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의 정경 해석법
구원하시는 하나님
폴 하우스(장세훈 역)
이사야서1)는 새로운 신학 사상을 소개함과 아울러 이미 소개된 신학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이사야서의 능력과 견줄만한 구약본문들은 거의 없다. 전략상 후기 선지서의 첫 부분에 위치한 이사야서는 오경과 전기 선지서에 이미 소개된 주요 사상들을 조명한다. 이사야는 언약수여와 언약파괴, 택한 백성을 위로하고 경고해야할 선지자들의 역할,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및 다윗 언약에 대해 논의한다. 동시에 이사야의 예언은 “남은 자”, “미래에 이루어질 다윗 왕국의 영원한 본질”, “다윗 왕국 당시의 죄악들”, “하나님과 이방인 간의 상호교제”를 서로 연결시켜준다. 이사야서는 옛 사상과 새 사상을 서로 조화롭게 엮어냄으로 말미암아 심히 중요한 신학문헌이 된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및 열왕기는 선지자들의 사역을 소개한다. 그러나 저술을 통해 성서신학에 기여한 선지자들의 공헌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12 선지서에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공헌은 여러 국면으로 나타나며, 다양한 특성들과 배경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다양성은 다소의 공통 주제들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함이 옳다. 나피에르(B. D. Napier)는 선지자들이 7가지 기본 주제들에 역점을 둔다.2) 첫째,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과 그들의 상징적 행동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조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며, 아브라함, 모세 및 다윗 언약의 상속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심으로 그들을 축복하셨다. 셋째, 선지자들은 이 택한 백성들이 준수해야 할 언약을 파괴함으로써 여호와를 거스려 반역했다고 주장한다.
넷째, 이러한 언약파괴로 말미암아, 여호와는 레 26장 및 신 27-28장의 약속과 같이, 이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성품은 죄가 계속 만연됨을 허락지 않으신다. 다섯째, 이러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여전히 이 택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심판은 결코 하나님의 최후선언이 아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긍휼은 구속이 심판의 고통으로부터 일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심판은 항상 갱신을 위해 발생한다. 즉, 심판 이 자체는 결코 마지막이 될 수 없다. 일곱째, 이와 같은 갱신은 온 열방에게로 확대될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창조주가 아닌, 온 열방과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완전하고도 필수적인 심판의 결과로부터 흡족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회복은 온 만물을 포함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상들은 수많은 이슈들로 인도한다. 이러한 주제들이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발생할 것인가는 예언들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연구될 것이다. 이 같은 주제들이 배양된 역사적 정황들은 변화한다. 한 정황 속에서 사상을 창출하는 선지자들은 동일한 정황 속에 거하지 않는다. 선지서들이 선지자 개개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관련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자연스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예언서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은 항상 일정하다. 다양한 역사적 정황, 다양한 저자 그리고 다양한 청중은 사건의 구성, 사건의 본질 및 창조적 활력을 더해줌과 아울러,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제공해 준다.
일군(一群)의 후기 선지서는 오경 및 전기 선지서에 기술된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해준다. 이와 같은 해석은 여호수아~열왕기의 관점과 일치한다. 하나님을 대적한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은 심판을 초래한다. 그러나 결코 여호와를 저버리지 않는 신실한 남은 자들은 항상 살아남는다(왕하 17:3 참조). 동시에, 후기 선지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미래에 역사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를 넘어간다. 선지자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인식하면서 장차 일어날 미래를 예고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었던 선지자들은 율법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았던 미래 사건들을 미리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에 예고된 바벨론 유수와 같은 미래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사야의 저자권 및 연대문제를 논의한 지 200년이 지난 후, 이 같은 논의의 방향은 20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서로 다른 학자들 간의 신학적 대화를 마련해 준다. 이 시점에서, 비평학자들과 보수주의 학자들 모두는 이사야서를 히브리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본문으로 취급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의 문학적 통일성에 관심을 기울인다.3) 또 다른 학자들은 이사야서의 신학적 통일성에 집중하고 있으며,4) 어떤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편집구조에 역점을 둔다.5) 또 어떤 학자들은 정경문헌으로서의 이사야서와 그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6) 저자권 문제에 대한 불일치는 여전히 논쟁의 핵심사안이지만 이와 같은 차이가 이사야의 신학적 통일성을 늰?영하는 요소들을 더 이상 토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차일즈(Brevard Childs)와 모티어(J. A. Motyer)는 누가 전 이사야를 기록했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차일즈는 비록 이사야가 그 책 전체를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해도, 정경은 이사야서를 마치 이사야가 전체를 기록했었던 것 인양 취급하며, 또한 신앙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이사야서를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읽고 있다고 기술한다.7) 모티어(Motyer)는 비평학자들이 제기한 이슈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 같은 이슈들이 이사야서를 하나의 신학적 통일체로 보려는 견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8) 차일즈와 모티어는 이사야서 전체와 각 장들이 어떻게 통일성을 이루는가를 살펴보면서 이사야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시도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 본서는 모티어의 해석에 동조하면서도, 이사야의 정경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견해를 긍정한다. 이사야서를 여러 부분으로 분리하려는 태도는 본 예언서의 신학적 성과를 공정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다.
이사야 신학에 관한 전통적 혹은 비 전통적 해석을 막론하고, 하나의 주목할 만한 일치점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주 핵심 요지가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진술한다.9) 이 “하나님의 거룩”개념으로부터 몇 몇 다른 주요 핵심 사상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예를 들면, 존 오스왈트(John Oswalt)는 “하나님 홀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신을 경배하는 행위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고 말한다.10) 달리 말하자면, 여호와의 거룩, 혹은 그의 유일성은 “다른 신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크리스토퍼 노트(Christopher Noth)의 말처럼, 이사야서, 특히 40-66장은 뚜렷한 유일신 사상을 부여준다.11) 존 스키너(John Skinner)는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는 가장 철저한 유일신론자이다”고 말한다.12)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하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신다. 존 와츠(John Watts)는 포로기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때 여호와는 누가 온 만물을 창조하셨는가를 이스라엘에게 상기시켜주신다고 지적한다.13) 분명 창조주는 믿음과 물리적 번영을 지속하려는 그 백성들을 계속 유지케 하실 수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속하신 창조주는 그 백성들을 새 출애굽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즉, 창조주는 온 사방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 본토로 다시 이끌어 주실 것이다.14) 이 새 출애굽은 예루살렘의 회복―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의 중요성을 더해준다―을 가져다 줄 것이다.15)
비록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해도, 또한 여호와는 죄인들을 주의 날에 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를 반역하는 자들로부터 구별된 남은 자들은 시공간 속에 일시적으로 등장하겠지만, 장차 훗날에는 영속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전 역사(과거, 현재 혹은 미래)를 주관하심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와츠는 “‘여호와는 역사의 주재(主宰)이시다’는 주제야말로 이사야 신학의 핵심이다”고 결론짓는다.16)
이사야가 강조하는 “도래할 다윗과 같은 구원자”사상은 이 모든 주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원자가 왕으로 혹은 종으로 묘사되든 간에, 전 성서신학은 이 구원자에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특별히 신약성서는 이 사람에 깊이 집중한다.17) 이 다윗과 같은 구원자는 이사야서가 고대하는 인물이며, 또한 역사가 완성될 때 온 만물을 다스릴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여러 사상들 속에 나타난 이 사람의 역할은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구원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및 다윗 언약을 완성시켜주는 한 맥락을 제공해 준다.
이사야서의 주요 사상들에 학문적으로 배열함과 아울러, 어떻게 이사야의 신학 사상들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사야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다른 효과적인 방법들이 존재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될 구조분석은 이사야서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사 1-12장은 책망하시며 호출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예언을 시작한다. 언약을 준행(準行)해야 할 이스라엘의 불성실이 낱낱이 열거되고 있으며,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소개된다. 이사야의 소명이 6장에 이르러서야 소개되고 있음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선지자 파송(派送)이라는 그 역사적 패턴을 반영해준다. 또한 본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이 처한 현재와 임박한 미래 혹은 먼 미래를 번갈아 가며 소개하고 있다. 본 단락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사 7-12장에 약속된 다윗과 같은 왕이다. 또한 약속된, 두려운 여호와의 날 혹은 심판의 날은 본 단락의 주요 사건이라 하겠다.
그 다음, 사 13-27장은 여호와를, 교만한 열방(列邦)을 파(破)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교만과 그로 말미암은 믿음의 실족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앗수르 같은 족속을 사용하여 택한 백성을 심판하도록 이끌고 만다. 이와 같은 교만과 믿음의 실족은 여호와로 하여금 주변 족속들을 정죄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심판은 여호와와의 맺은 이스라엘의 관계를 역사 속에서 공평하게 처리해 줌과 동시에, 온 만물을 다스리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를 알려준다. 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장차 여호와는 타락한 이들 중 몇 몇을 구속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이사야 28-39장은 사악한 자에게 임할 일련의 화를 선포하면서 심판 주제를 계속해 나간다. 본 단락은 미래 희망 기사를 수반하며, 주전 701년의 위기 때 예루살렘의 구원을 다룬 한 역사적 기술은 본 단락의 결론이 된다(왕하 18-19장 참조). 본 단락의 전체에 걸쳐, 여호와는 신실한 남은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직 남은 자를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오직 미래에 나타날 희망일 뿐이다. 이러한 희망은 군사적 동맹이나 정치적 전략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의 맺은 교제를 통해 생겨난다. 본 단락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여 정복할 것이라는 끔찍한 경고와 함께 끝을 맺는다. 정경적으로 볼 때, 이 같은 바벨론의 침략과 정복은 이미 열왕기 하에 일어났었던 사건이다.
사 40-55장에서,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희망은 계속 교차하고 있다. 여기서, 고난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물리적이고 영적인 포로생활로부터 새 출애굽을 이끌 한 종을 보내신다. 사 28-29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여호와를 향한 헌신만이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며 심판으로부터 안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본 단락은 가장 철저한 유일신론 사상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종의 정체는 신약에 이르러 중대한 신학적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끝으로, 사 56-66장은 만물을 새롭게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 하나님을 다시 한번 더 신뢰함은 밝은 미래를 위한 촉매가 된다. 다시 새롭게 된 온 만물은 본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 반영되고 있는 바, 이 구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사상(“새 하늘과 새 땅”)은 신약에 이르러 완성된다(계 21-22장 참조). 오직 여호와만이 이러한 변화를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창조주시요 유지자시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창조주만이 재 창조주가 되실 수 있다.
이사야의 비전은 유일신 사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우상들과 기타 다른 경배의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인간사 혹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세이츠(Christopher Seitz)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열방의 다른 신들보다 뛰어난 그의 우월함을 입증하려고 논쟁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열방의 (한 분)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18) 이러한 사상은 모든 남은 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준다. 그러나 이 사상을 무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그 어둠 속에 사로잡히고 만다.
책망하시며 호출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1-12장
비록 이사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가 구원이라 할지라도, 이사야서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관대한 방식을 거의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응석받이 혹은 병든 아이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는 이사야에게 권능을 입히어 청중들의 심령을 찌르며 그들의 악행에 도전할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열방의 죄악을 선포하시며(1:2-31), 심판의 날 이후에 찾아올 밝은 미래를 알려주신다(2:1-4:6).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나쁜 포도원(5:1-7), 화를 당해 마땅한 전토(5:8-30)에 비유하신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시어(6:1-3) 그 백성들과 왕들에게 믿음과 구원의 기회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의를 거절할 때도 장차 임할 구원을 제시해야만 한다(7:1-11:16).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은 이사야와 그 외 남은 자들이 처음부터 받아들였던 진리이다(12:1-6). 완악한 반역에 이어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소명―이사야는 백성들을 경고하고 훈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는다―이 뒤따른다.
사 1:2-31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계속해서 책망하신다. 창조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언약파괴의 증인들로서 하늘과 땅을 호출한다(1:2).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출 4:23)은 반역하며 회개를 잘했다(1:2-9).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레위기가 요구하는 제물들을 바친다 해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버림당할 것이다(1:10; 창 19:1-29 비교). 하나님은 용서하기 원하시지만 그럴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신다(사 1:18-19). 현실은 암울할 뿐이다. 홀로 남은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아마도 왕하 18:13-16에 소개된 산헤립의 침략을 암시하는 듯하다.19) 예루살렘은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존속은 한 때 언약백성의 영광스런 거처였던 지난 날을 연상시켜 줄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작은 처소를 존속하도록 해준다.
이와 같은 파멸이 지나고 나면 여호와께서 이루실 멋진 미래가 놀라운 방식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말일”에 예루살렘은 온 열방을 (예루살렘으로) 끌어올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창 12:1-9과 출 19:5-6 이후 줄곧 소개된 그들의 소명, 즉 제사장 나라와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백성들을 판단하실 것이다(사 2:1-5). 그렇지만 이와 같은 새로운 실제는 예루살렘의 복술, 물질주의, 교만 및 우상숭배를 정화시킬 여호와의 날이 임한 후에 찾아 올 것이다(2:6-22). 그 날에, 여호와 홀로 경배 받으실 것이다(2:17). 오직 의로운 자들만 살아 남을 것이다(3:10; 4:2-6). 그 날에,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다스리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며, 신실한 자들은 해(害)로부터 영원히 보호받을 것이다. 이사야가 처한 환경 및 그에 대한 비전은 이사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사건들을 미래의 사건으로 바라보게 한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이러한 사건들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희망은 미래의 맥락에서 실현될 것이다. 앗수르의 침략은 심히 두려운 사건이요 끔찍한 경험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최후 심판은 결코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며, 이것은 정경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이제 사 5:1-30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본문의 분위기 역시 그리 완화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거친 포도원과 같으며,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피 흘림, 불의 및 우상 숭배로 점철되었다(5:1-7). 그러므로 그 땅은 화를 당할 것이며 택한 백성들은 사나운 대적의 손에 사로잡힐 것이다(5:8-30). 하나님은 거룩한 족속을 만취한 자(5:10, 22), 교만한 자(5:13-17), 악을 사랑하는 자(5:20), 진노 받을 자(5:26-30)로 정죄하신다. 언약 파괴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거의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한다. 이사야 전체를 통해 드러난, 이사야 동시대 백성들을 향한 여호와의 태도는 거의 달갑지 않다. 계속해서 이사야는 이러한 백성들을 범죄한 백성,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들로 소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율법에 이미 예고되었으며, 이들의 운명은 전기 선지서에 분명히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사 1-5장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정경적 가교 역할을 한다.
이사야의 소명은 이사야서 전체에 걸쳐 심히 중대한 신학적 중요성을 내포한다. 웃시야가 죽던 해(주전 742년 경)에, 이사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비전을 본다(6:1). 여호와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다. 6:1은 여호와의 왕권을 격양시켜주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다른 관점들을 불러일으킨다(사 13-23; 37:23-24; 40:18-22 참조). 이 우주적인 왕은 성전보다 훨씬 충만히 거하시며(6:1), 그의 거룩을 찬양하는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다(6:1-3). 하나님의 거룩은 이사야의 죄악과 직면하며, 이사야는 그의 무가치함을 고백한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사해주신다(6:4-7). 이사야는 은혜의 보답으로 여호와를 위해 그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려한다(6:8). 이 장면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임에 틀림없으나, 사 1-5장에 기술된 행위들과는 극히 대조된다.
새로이 지명된 선지자가 사명을 위임받았을 때, 그는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며, 긍정적인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6:9-10). 이사야의 사명은 신실한 남은 자―이들은 성지에서 다시 자라날, 거룩한 백성을 위한 “거룩한 씨”가 될 것이다―를 드러내는 것이다(6:11-13). 달리 표현하자면, 이사야는 아히야, 엘리야, 미가야 및 엘리사가 이미 수행했었던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사야의 임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일은 어려운 사역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후원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후원은 (헌신 자들에게) 결코 쉽사리 제공되지 않았다.
이사야의 첫 사명은 유다 왕 아하스(주전 731-715년)에게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이다. 아람 및 북 이스라엘의 침략에 직면한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의존해야만 할 것인가를 결단해야만 했다. 아하스 왕은 아합 왕과 같이, 여호와의 신실한 종을 신뢰하지 못하고 거절한다(7:1-9). 그러므로 이사야는 현재와 미래에 임할 일들을 계시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특별한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바, 이것은 아하스의 헛된 불신을 강조해 줄 것이다.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선언한다(7:14). 더욱이, 그 땅이 곧 아람과 북 이스라엘로부터 자유할 것이며 앗수르가 유다를 대적할 것이다(7:15-17).
학자들은 이 약속이 무엇을 뜻하며 이사야가 이 예언의 성취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해 격렬히 토론해 왔다.20) 그러나 일치점도 존재한다. 첫째, 여러 학자들은 임마누엘 예언이 삼하 7:1-17 이후 줄곧 다윗의 위(位)에 집중된 그 희망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약속된 아이가 바로 히스기야라고 이해한 반면,21) 다른 이들은 약속의 성취로서 이 아이를 “신성한 다윗의 아들”이라 지적한다.22) 어떻든, 삼하 7장에 약속된 영원한 나라는 지금 이곳에 활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둘째,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 약속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의 구원―이와 같은 구원은 택한 백성과 택한 성읍을 향한 여호와의 권능과 사랑을 돋보이게 해준다―을 내포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셋째, 대부분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아하스의 불신을 명백히 비난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오트 카이저(Otto Kais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하스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했기 때묊?에, 그는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 예언은 죄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 질 것임을 보여주는 (일련의 전 역사에 퍼져있는) 참 징조요 증거가 된다”.23)
이와 같은 확신은 여호와가 약속을 지키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며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히야와 엘리야 시대와 같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다윗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고대하는 미래의 희망이며,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가장 안전한 방패가 되신다. 임마누엘은 다윗의 계보―물론 아하스의 계보를 거칠 것이다―로부터 나올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는 미가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진리선포의 막중함을 절감한다. 전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가 처음과 나중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오가던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오로지 세속적인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열왕들은 세속계(世俗界)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눈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시작도 끝도 전혀 알지 못한다.
이사야는 “믿음”, “남은 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심판” 및 “도래할 다윗과 같은 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믿음을 저버린 아하스의 불신에 직면한 이사야는 율법의 계명과 증거를 신뢰하며 두려워 말고 담대히 믿으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갈 때도 신뢰할 수 있으며, 어두운 여호와의 날이 지상을 덮칠 때에도 빛의 근원이 될 수 있다(8:11-22). 유다 백성들과 그 왕이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들은 앗수르 인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와 남은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 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홀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8:11-15).24)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신뢰받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현재의 위기를 통해 남은 자의 출현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왕은 여전히 고대해야 할 미래의 희망이 된다. 아마도 사 4:2은 다윗과 같은 왕을 가리키는 듯 하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회복된 이스라엘―심판 이후에 이루어 질 것임―의 단면을 “여호와의 싹”으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 호칭(“여호와의 싹”)은 렘 23:5과 33:15에서 메시야 혹은 다윗과 같은 왕을 구체적으로 암시한다.25)
적어도 이 어구는 하나님이 정하신 특정한 한 사람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사람은 장차 이스라엘 회복을 감독할 것이다. 임마누엘은 이러한 기대를 고무시킨다. 왜냐하면 이 아기는 뚜렷한 방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와 회복을 이끌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사 9:1-7은 긴장을 경감시켜준다. 장차 임할 다윗과 같은 왕은 지혜로우며 권세가 많으며 영존할 것이며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공평과 공의를 세세토록 보존하실 것이다(9:6-7).
사 9:1-7이 도래할 왕에게 신적 호칭을 부여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래할 왕은 단지 전능한 자가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려질 것이다. 그는 사망을 이기며, 세세 무궁히 통치할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사의 범주 속에 있는) 일반적인 통치자들이 지닐 수 없는 특성들이라 하겠다. 이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한다.26) 그는 하나님으로 불려지며 무수한 천사들의 곁에 계신다. 그의 열심이 그의 통치를 보증한다. 이 왕이 통치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여호와의 날의 그 심판과도 같이, 하늘을 뒤엎고 땅을 소멸시켜버릴 것이다.
아하스가 처한 위기와 이 왕의 도래 사이에,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한 모든 이들이 화를 당할 것이다(9:8-10:4).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해져 여호와의 손에 놓인 도구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하고 심판 받게 될 것이다(10:5-19). 이 모든 일들을 깨닫게 된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의뢰할 것이다(10:20). 이 시점에서, 이사야에 등장하는 남은 자는 분명 여호와를 믿고 의뢰하는 자들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들만이 심판―단기간의 심판이든 혹은 장기간의 심판이든 간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의 선포는 이 남은 자, 즉 그루터기(6:13 참고)를 일으키고 이들을 격려할 것이다.
민족 간의 전투가 임박한 이 상황에서, 여호와는 다시 한번 온 세상의 영원한 평화를 선포하신다. 더욱이 다윗과 같은 왕이 이 평화는 중개할 것이다(11:1-9). 여호와의 날 이후에 다윗과 같은 지상의 재판자가 온 열방을 그에게로 이끌어 “안식의 처소”로 인도할 것이다(11:10). 바로 이 안식, 즉 새 출애굽27)은 남은 자를 위한 것이지만 단지 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온 땅을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정화작업은 온 열방으로부터 남은 자를 모을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가 온 열방을 다스리심을 말해준다(11:12-16).
이사야의 첫 단락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과 안위하심을 고백하는 찬양시로 끝을 맺는다(12:1-6).
정경적 종합: 왕과 남은 자
이사야 1-12장은 이미 소개된 여러 정경적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사 8:20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성서의 사상들이 언약 백성들의 죄를 교정해 주는 수단임을 기억하도록 고무시킨다. 이사야는 시작부터 이스라엘의 언약적 상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출20~레 27장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음―을 거절해 왔다. 이 백성들은 신명기가 요구하는 마음의 헌신을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시킨다. 바벨론 유수―이 사건은 신 27-28장에 예고되었고 왕하 17장에 기술돼 있음―가 이 불순종의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 택한 사자(使者)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민족에게 하나님의 도를 아는 지식을 전달해주며, 그들이 여호와의 은혜를 거절할 때 이들을 책망한다. 후기 선지서들과 성문서의 일부는 이사야의 주장을 확증할 것이다.
또한 사 1-12장은 어떤 정경적 사상들을 명료화시켜준다. 예를 들면, 삼하 7장에 처음 소개된 다윗 언약은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사무엘 상하에 언급된 영원한 나라는 이제 “온 열방”, “전 평화”, “완전한 정의”, “충만한 지혜” 및 “남은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영상들이야말로 창세기~열왕기 그리고 사 1-5장에 묘사된 죄악된 상황 속에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역사를 초월하시는 자만이 역사에 종속된 죄인들을 구속할 수 있다. 오직 다윗과 같은 왕―그의 활동 범위는 역사를 초월한다―만이 역사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위한 성역(聖域)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사 1-12장은 택한 백성의 정체를 명백히 해준다. 여기 민족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과 심령이 완악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6:10-13 참조). 이 두 부류는 여호와의 날에 서로 다른 편에 설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대로 실천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구별될 것이다. 이사야는 이 두 부류의 이스라엘 개념―이 사상은 출 32-34장, 민수기 및 엘리야 기사로부터 유래한다―을 끝까지 확대시켜 나간다. 이전에 이와 같은 신학적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사야 이전의 본문들은 남은 자들과 불의한 자들이 성서에 나타난 인간사에서 어떻게 그들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강조해왔다. 또한 사 1-12장은 라합의 회심, 나아만의 치유와 고백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면서 비(非) 이스라엘 백성들을 남은 자들 가운데 포함시킨다. 다른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진다. 반면 여호와를 거절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거절당한다.
또 다른 정경적 발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으로 정경은 과거를 넘어 현재로, 그리고 임박한 미래에서 하나님이 온 만물을 구속하실 마지막 날의 영상까지 그려주고 있다. 성서에 소개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구속은 종말론 문헌과 미래의 구체적 사건들을 보여주는 묵시문헌들을 통해 더욱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이사야는 마치 자신이 역사의 한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즉, 이사야는 자신이 서있는 역사의 정점이 구속의 완성과 궁극적 희망을 이루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낳은 미래의 희망―이 희망은 역사를 통해 나타나시는 여호와의 성품에 근거한다―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교만한 민족들을 멸하시는 하나님: 사 13-27장
이사야가 보았던 현 실제들 가운데, 유다의 부족함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사야가 살았던 유다는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다. 유다는 스스로 방어할 능력도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 외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7:1-9 참조). 또한 이사야 시대에, 신의 능력은 분명히 그 신을 섬기는 민족의 능력에 따라 평가되었다. 사 13-27장에서, 이사야는 이와 같은 신앙관을 두 가지로 피력한다. 첫째, 사 13-27은 장차 유다가 성장 발전하며 회복되며 뛰어난 족속이 될 것이라 소개한다. 둘째, 이사야는 온 열방보다 뛰어나신 여호와의 주재와 온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권과 오만에 빠진 교만한 나라들에 대한 여호와의 대적하심을 단언한다.
사 13-27에 열거된 몇 몇 족속들은 이미 사 1-12에 언급되었다. 앗수르, 블레셋, 아람, 에돔, 모압, 암몬 및 애굽 민족들―포로기 후 남은 백성들이 이 민족들로부터 돌아올 것이다28) ―이 11:11-16에 기록돼 있으며, 두로와 같은 타 민족들(23:1-18 참고)도 본 단락에 추가된다. 특히 바벨론의 출현은 가장 의미심장하다. 이사야가 장차 임할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선포할 때, 그의 메시지는 바사 제국―주전 612년 앗수르를 정복한 세계적인 대국―으로 말미암은 바벨론의 붕괴(주전 539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사 13-27장에서, 첫 바벨론 신탁(神託)이 이사야에게 임한다(13:1).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 신탁을 이사야 후대에 발생한 것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앗수르가 쇠약하고 바벨론이 주도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사 13장은 이사야 당시의 문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주전 720-708년).29) 아마도 바벨론 사절단들은 반 앗수르 동맹을 위해 유다와 제휴할 목적으로 히스기야를 방문한 듯하다(왕하 20:12-19; 사 39:1-8). 만약 그렇다면, 애굽과 바벨론은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애굽처럼 허풍만 늘어놓는 바벨론은 그들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오만은 능력과는 다르다.
더욱이 다른 2본문들도 이사야 당시의 이 같은 상황과 깊이 연관돼 있다. 사 14:28은 두 번째 신탁이 아하스가 죽던 해(주전 715년)에 임했다고 말하는 반면, 사 20:1은 사르곤 통치에 일어난 한 구체적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신탁이 이사야에게 임했다고 소개한다.30) 이러한 기사들은 미래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 단락에 묘사된 바벨론에 관한 신탁은 다가올 심판을 알려주고 있다. 주의 날이 이르러 여호와는 바벨론의 교만과 오만을 제하기 위해 바벨론과 맞서 싸우신다(13:11, 19). 게하르드 폰 라드(Gerhard von Rad)의 말대로, 전투는 초자연적 요소를 내포한다.
여호와는 당신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신다. 별들이 빛을 잃고 땅이 요동할 것이며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신탁은 제국의 철저한 폐망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 전투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될 것이다. 즉 단지 일개의 전사들이 아닌, 전 민족들이 소집되어 전열을 이룰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전투는 실제 전투 와 유비를 이루고 있다.31)
바벨론의 교만은 그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것이다(14:12-14).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리실 것이다(14:22-23). 하나님은 그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다른 민족들도 더 낫은 바 없다. 앗수르―(하나님의 손에 의한) 앗수르의 멸망은 이사야의 주요 주제이다32)―역시 멸망당할 것이다(14:24-27). 앗수르의 오만은 사 10:5-19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모압(16:6-7), 애굽(19:11-15), 두로(23:7-9)는 그들 스스로를 높여왔기 때문에, 여호와는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도처에 일어날 참혹한 멸망을 미리 바라본다(24:1-13).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또한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14:26-27).
오직 남은 자만이 생존할 것이다. 더욱이 남은 자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이방인도 포함할 것이다(14:1).33) 이와 같은 초민족적 그룹은 시온에 거할 것이며(14:32) 하나님의 산에서 향연을 누릴 것이다(24:6-12). 우상은 제거될 것이며(17:7-8; 19:1-4), 이스라엘, 애굽 그리고 앗수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것이다(19:23-25). 두로는 여호와를 위해 해운과 무역을 행할 것이며(23:17-18), 이것은 모든 삶의 영역이 여호와를 위해 바쳐질 것임을 시사해준다.
마치 바벨론 유수가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고 남은 자들로 하여금 여호와 홀로 하나님이심을 인식하도록 인도해 준 것과 같이(26:13; 27:9-11), 여호와의 심판은 세상의 열방 속에 존재하는 남은 자를 밝혀줄 것이다. 비록 “다윗과 같은 왕”의 역할이 사 1-12장만큼 본 단락에 두드러지지 않지만, 이러한 사상이 본 단락에 부재한 것은 아니다. 사 7:14, 9:1-7, 그리고 11:1-10에 소개된 자와 동일한 인물인, 의롭고 신실하며 자애로운 다윗과 같은 왕은 모압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34) 또한, 남은 자가 되려는 애굽의 소망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들의 구원을 위해 보내진 하나님의 “구원자”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다(10:20-22). 적어도 이 같은 영상들은 도래할 한 왕을 상기시켜준다.35) 비록 교만하고 사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본 단락이 사 1-12의 설명보다 더 광범위하다 해도, 기본적인 사상들은 여전히 동일하다 하겠다.
정경적 종합: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이전 정경본문들은 여호와께서 온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며 다 민족의 남은 자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주장을 준비시켜왔다. 오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특수한 소명을 위해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당신이 지으신 한 족속 애굽을 심판하신다. 전기 선지서 역시 이와 동일한 원리를 피력하고 있다. 전기 선지서에서, 여호와는 미약하나 유일한 족속인 이스라엘을 거듭 대적하신다. 여호와께서 수세기에 걸쳐 애굽, 블레셋, 모압 및 그외 다른 족속들을 징벌하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 나라들을 다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선포는 그리 충격적인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세의 구스인 아내(민 12장), 라합(수 2:1-24; 6:22-25), 그리고 나아만(왕하 5:1-19)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인종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한 분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 따라 구별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계속 연이어 소개될 선지서들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민족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이 민족들은 사 13-23장에 열거된 족속들과 흡사하다. 렘 40-41장, 겔 25-32장, 암 1:2-2:16 및 습 2:1-3:5는 온 세상 위에 뛰어난 여호와의 주재(主宰)를 강조한다. 또한 이 본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정죄하시며 남은 자를 보호하시며 인류의 교만과 악행을 역겨워하심을 강력히 피력한다. 더욱이 위 본문들은 심판이 인간을 통한 간접적 심판이든 혹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든 간에, 여호와께서 심판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 이러한 심판은 악한 세상을 정화시켜주며, 그로 인해 온 세상은 처음의 순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사 24-27장은 미래의 사건들, 최후 심판, 부활 및 악의 멸망에 깊이 집중한다. 그리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 본문을 묵시문헌으로 규정한다.36) 묵시문헌은 기나긴 시간을 살피면서 이 시기들을 세대별로 구분한다. 또한 묵시문헌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며 인류의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그린다. 때때로 묵시문헌은 저자를 익명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의 영역에서 우주적인 영역으로 확대시킨다.37)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사 24-27장은 “구약 예언사의 새 장을 열어주지만 묵시문헌으로서는 아직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38) 사 24-27장은 전통적 예언과 묵시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39)그러므로 본 단락은 다니엘과 스가랴의 비전 뿐 아니라 외경 및 신약에 등장하는 비전들의 사상적 배경을 마련해 준다.
본 단락이 만물의 마지막, 즉 인류역사가 끝날 때 일어날 사건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는 본 단락이 성서신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절정의 순간이 찾아올 때, 여호와의 유일성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여호와는 온 땅을 정결케 할 것이며, 사악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사망을 영원히 몰아내실 것이며 남은 자로부터 찬송을 받으실 것이다(25:6-9). 이 때에 다른 신은 없다. 여호와 홀로 영원한 삶을 남은 자들에게 베풀어주신다. 비록 여러 다른 본문들이 종말과 죽음 이후의 삶을 다루고 있다 해도, 요한 계시록의 기자는 계시록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 25:6-9 이야말로 이러한 사상들(종말과 죽음 이후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계 21:1-8). 이후의 성서기자들은 이사야에 나타난 이러한 사상들을 통해 그들의 종말론적 사상들을 검증해야만 할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은 또한 그 역사 재창조하실 것이다.
남은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사 28-29장
사 28-29장은 이사야의 현 상황과 미래를 서로 넘나드는 이전의 패턴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사 28-3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여호와를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이방민족을 의지할 것인가를 보여준다.40) 마침내 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해 애굽을 의지한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여호와를 의지해야만 한다는 진리는 변할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남은 자를 위해 선포하는 이사야는 여호와를 신뢰할 것을 권고한다. 사 39장이 끝나갈 즈음, 이사야의 요지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 이유는 신실한 선지자와 충성스런 왕이 예루살렘을 앗수르로부터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남은 자를 보호하시고 다신론적 정치수단의 허무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기적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사 1-5장이 정죄하는 죄악들을 똑같이 행하는 백성들을 향해 화를 선포한다. 택한 백성들은 술에 취한 자들이 되었고(28:1, 7), 그들의 선지자들, 제사장들 및 현자들은 분명한 비전을 보지 못하며 올바른 조언을 제공하지 못했다(28:7; 29:14). 유다는 에브라임(북 이스라엘)을 여름과실을 먹듯이 쉽사리 멸망시킨 앗수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굽을 신뢰한다(30:1-7; 31:1-5). 그러므로 유다는 임박한 화―사마리아의 몰락과 산헤드립의 위기는 이러한 재앙의 전형이 된다―를 당하고 말 것이다. 유다를 파괴시킨 자들 역시 이전 본문에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멸망당할 것이다(33:1).
이 모든 재난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남은 자들은 시온의 거처를 발견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 남은 자들을 힘과 아름다움과 공평으로 안위하신다(28:5-6). 남은 자들은 오직 여호와 안에서 기뻐 날뛰는 겸손하고 빈핍한 자들이다(29:19). 남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들(29:22-24)이며, 시온에 그들의 안식처를 발견한다(30:19-33). 남은 자들은 도래할 왕의 인도 하에 피난처를 찾게 될 것이다(32:1-20). 남은 자들은 온 사방으로부터 시온으로 다시 돌아 올 것이다(35:8-10). 사 36-39에서, 남은 자들은 믿음의 왕 히스기야, 노쇠한 신실한 선지자 이사야, 그리고 히스기야의 관료들로 구성된다. 본 단락은 남은 자 사상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와 남은 자의 그 실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정경적 종합: 남은 자와 구원
사 28-39장은 구원이 임박했으며, 그 구원이 장기화 될 것임을 보여준다.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약속은 예루살렘, 시온에 거하던 히스기야와 이사야가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은 주전 701년에 드러난다. 그렇지만 사 25:6-9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영원한 평화는 여호와가 남은 자를 시온으로 모으며 사망을 몰아내실 때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 36-37에 나오는 구원은 여호와의 주도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만이 하나님의 전 사역은 아니다. 즉, 이 구원의 시작은 장차 더 위대한 사건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가 된다.
왕권은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주요 이슈가 된다. 리차드 슐츠(Richard Schultz)는 “사 6-11장에 등장하는 아하스 왕은 믿음을 거절하며 사 28-33장에 나오는 익명의 왕은 애굽을 의지하고픈 유혹에 사로잡히지만, 사 36-39장에 나타난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것은 더 위대한 왕의 통치를 보여주는 선취(先取)라 하겠다”고 진술한다.41) 사 32:1-20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사 32:1-20을 이전 왕가본문(王家本文)들과 서로 연결시켜준다.
왕의 통치는 백성들의 보지 못함과 듣지 못함을 종식시킬 것이며(사 6:9-10 참조), 앗수르의 위협이 끝난 후(31:8-9; 30:15과 32:17에 나오는 “잠잠함”과 “확신”에 대한 언급을 참조하라), 의와 화평의 시대를 가져다 줄 것이다(사 9:6-7[5-6] 참조; 11:5-6).42)
모티어(Motyer)는 새 왕과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가 어두운 시대를 밝게 비쳐줄 궁극적 비전을 제시하는 성서의 종말론 사상과 부합한다고 피력한다.43) 만약 이 왕이 없다면,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사야 본문은 사 7-11에 언급된 다윗과 같은 왕 외 다른 새로운 왕을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본문은 남은 자의 미래의 열쇠가 되는 이 새 왕에 집중하고 있다.
사 36-39장은 성서에 거듭 언급되는, 그리 길지 않은 구약본문들 중 하나이다. 위 본문은 다른 정경본문에 두 번씩이나 언급됨으로 인해 정경의 기능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왕하 18-20장에서, 본 단락의 기사는 유다의 생존과 그 몰락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그의 전 나라를 보여주는 바, 대하 32:24-26은 이를 인간적 교만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적어도 히스기야는 악랄한 앗수르 인을 대적하기 위해 반역적인 바벨론 인들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 이 같은 히스기야의 치밀한 계산에도 불구하고, 왕하 20:12-21과 사 39:1-8은 장차 바벨론이 유다를 통치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기록한다. 주전 8세기경에 발생한 이 사건은 주전 587년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시해 준다. 열왕기와 이사야서에서, 예언의 정확성은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고 계심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미래를 알려주신다.
또한 열왕기와 이사야서는 앗수르로 대변되는, 거만한 악의 세력들을 파하시는 여호와의 구속의 능력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왕하 19:20-37; 사 37:21-35). 여호와는 백성들의 순종여부에 따라 구원하시기도 하고 파멸시키기도 하신다. 이러한 원리들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사건들은 이러한 사상들을 담고있는 1-35장의 메시지를 확증해준다.
미국 남 침례교 신학교 구약교수(호주 퀸즈랜드 대학교 Ph.D., Cand)
1) 본 아티클은 폴 하우스(Paul R. House)의 구약신학(Old Testament Theology, IVP, 1998) 중 10과를 모두 완연한 것으로, 본서의 출간을 계획 중인 기독교 문서 선교회의 허락을 얻어 기재함을 밝혀준다.
2) Bunyan Davie Napier, "Prophet," in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ed. George Arthur Buttrick, 4 vols. (Nashville, Tenn.: Abingdon, 1962), 3:896-919.
3) Edgar W. Conrad, Reading Isaiah,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Minnepolis: Fortress, 1991)을 참고하라.
4) Christopher R. Seitz, Isaiah 1-39,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Ky.: John Knox, 1993), 그리고 Christopher R. Seitz, ed., Reading and Preaching the Book of Isaiah (Philadelphia: Fortress, 1988)을 참고하라.
5) Rolf Rendtorff, Cannon and Theology: Overtures to an Old Testament Theology, ed. and trans. Margaret Kohl,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3), pp. 146-89을 참고하라.
6) Brevard S.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80), pp. 311-38; 그리고 Ronald E. Clements, "The Unity of the Book of Isaiah," Interpretation 36/2 (April 1982): 17-129을 참고하라. 비록 Clements가 편집비평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해도, 그의 접근방식은 정경비평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분명한 듯하다.
7)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p. 325-38.
8) J. A.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3), pp. 9-34.
9) 이사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뛰어난 연구서로서, John G. Gammie, Holiness in Israel,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89), pp. 71-101을 참조하라. J. J. M. Roberts는 “만약 전 이사야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의 여호와의 비전이다”고 진술한다.
10) John 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 1-39,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6), p. 34.
11) Christopher R. Noth, The Second Isaiah (Oxford: Clarendon, 1964), p. 16.
12) John Skinner,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2 vols., Cambridge Bible Commentary (1917; repri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 2:xlviii.
13) John D. W. Watts, Isaiah 1-33, Word Biblical Commentary 24 (Waco, Tex.: Word, 1985), p. lv.
14) North, The Second Isaiah, pp. 12-13, 17-18을 참조하라.
15) R. N. Whybray, Isaiah 40-66, New Century Bibl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1), p. 30을 참조하라.
16) Watts, Isaiah 1-33, p. lv.
17) 이러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명백한 예로서 행 8:26-39을 보라. 여기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장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18) Seitz, Isaiah 1-39, p. 125.
19) Hans Wildberger, Isaiah 1-12, trans. Thomas H. Trapp, Continental Commentaries (Minneapolis: Fortress, 1991), p. 21.
20) Hans Wildberger의 Isaiah 1-12 가운데 사 7:1-17과 관련된 문헌들의 목록을 참고하라. Ibid., pp. 279-82.
21) Walter C. Kaiser Jr와 같은 보수주의 학자조차도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 Walter C. Kaiser Jr., The Messiah in the Old Testament, Studies in Old Testament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95), pp. 158-62을 보라.
22)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86.
23) Otto Kaiser, Isaiah 1-12, trans. R. A. Wilson,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2), p. 105.
24) Joseph A. Alexander, Commentary on the Prophecies of Isaiah (1846; reprint,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53); 그리고 Joseph A. Alexander, Commentary on the Later Prophecies of Isaiah, ed. John Edie (New York: Wiley and Putnam, 1847), pp. 190-91; 그리고 Ronald E. Clements, Isaiah 1-39, New Century Bibl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0), pp. 98-100을 참고하라.
25) Edward J. Young, The Book of Isaiah, 2nd ed., 3 vol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72), 1:174을 참조하라.
26)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102을 참조하라. 그리고 Wildberger, Isaiah 1-12, p. 404와 대조해 보라.
27) John F. A. Sawyer, Isaiah, 2 vols., Daily Study Bibl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4), 1:125-27.
28) Seitz, Isaiah 1-39, p. 115.
29) Oswalt, Isaiah 1-39, pp. 300-301을 참조하라. 이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려면,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2n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2), pp. 278-83을 참고하라.
30) 이 사건은 아마도 주전 712년경에 발생했을 것이다. Bright, A History of Israel, p. 280; 그리고 John Haralson Hayes and Stuart A. Irvine, Isaiah, the Eighth-Century Prophet: His Times and His Preaching (Nashville, Tenn.: Abingdon, 1987), pp. 268-69을 참고하라.
31)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David Muir Gibson Stalker, 2 vols. (New York.: Harper & Row, 1962-1965), 2:120.
32) Clements, Isaiah 1-39, p. 146.
33) “이방인”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려면, Sawyer, Isaiah, 1:142; 그리고 Otto Kaiser, Isaiah 13-39, trans. R. A. Wilson,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4), p. 25을 참고하라.
34) Young, Isaiah, 1:463-64; 그리고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152를 참고하라.
35) Walter C. Kaiser Jr., Toward an Old Testament Theology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78), p. 211.
36) 이에 대한 Clements의 뛰어난 해석을 살펴 보라. Clements, Isaiah 1-39, pp. 196-200.
37) H. H. Rowley, The Relevance of Apocalyptic: A Study of Jewish and Christian Apocalypses from Daniel to the Revelation, 3rd ed. (1994; reprint, Greenwood, S.C.: Attic, 1980), pp. 16-17. 또한 Paul D. Hanson, The Dawn of Apocalyptic: The Historical and Sociological Roots of Jewish Apocalyptic Eschatology, rev. ed.(Philadelphia: Fortress, 1986), p. 11을 보라.
38) Sawyer, Isaiah, 1:204.
39) Clements, Isaiah 1-39, pp. 196-97.
40) Oswalt, Isaiah 1-39, p. 504.
41) Richard Schultz, "The King in the Book of Isaiah," in The Lord's Anointed: Interpretation of Old Testament Messianic Texts, ed. Philip E. Satterthwaite, Richard S. Hess and Gordon, J. Wenham, Tyndale House Studies (Grand Rapids, Mich.: Baker, 1995), pp. 150-54.
42) Ibid., p. 150.
43)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257.
44) Paul D. Hanson, Isaiah 40-66,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Ky.: John Knox, 1995), p. 29. Hanson은 사 40:18-20이 40-55장의 주요 주제인 유일신 사상의 기원이 된다고 정확하게 평가한다.
45) Skinner,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2:11.
46) Bernhard Duhm, Das Buch Jesaia (Göttingen, Germany: Vandenhoeck und Ruprecht, 1892), p. 311을 참조하라.
47) James Muilenbrug, "The Book of Isaiah, Chapter 40-66," in Interpreter's Bible, vol. 5 (New York.: Abindon, 1951-1957). Muilenburg는 전 이스라엘을 그 종으로 간주한다. Johannes Lindblom은 이 종이 이스라엘에 대한 풍유적 이미지라 생각한다. 그의 The Servant Songs in Deutero-Isaiah: A New Attempt to Solve an Old Problem (Lund, Sweden: Gleerup, 1951)을 보라. 이러한 해석들에 동의하면서도 몇 몇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견해들도 제시돼왔다.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개관을 살펴보려면, Christopher R. North, The Suffering Servant in Deutero-Isaiah: A Historical and Critical Study, 2nd ed.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6), pp. 6-116을 참고하라.
48) 예를 들면, Whybray, Isaiah 40-66, pp. 70-73.
49) 예를 들면, Young, Isaiah, vol. 3; 그리고 Geoffrey W. Grogan, "Isaiah," in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6, ed. Frank E. Gaebelein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76-1992).
50) 예를 들면, John D. W. Watts는 Isaiah 34-66, Word Biblical Commentary 25 (Waco. Tex.: Word, 1987), pp. 119, 187, 201 그리고 229에서, 고레스, 다리우스 그리고 스룹바벨이 그 종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51)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2:250-62; George W Coats, The Moses Traditions, JSOTSup 161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Press, 1993), pp. 133-41, 182-89; Scott J. Hafemann, Paul, Moses, and the History of Israel: The Letter/Spirit Contrast and the Argument from Scripture in 2 Corinthians 3 (Tübingen, Germany: Mohr/Siebeck, 1995), pp. 101-19; 그리고 Gordon Paul Hugenberger, "The Servant of the Lord in the 'Servant Songs' of Isaiah," in The Lord's Anointed: Interpretation of Old Testament Messianic Texts, ed. Philip E. Satterhwaite, Richard S. Hess and Gordon J. Wenham, Tyndale House Studies (Grand Rapids, Mich.: Baker, 1995), pp. 105-40을 참고하라. Hugenberger의 아티클은 종의 노래에 대한 학문적 토론을 잘 소개하고 있으며 제2모세의 견해를 더욱 견고히 한다.
52) H. Wheeler Robinson, "The Hebrew Conception of Corporate Personality," in Werden und Wesen des Alten Testaments, ed. Paul Volz, Beihefte zur Zeitschrift für die Altestamentliche Wissenschaft 66 (Berlin: Töpelmann, 1936), pp. 49-62.
53) Hanson, Isaiah 40-66, p. 41.
54) H. G. M. Williamson, The Book Called Isaiah: Deutero-Isaiah's Role in Compostition and Reda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p. 2.
55) 이러한 해석은 49:3의 “이스라엘”을 본문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 문제를 다룬 연구서로서, John L. McKenzie, Second Isaiah: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Notes and Commentary, Anchor Bible 20 (Garden Cith, N.Y.: Doubleday, 1968), pp. 105; 그리고 North, The Second Isaiah, pp. 187-88을 참고하라.
56) Hanson, Isaiah 40-66, pp. 140-41.
57)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408을 참고하라.
58) Claus Westermann, Prophetic Oracles of Salvation in the Old Testament, trans. Keith R. Crim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1991), pp. 42-43.
59)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408을 참조하라.
60) Clements는 “열방의 빛”이라는 표현이 이사야의 통일성을 증명해주는 가장 주요한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Ronald E. Clements, "A Light to the Nations: A Central Theme of the Book of Isaiah," In Forming Prophetic Literature: Essays on Isaiah and the Twelve in Honor of John W. Watts, ed. James W. Watts and Paul House, JSOTSup 235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을 보라.
61) McKenzie, Second Isaiah, p. 133.
62) Von Rad, Old Testament, 2:257.
63) Walther Zimmerli, Old Testament Theology in Outline, trans. David Eliot Green (Edinburgh: T & T Clark, 1978), pp. 223-24.
64)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2:257 n. 31.
65) North, The Suffering Servant in Deuttero-Isaiah, pp. 147-48.
66) Claus Westermann, Isaiah 40-66, trans. David Muir Gibson Stalker,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p. 267.
67)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440.
68) James, D. Smart, History and Theology in Second Isaiah: A Commentary on Isaiah 35, 40-66 (London: Epworth, 1967), p. 195.
69)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p. 443-44. “판단을 위한 요청”으로서의 사 54-55장과, 그 이전 본문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려면, Ulrich E. Simon, A Theology of Salvation: A Commentary on Isaiah 40-55 (London: SPCK, 1953), pp. 222-41을 참고하라.
70) North는 사 55:3-5이 시 18:43-45를 반영하고 있으며 정치적 지도력 보다 영적인 지도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North, The Second Isaiah, pp. 258-59를 참조하라.
71) Smart, History and Theology in Second Isaiah, p. 224. 그렇지만 Smart는 이 종을 이스라엘로 간주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접근은 본서의 접근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72)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p. 454-55.
73) 그 종에 대한 분석과 종의 노래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살펴보려면, John Goldingay, God's Prophet, God's Servant: A Study in Jeremiah and Isaiah 40-55, Bible Classics Library (Carlisle, U. K.: Paternoster, 1994)을 참고하라.
74) Roberts, "Isaiah in Old Testament Theology," pp. 133-34; 그리고 North, The Second Isaiah, pp. 13-16.
75) McKenzie, Second Isaiah, pp. lviii-lxi; 그리고 Skinner,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2:xlvi-li. Westermann, Prophetic Oracles of Salvation, p. 39를 참조하라.
76) Roberts, "Isaiah in Old Testament Theology," p. 134; McKenzie, Second Isaiah, p. lxvii; 그리고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22을 참고하라.
77) H. H. Rowley, The Faith of Israel: Aspects of Old Testament Thought (London: SCM, 1956), p. 185.
78)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461.
79) Rendtorff, Cannon and Theology, pp. 181-89을 참고하라.
80)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2:280.
81) Rendtorff, Cannon and Theology, pp. 155-60을 참고하라.
82) 사 50-60장이 “빛과 어두움”이라는 주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살펴보려면, Hanson, Isaiah 40-66, pp. 219-20; 그리고 Clements, "A Light to the Nations."을 참조하라.
83) Westermann은 “이러한 유비는 뚜렷하다”고 말한다(Prophetic Oracles of Salvation, p. 85).
84)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2:280-82을 참고하라.
85) 사 61:1과 사 42:1-4간의 유비를 살펴보려면, McKenzie, Second Isaiah, p. 181을 참조하라.
86) Hanson, Isaiah 40-66, p. 224. 이 사람의 겸손과 사 42:1-4에 나오는 종의 겸손을 주목해 보라.
87) 선택받은 예루살렘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려면, Ronald E. Clements, Old Testament Theology: A Fresh Approach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8), p. 91을 보라.
88) 마치 두 부류의 이스라엘(종/남은 자와 불신자)이 있는 것과 같이, 이방인들 역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사 60:10-11에서, 시온에 찾아올 이방인들은 그 성읍을 향해 기꺼이 예물을 들고 오겠지만, 반역하고 압제하는 이방인들은 심판 당할 것이다(사 60:12-14).
89)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p. 540-41.
90) Zimmerli, Old Testament Theology in Outline, p.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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