원, 호스피스 봉사 등에 참여에 요청을 받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계층에 다양한 선교를 하는 다양한 선교체가 필요하다.
-전략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좋은 전도자, 좋은 목회자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그의 세계선교와 복음전파 위원회의 유명한 정기간행물은 처음에 “국제선교체평론”(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이라 명명되었다. 현재 제목명은 “국제선교평론”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이다. 제목명의 변화는 “하나님의 선교”란 문구에 기인한다. 그러나 “선교체들(Missions)”이란 단어가 “선교(Mission)”와 "선교체들(Missions)" 사이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와 그와 관련된 “선교체들”에 더욱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한다(Johanes Verkuyl 저, 최정만역, 현대선교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P17).
-지혜와 순결이 요구된다.
3. 복음화 (Evangelization)의 개념
복음화는 기독교 선교 사역에 있어서 기초 사역으로서, 회심자를 만들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적합하고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권위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결단을 유도할 뿐 아니라 요구하는 복음의 제시요, 관통이요, 침투요, 대결이다. 그것은 하나의 결단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자 혹은 무신자의 회심을 위한, 또한 그들을 예수 믿는 신자를 만들기 위한 효과적인 복음의 제시이다. (Evangelization refers to the initial phase of Christian ministry. It is the authoritativ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as revealed in the Bible in relevant and intelligible terms, in a persuasive manner with the definite purpose of making Christian converts. It is a presentation- penetration-permeation-confrontation that not only elicits but demands a decision. It is preaching the gospel of Jesus Christ for a verdict. It is the effective presentation of the gospel for the conversion of the unbeliever or nonbeliever, making him a believer in Jesus Christ: George W. Peters, A Biblical Theology of Missions, Chicago: Moody Press, 1978, P11).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해시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
-이미지 전도를? 종탑과 레온이 부담감을 조성할 수 있다?
-과거에는 선포 전도로 접근했지만, 설득전도로 바뀌었다.
-개인적(1:1) 맞춤 전도.
-지속적으로, 복음의 수용성을 관찰하며.
-고구마 전도
-논쟁하지 말라
-전도는 순간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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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독교화 (Christianization)의 개념
기독교화는 유기적으로 복음화와 관련이 되어 있고, 논리적으로는 복음화 후에 따라 오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와 복음안에서 믿는 자들을 교화하고 문화화 하는 것을 기독교화라 한다. 그것은 믿는 자들을 예수의 제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고, 그리스도의 유용한 종이요 효과적인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전 생애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원리(principles)들이 꽉 들어 차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주권을 받아 드리고 그들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주님의 지각있고 헌신된 추종자가 되는 것이다. 전체적인 의식에서 볼 때, 이러한 것들은 전생애를 통해서 일어나는 과정인 것이다. (Christianization is organically related to evangelization and logically follows the latter. It is the indoctrination and enculturation of the believer in the gospel and Christian ethics. It is the transformation of the believer of Jesus Christ into a disciple of Christ. His whole life is to be permeated with the mind and principles of Christ in order to make him conformable to the image of Jesus Christ and an effective witness and useful servant of the Lord. He is to be made into a conscious, committed follower of the Master and is to commit his whole life to Christ and accept the lordship of Jesus Christ. In the full sense of the word, this will be lifelong process: George W. Peters, A Biblical Theology of Missions, Chicago: Moody Press, 1978, P12).
5. 사회화 (Socialization)의 개념
사회화라는 말은 성경적인 어휘는 아니지만 하나의 성경적인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화라는 것은 신자 개인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에 더 치중하는 반면에, 사회화는 개인 신자로 하여금 교회나 크리스찬 기관같은 신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인지된 그리스도인의 이상, 모범, 제도와 삶의 방식에 부합되도록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성 과정이며, 이상적으로는 개종후 일어나는 과정인 것이다. (Socialization is not a biblical term, but it expresses a biblical idea. While Christianization deals more with the conformity of the individual believer to Christ, socialization refers to the process by which the individual believer is led to conform to Christian ideals, standards, institutions, and a way of life as perceived by a group of believers, a church or a Christian institution. It is a molding process and ideally, it is a postconversion process: George W. Peters, A Biblical Theology of Missions, Chicago: Moody Press, 1978, P12).
6. 문명화 (Civilization)의 개념
문명화라는 말은 문화 발전의 수준을 의미하는 세속적인 어휘이나, 오늘날은 크리스찬 사역과 관련하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 어휘가 쓰이는 한에서는 이 어휘는 실제적으로 서방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동일시하는 알브레트 리츌의 사상의 잔존물로 여겨진다 (Civilization, a secular term which refers to the level of cultural development, is little used today in relation to Christian ministries. Insofar as it is used, it betrays a remnant from Albrecht Ritschl's idea of Kultur-Christentum which he practically identified with Western civilization).
II. 선교 학자들의 선교의 개념:
1. Peter Beyerhaus:
"선교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하면,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사복음서의 마지막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참조 마 28:18-20, 막 16:15, 눅 24:46-49, 요 20:21, 행 1:8)들을 단순하게 이해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선교를 이해할 때 사회적 구원에 역점을 둔다. 즉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운동과 고통으로부터 사회를 구원하는 활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중요한 세 가지 요소들, 즉 1) 현 상황에 대한 사회 정치적인 분석 (a socio-political analysis of the present situation), 2) 가능한 한 참여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 (a good intention to get as involved as possible), 3) 기술적인 노하우 (technical know-how)가 절실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이 그 자체의 깊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삶과 사역에서 선교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9장과 10장을 보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예수의 해답에 대해 네 가지의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예수는 온 성과 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사역을 하였다(마 9:35). 그것은 그의 사명과 사랑, 무엇보다도 승리하는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고통하는 세상에 임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최초로 세상의 진정한 필요인 예수님의 긍휼을 본다(마 9:36). 그의 긍휼은 목자없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무리 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추수할 많은 곡식으로 덮혀 있는 소망의 들판의 비젼으로 변화시킨다. 이 세상의 이러한 필요들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를 얻기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고통 받는 세상은 예수님의 역동적인 구원의 능력 앞에 항상 열려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선교사역을 위해 자원 할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9:38).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계획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종들을 불러 세우고 계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위해서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사도로 세우시고, 그가 행하셨던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파송하셨다(마 10:1-5).
Peter Beyerhaus는 다음과 같이 선교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A Mission which Glorifies God).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구원의 역사를 온 세상에 증거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았다. 선교의 우선적인 관심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실이 종종 간과되고 있고, 때때로 부정까지도 되고 있다. 선교는 세상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우주 종말적인 비젼의 극치는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그의 사역을 요약하여,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요 17:4)고 말씀하셨고, 그는 임박한 죽음과 부활을 앞두고,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기도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의 사명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며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원수들이 다 예수님께 복종한 후에 라야 온전히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선교의 전체 역사는 시편 110: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의 말씀의 점진적인 성취라고 요약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선교는 영원한 구속을 주는 것이다 (A Mission which Brings Eternal Redemption).
Thesis 2: We are called and sent to save all men from the eternal and temporal consequences of their apotasy from God. 이 명제는 선교신학 형성에 있어서 비 인간화의 경향에 대해서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예수님의 존엄한 명칭가운데 하나가 구세주(Soter; Savior)이다. 그의 사역의 목표는 구원한다는 동사나 구원이라는 명사로 더 자주 묘사되고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학자들은 “오늘의 선교(Salvation Today)"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샬롬(Shalom)이란 말을 지금 현세에서의 평화, 조화, 번영의 실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람들이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소망의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신약성경에 더 중요한 다른 차원에서 구원의 개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두 단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첫 번째 단어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의 구원과 관계된 Soteria 이다. 다른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eirene (peace) 인데,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만이 죄인들로 하여금 이 진노를 피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선교는 악한 마귀를 내쫒는 것이다 (A Mission which Exorcizes Demons).
Thesis 3: We are called and sent in the power of Christ's victory to disarm the evil one.
예수그리스도의 지상최대의 명령의 또 다른 면은 사람의 영적,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쫒는 권능을 주셨다. 사복음서에서도 상당부분 귀신을 쫒는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님의 사역에 임한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마귀를 그 권좌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도 강신술(Occultism)과 교령술(Spiritualism)이 성행한다. 이방인을 회개시킨다는 것은 많은 경우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된다. 요한은 마귀를 세상의 권세 잡은자(the prince of this world)로 불렀다. 인간 사회구조가 귀신화(demonized)되는 경우에는 사회, 경제의 구조적인 개혁만으로는 변화와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 거기에는 제식(制式)과 율례와 타부(taboo)가 존재하고 조상신으로 우글거린다. 그래서 비귀신화(dedemonization)가 요구된다 (고후 10:3-5).
넷째,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A Mission which Prepares Christ's Return). Thesis 4: The Church of Christ as the bridgehead of His universal reign is called and sent to witness to the Gospel before all mankind in preparation for the return of our Lord..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하셨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세계복음화가 다 이루어지면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유언처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 28:19)라는 지상 최대의 위임명령을 교회에 주셨다. 이 지상 최대의 위임명령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와 선교의 교두보인 교회가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어 졌다, Raymond Lull, Francis Xavier, Ludwig Nomminsen, Hudson Taylor, C. T. Studd 같은 선교의 선구자들은 이 예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이 성취해 놓은 일에 대해 결코 만족하지 않고, 거룩한 성급함(Holy Impatience)을 가지고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 지역을 향하여 박차를 가하며 나아 갔다.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총력을 집중하여 세계복음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아멘!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계 22:20).
2. Orlando E. Costas:
올란도 코스타스는 그의 저서 “The Integrity of Mission"에서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선포(proclamation)로서의 선교: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가 복음선포이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케리그마)을 성실히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막 16:15, 눅15장 참조). 바울에 의하면 신자의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데,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다고 말했다(딤후 3:15). 또한 그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선포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롬 10:17). 그러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함.
2)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함.
3)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선포함.
2. 제자 양성으로서의 선교:
크리스천 사역의 중심적 추진력으로서 제자 양성의 개념의 재출현은 신약성서의 기본 관심의 재발견이다. 복음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강력한 선포의 언급이 있는 곳에 또한 가르침의 사역에 대한 즉각적인 언급이 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된다. 만약 복음을 선포하기만 하고 그것을 제자 삼는 일에 연결시키지 않는 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사람들을 예수를 따르도록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 함.
2) 예수의 선교에 참여 하게 함.
3) 모든 것에 있어서 예수께 복종하게 함.
3. 활성화로서의 선교:
목회적 사역에 속한 모든 임무들 가운데서 성도들을 전도하도록 활성화시키는 것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요한 것이 없다. 그들을 전도하도록 활성화 시키는 것은 신학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Kenneth Strachan은 “어떤 운동의 확장은 그 전체 회원들로 하여금 그 신앙을 계속적으로 전파하도록 활성화 하는데 성공하는 곳과 정비례 한다”고 말했다. 성령을 따라 하는 이 노력의 성패의 열쇠는 목회적 리더십이다.
가. 활성화의 정의:
첫째로, 활성화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극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활성화 한다는 것은 모집하는 것이다.
셋째로, 전도의 활성화는 조직화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활성화 한다는 것은 관리한다는 것이다.
나. 활성화의 과정에 대한 이해:
1) 의식화 (Conscientization): 활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도자적 양심을 깨우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활성화 되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들의 선교적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2) 분석 (Analysis): 활성화의 둘째 단계는 신도들이 그 속에서 그들 자신들을 발견하는 구체적 현실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회중과 회중이 속한 사회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다.
3) 계획 (Planning): 효과적인 활성화는 관찰하고 분석한 것을 토대로 하여 계획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전도의 활성화에 있어서는 분석을 통해 견고하고 대담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4) 조정 (Coordination): 효과적인 활성화는 또한 통합적 노력 하에서 계획된 것을 행동에 옮겨 놓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기능적이고 융통성 있고 변경 가능한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5) 평가 (Evaluation): 적절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평가가 요청된다. 만약 평가의 구조 장치가 처음부터 도입되지 않으면, 활성화의 과정은 실패와 무효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관리, 목표점검, 계속적인 양육의 불충분함 때문에 해를 입을 것이며, 복음의 진척에 있어서 좌절과 퇴보를 초래할 것이다.
다. 효과적인 활성화를 위한 조건에 주의를 기울임:
효과적인 활성화의 과정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정신적 변화 (Mental Transformation): 첫째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활성화는 여러 가지 전통적인 생각들을 깨뜨리는 데 달려 있다. 성직자 위주의 교회 개념은 평신도 위주의 활성화의 본성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
2) 희생적 행동 (Sacrificial Action): 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조건은 기꺼이 희생하는 존재-- 준비와, 사역과, 평가에 바치는-- 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통합적 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다른 자원들을 기꺼이 바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3) 포괄적 신앙 (Comprehensive Faith): 포괄적 신앙이 없이는 어떠한 활성화도 불가능하다. 그런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서 그를 만물의 주로 삼은 하나님을 믿는 입장이다. 그 하나님은 “예로부터 인간에 구원을 베푸시고 계시다”(시 74:12). 그 하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교회를 불렀다. 그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19-20).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는가?
라. 활성화에 있어서 설교와 가르침의 역할을 강조함:
우리는 우리의 의무의 핵심 부분에 와 있다. 활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무엇이 “말씀의 사역”의 역할인가? 혹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성직자의 설교와 가르침의 사역이 교회의 활성화를 자극하고, 권장하고, 강화시킬 수 있을까?
1) 동기부여의 힘으로서의 말씀: 우리는 실제적 말씀의 사역에 관해, 무엇보다도 활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동기부여의 힘으로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설교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여자들과 남자들, 젊은이들,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봉사하도록 불을 붙일 수 있다.
2) 보충의 자원으로서의 말씀: 말씀의 사역은 활성화 과정에 있어서 단지 자극을 주는 힘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유력한 보충자원이다. 말씀의 사역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은 도전에 대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3) 현실의 해석으로서의 말씀: 말씀의 사역은 현실을 해석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활성화는 신앙 공동체의 내적 상황과 전도가 일어나는 사회 역사적인 배경 모두를 이해 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 이해가 교회의 전도 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면, 그 분석의 결과를 회중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4) 프로그램 촉진제로서의 말씀: 말씀의 사역은 효과적인 활성화 프로그램의 촉진제가 될 수 있다. 말씀의 사역은 그것의 다양한 국면들을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요소로 단단하게 묶을 수 있다. 그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그것을 후원하도록 설득하고 격려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열정의 분위기와 기대하는 소망의 분위기를 창조 할 수 있다.
4. 통합적 성장으로서의 선교:
Emil Brunner는 “불은 탐으로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에 의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성서에서 불의 이미지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의 활동은 항상 교회의 성장을 위한 활동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가 자라기를 원하시고 또한 기대하신다. 이 장에서는 교회 성장의 이러한 세 가지 측면들을 다루고자 한다.
1) 넓이의 성장: 교회의 숫자적 성장을 의미하며, 이것은 특히 교회의 사도적 성격과 관계가 있다. 사도(Apostle)란 말은 선교적 기동성 및 확장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교회는 복음의 씨앗을 세계의 정원 속에 뿌려야 하며, 파종, 경작, 전지, 추수의 과정을 거치면서 넓이의 성장을 한다.
2) 깊이에 있어서의 성장: 교회는 내적으로 자라야 할 필요가 있는 기관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는 전도적 확장에 있어서 성장해야 할 뿐 아니라 응답하는 자들을 통합하고 그들을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해 줌으로써, 깊이에 있어서도 성장해야 한다.
3) 높이에 있어서의 성장: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계속 성장하는 삶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생활 양식에 있어서 계속적인 성장을 경험해야 한다.
5. 해방으로서의 선교:
누가는 예수께서 자라시던 나사렛 마을의 회당을 택하여 선교의 본질적 개요(outline)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6-21).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선교의 기원은 교회도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어떤 특정 그룹도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께 기원을 둔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시기 위해 변방(장애)을 가로질러 오신 선교사이다(성육신). 순수하게 영이신 분이 물질 세계를 말씀과 영으로 만드신 사건도 선교로 볼 수 있다. 아들이 성육신 하심도 선교이고 오순절에 성령의 오심도 선교이다. 그렇게 볼 때 선교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선교를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는 것보다 교회의 일로 보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바네크(Warneck)는 그의 “복음적 선교학”(Evangelishe Missionslehre)에서 선교가 삼위 하나님에 근거됨을 언급하였다. Karl Hartenstein은 1933년에 이 사상을 더 충분히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 결과는 빌링겐 선교대회에 반영되었다. 1952년 빌링겐에서 있었던 그 선교 대회를 선교적 대 전환점으로 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회를 선교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한다. 종래의 선교 개념은 교회 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선교를 인간의 일로 여기는 듯한 경향이 있었다. 선교사를 ‘우리 선교사’라는 말은 그러한 사상을 반영한 좋은 예이다.
빌링겐 회의의 보고서에서는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 보고서의 글귀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선교 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근거를 가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교의 체계적 정립은 그 대회 이후 George Vicedom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책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 책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은 선교에 있어서 ‘행동하는 주체’(Acting Subject)라는 것이다. Vicedom은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란, 우선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이시고 위임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소유자이시고,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는 선교의 주역(das handelnde Subject)이시다” (George Vicedom, 하나님의 선교, 박근원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16).
그는 선교신학을 하나님, 즉 삼위일체 주님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한다. 그는 선교가 하나님의 내적 근본 질서에 근거된 것으로 말한다. 신의 내적 근본 질서가 파송의 과정으로서 선교의 근거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그 목적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간들에게 그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은사들을 전해줌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교의 목표인데 그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이유 인즉, 그 나라는 현세적인 형태일 수 없고, 실현될 것을 바라는 희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견지 할 것을 강조한다. 미래는 구속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단순히 미래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과거에 이룩한 구속 사업을 중시하는 가운데 미래를 바라야 할 것을 말한다. 그것에 대해 Vicedom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곳에 있고 이 완료 시제에 근거하여 미래에 도래할 것이다”라는 말로서 불신자에게 선포될 수 있다“(Ibid p50).
여기서 우리는 찬란한 과거를 현재에 재현시키고 이상적인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려는 비세돔의 사상을 본다. 즉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 포개어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이다. 그것은 말세만을 대망함으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사상을 배격하고, 현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끔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already)라는 근거 위에 ‘아직 아니’(not yet)로 나아가야 할 것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선교를 관찰할 때 종래의 선교 이해와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사상이 말하는 선교 철학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 다른 점을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것은 종래의 선교 목표인 ‘교회 세우는 일’(implantioecclesiae)의 약화를 뜻한다. 종래의 선교관은 교회가 없는 지역에 가견적인 제도적 교회를 많이 심는 일, 즉 교회 확장이 선교의 목표였다. 그로써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타자를 위한 존재’(Church for others)로 봄으로 교회의 중요성은 교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함에 있다고 본다. 그 이론적 근거는 삼위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그 바깥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나 바뀌어졌다. 즉, 종래의 ‘하나님---> 교회---> 세계’라는 구원 사역의 차서는 ‘하나님---> 세계---> 교회’라는 차서로 바뀌었다. 교회는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의 역사하시는 징표에 민감하여 그의 일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둔다. John Tayor와 Johannes Aagaard에 의하여 발전된 하나님의 선교 사상은 하나님의 선교를 삼위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의 선교(missions)이어야 함을 말하였다. 즉, 도시, 농촌, 학생, 특수 그룹 등, 인간의 일에 관심과 참여를 강조한다. 나병, 말라리아, 무지와 약함, 그리고 가난을 위한 치병과 도우는 일은 모두 선교이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선교사들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God acts in history)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세속 역사의 일치 병행은 불가하다. 즉, 전자는 후자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 방해 요소는 사단의 세력 등이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은 심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로서, 그리고 해방자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카톨릭의 해방 신학자 Gustav Gutirrez는 ‘행동 신학’(Doing Theology)을 가지고 상황에서의 정의 실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출애굽은 해방의 원형이고 선지자나 예수님은 정의 실현자로 규정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하여 모든 내용을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 메시아의 행동,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행동만 강조한 나머지 선교적인 선포가 약화 될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서의 구원 행위는 사회적 일로만 하려 들면 불가능하다. 역사상 참 구원의 역사는 무엇이든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된다. 포도나무이신 그와 연결되지 않는 구원의 추수는 불가능하다. 만약 예수없이 행하는 복지 사업, 해방 운동, 공의 운동 등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참 포도나무되신 주의 성령의 인도 없이 행하는 것은 참 구원의 사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 구원의 사업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계획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하여 새 하늘을 창조함이 그의 목적인 것이다(계 21:1). 주님은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셨다. 그런 고로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희망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화해의 사역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세계적인 평화와 공의는 그 실현이 요원하다. 그것의 최종 목표는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그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4. Karl Barth
칼 바르트는 8000페이지에 이르는 그의 대작 “조직신학”에서 해외선교에 대해 겨우 4페이지만을 할애하였다. 그것만 보고 그에게 선교사상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다. 이유는 그의 전체 저작 가운데 선교사상이 고루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선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화해 사건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와 연합으로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선교의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선교 신학을 도출하는 하나님의 선교와는 달리 그가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그의 선교 신학을 도출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화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연합을 원함에서부터 이루어졌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가능케 되었다. 교회는 이 화해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선교의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선교 신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으로 구원을 위해 필요한 화해가 이미 이루어졌다. 교회의 “선교 과업은 이것을 그들에게 알리는 데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선교의 목적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개인적인 기쁨을 가져다 주는 회심에 있지 앓고 이미 이루어진 화해에 대한 증인을 만드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선교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제시함에 그치는 것이 된다. 갈릴리에서 성취된 구원의 가능성과 실제성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적용시키면 보편적 구원론에 빠지기 쉬운 것이 된다. 그러나 구원은 그것을 받는 인간 쪽에서 믿음과 성령에 의한 적절한 결단과 응답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라면, 선교에 있어서 인간은 구원을 얻도록 초청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증인이 되게 하는 부름에 초청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미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다는 견해는 보편적 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5. Gustav Warneck
선교는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도모하는 전체적인 일이다.” 바네크는 복음선포를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에 연관시켰다. 만약 하나님의 대사로서 부름을 받은 선교사가 오직 말 뿐인 복음만 전한다면 그것은 부족하다. 그리고 세워진 교회가 단순히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데에만 그친다면 그것도 부족하다. 그런 고로 선교사는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그 복음으로 인해 많은 청자의 심령들이 깨어지고 양심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연합할 때 교회가 되며, 비로소 거기에 은혜와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6. Walter Freytag
선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하도록 관철하려는 그 분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두 가지 운동이 뚜렷하다. 1) 하나님의 행동이다. 즉 하나님 아들을 보냄 가운데 나타난 그의 계획과 말세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됨 사이에 전개되는 그의 행동이다. 2) 공동체의 모임이다. 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었고, 주 되심의 충분한 계시를 고대한다. 그것은 올 나라에 대한 사역과 이미 온 나라를 증거한다.
7. Harold R. Cook
선교란 “선교사라고 부르는 선택된 일군들의 그룹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인도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는 교회의 일이다. 여기에서 교회라 함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는 자의 큰 단체인 교회이지 특수한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독립 선교 단체에 의한 선교사들도 하나님이 주신 일, 전체 교회 위에 부과된 일을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선교는 다른 사람을 얻으려는 교회의 노력이다. 그 노력이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 회심자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선교는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신앙에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타종교에서부터 기독교로 전향하는 개종(Proselytism)의 차원이나, 혹은 기존의 신자가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 그리고 기독교 국가가 문화적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 등의 차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인도의 경우, 사회 봉사로 이루어지는 선교는 육적 봉사에 그칠 뿐, 궁극적 문제에 대한 응답인 회심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진정한 선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선교는 선택된 일군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선교사는 엄중한 선택을 거쳐 뽑아야 한다. 특히 풀타임 선교사가 많이 필요하다.
III. 선교학의 연구 대상
선교학의 연구대상은 신학과 함께 사회과학을 통한 구원에 대한 것이다.
1. Gustav Warneck
선교학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그는 선교학을 “선교의 이론”(Missions Lehre)이라 하였다. 화란 자유 대학에서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2. Abraham Kuyper
그는 자신의 저서인 “신학 백과 사전”에서 의학적 용어로서 보철(補綴) 혹은 증가의 뜻인 “prosthetic"라는 말을 선교학에 사용하였다. 그 말은 사도행전 2:41, 5:14, 11:24등에서 빌려온 말로, 헬라어 동사 ”prostithestai"에서 왔다. 그 뜻은 ‘공동체에 더 한다’(to add to the community)는 뜻이다. ‘증가하고 퍼지는 것’(to multiply and spread out)이고, 또 “halieutics"를 사용했는데, 그 뜻은 ‘사람을 낚는 것’ (to fish for men: 마 4:19)이다. 사람을 더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동시에 인간의 복음 전파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복음 전파는 선교의 연구대상이 됨이 분명하다.
3. Donald McGavran
그는 선교학을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말한다.
4. J. C. Hoekendijk
그는 선교학을 ‘사도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apostolate)이라 했다. 그의 주안점은 교회의 보내는 행동(apostllein)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기보다 사도적 증거(martyria), 가르침(didache), 선포(kerygma) 그리고 권위에 관심을 둔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사도적의 기능 즉 사도적 증거, 가르침 그리고 선포를 세상에서 실현함이 선교적 임무이다.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선교의 동반자에 지나지 않는다. N. H. Ridderbos는 보내는 행동도 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증거, 가르침, 선포의 메시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선교 행동 또한 관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5. Johannes Verkuyl
“선교학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계를 통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 역사를 펴는 것에 관한 연구이다”라고 한다. 온 세계 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행동으로 모든 인류에게 ‘전체적인 복음’과 ‘하나님의 율법’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위임을 실현하기 위해 전제, 동기, 구조, 방법, 협의 형태 등을 연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목표와 표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하며, 목표 달성에 방해되는 요소, 즉 악을 대항하는 효과적인 형태를 연구하는 것이 선교학이다.
6. Alan Tippet
선교학(Missiology)이란, 광의로 “역사(세계)에서 하나님에게 인도된 개인들의 존재에 관한 연구”이다. 협의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성경적 재료, 역사, 문화 인류학적 원리들과 기술, 그리고 신학적 토대에 관련되는 재료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적용하는 학문적 훈련, 혹은 과학”으로서 정의된다.
그의 견해는 풀러신학교의 선교학의 방향을 대표한다. 거기에서는 신학적, 문화 인류학적, 역사적, 그리고 실천적 차원에서 선교학을 정립하고 있다. 미국 선교학회(American Society of Missiology)는 티펫 교수의 선교학 정의와 같은 내용을 이렇게 말한다: “과학적인 선교학은 인류학, 통문화 의사 소통이론, 에큐메니칼 운동, 역사, 문화관계 연구, 방법론, 종교적 조우, 그리고 신학과 같은 학문을 결합함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이론 그리고 실천에 관한 조직적 연구이다.”
IV. 선교의 바른 동기
Johannes C. Verkuyl에 의하면, 선교의 동기에는 순수한 동기가 있는가하면 순수하지 못한 동기도 있다고 한다. 먼저 순수한 동기를 살펴보자.
첫째, 순종의 동기(the Motive of Obedience)가 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득불’하는 일이라 하였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까 두렵다고 했다(고전 9:16). 그는 또한 자신을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인이나 어리석은 자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로 생각하였다(롬 1:14). 다시 말하면, 바울의 선교 동기는 주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Hendrik Kraemer는 선교학을 가르켜 ‘순종의 신학’ (a theologia obedientiae)이라고 말하였다. 즉 선교는 주를 순종하는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선교를 거부하는 것은 주를 불순종함이라 하였다. 선교에 있어서 순종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율법화시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선교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어떤 개인적인 흥미나 취미거리로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주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초대 교회는 바로 그들의 전 존재가 선교에 사로잡혔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별도로 선교의 강조가 필요 없었다.
둘째,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의 동기(the Motives of Love, Mercy and Pity)이다. 선교의 동기가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에 근거를 두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의 대상이 되어 구원받았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방인을 가르켜 소망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 하였다(엡 2:12). 그들이 비록 종교성과 율법주의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그들의 구원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그것들 때문에 주의 계시를 거절한다.
교회는 마땅히 이방인에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보이는 주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교량’(bridge)이라 할 수 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았던 것은 이방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에 인색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넘침과 분출은 선교의 동기임에 틀림없다.
셋째, 영광의 동기(the Motive of Doxology)이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라는 신약의 어휘는 선교의 동기로 작용하였다(살후 3:1, 빌 2:11, 롬 11:36). ’하나님의 영광‘(gloria Deo)이라는 말은 많은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에 영광을 주었던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신성의 충만이고 그분의 존재의 현현이다. 그것은 예수의 출생시에 베들레헴에서 나타났었고 그의 죽으심에서도 보였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영광의 현현은 성도들에게 기쁨, 놀라움, 그리고 감사함을 낳는다. Karl Barth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진실로 계시다는 모든 것의 출현, 표현, 현현이다”라고 했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의 거룩한 사랑, 그의 은혜, 그의 자비, 그리고 공의가 인간에게 비친다는 것이다. 미련한 이방인은 오히려 그것을 우상이나 이데올로기로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 잡힌 바 된 성도가 그분의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해 선교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넷째, 종말론적 동기(the Escatalogical Motive)이다. 주기도문에서 두 번째 간구의 기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이다. 그 기도는 주의 왕국이 전 세계적으로 임재함에 대한 것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그리스도의 몸‘(soma tou Christou)의 ’충만함‘(pleroma)을 소원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함은 전 세계적으로 주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한 소원은 개척 선교사들, 진젠돌프, 그리고 학생 자원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찾을 수 있다. 만약 교회가 주의 왕국에 대한 열망과 아울러 이방 가운데서 그의 왕국의 충만함(확산)을 소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다. 살아 있는 교회라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로 모든 이방인들을 모으는 데 가슴을 태워야 마땅하다.
다섯째, 화급의 동기(the Motive of Haste)이다. 주의 왕국이 임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 느슨할 수 없으며, 화급히 서두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열심히 동네에서 동네로 다니셨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고 하였다. 과연 그렇다. 인간에게는 무한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고로 시간을 낭비함이 없이 선교에 쏟아야 할 것이다. Karl Barth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죄라고 하였다. 타성, 우유 부단, 비전의 부재, 창조력의 결핍, 실천의 부재등은 게으름과 허송 세월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때와 시기(Kairoi,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며,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때와 시기를 놓치지 말고 주의 일에 열심히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여섯째, 개인적인 유익의 동기(the Personal Motive)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고전 9;25). 그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바라보았다. D. T. Niles는 고인 물은 썩어버린다고 하였다. 즉, 계속적인 전달의 흐름은 결코 다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영생의 샘물을 그 샘에서 퍼내는 것 처럼 결코 다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영생의 샘물을 그 샘에서 퍼내는 것처럼 결코 마름이 없다(요 4;14). 복음의 나눔이 없을 때 교회는 내향적이 되고 논쟁적이 된다.
이상과 같이 Johannes Verkuyl은 선교의 순수한 동기를 열거하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불순한 동기에서 선교를 추진하였던 바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제국주의와 결탁한 서방선교의 실행이다. 제국주의가 나쁜 것은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자 신들의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데 있다. 제국주의는 수 세기를 걸쳐 식민지주의라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20세기에 있어서 영국과 화란의 동인도 회사와 신교의 선교가 결탁하였던 것에서 나타난다. 영국, 화란, 벨기에, 그리고 독일에 의하여 식민지가 확대되었을 때 선교는 식민지 총독부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부와 타협하지 않고 곧게 선교한 사람들도 많았다. Hendrik Kraemer는 본국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회의 독립을 도왔다. 모리슨과 케리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들도 식민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일하였다.
선교사업과 식민지의 정치 세력과의 연관을 모두 나쁜 것으로 평가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많은 선교사들이 식민지 정부와 연관을 잘 갖고 교육, 건강을 위한 사업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육 사업을 통하여 식민지의 지식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후일 식민지의 독립에 연계되었다. 1945-1966년간에 40여 개의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하였고 거대한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러한 사건이 선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문화적 동기(the Cultural Motive)이다. 실제로 선교는 문화 전달에 기여하였다. 즉, 서방 문화의 가치는 선교에 의하여 식민지역에 이전되었다. Schleiermacher는 서양의 문화적 가치가 반드시 타 세계로 이전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본적인 선교관은 선교의 목적이 구원의 복음을 제시함이 아니고 서방의 법률, 풍속과 함께 깊은 가치관을 전달함에 있다고 함에 문제가 있다. Ernst Troeltsch는 기독교를 ‘종교성의 최고의 표현’으로 말하면서, 기독교 선교의 가치는 세계 문명의 발전에 기여함에 있다고 하였다. William Hocking은 기독교의 선교를 ‘미래의 세계 사회를 위한 준비에 기여함’이라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문화보다 초문화인 그리스도의 전달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어떤 문화를 전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복음전파에만 힘썼다.
셋째, 상업적인 동기(the Commercial Motive) 이다. 리빙스턴에 의한 아프리카 오지의 탐험은 엉뚱한 길을 트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그가 그것을 바랏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정당한 상업이 아닌 노예 장사의 길을 트는데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용되는 데 대해 속수 무책이었다.
마지막으로, 교회 식민주의적 동기(the Motive od Ecclesiastical Colonialism)이다. 복음을 수용한 토착 교회는 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맹목적으로 선교한 교회의 형태를 좇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이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 토착 교회가 따라야 할 교회 형태는 구미의 것이 아니라 신약적인 것이어야 한다. 19세기 성공회는 선교는 그런 점에서 교회 식민주의적인 동기였다. 구미 교회가 자신들의 교파를 여타 지역에 그대로 심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에 있어서 동기의 순수성 여부를 바로 점검하고 세계선교에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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