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개혁주의 윤리학

예림의집 2014. 3. 19. 22:39

개혁주의 윤리학

1960년대의 미국 사회는 월남전의 영향으로 어수선하여 허무주의, 히피족의 대두. 사회에 역행하는 풍습이 일어남. 흑인 인권 운동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의해 주도. '시민불복종운동'이 일어남.

(※말콤 엑스 - 과격, 킹 목사 - 온건)

극도의 개인주의를 나타냄. Robert Bellar(종교사회학자)의 [Habits of the Hearts]에는 현 미국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종교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규범이 아닌 극도의 개인주의다. 즉 개인주의가 하나의 종교로 등장했음을 시사. 개인의 유익이나 개인적 동기로 행동하는 세태를 반영. 미국사회가 앞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위해 옛날의 정서인 공동체와 집단이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하여(community of memory) 어디서 이것을 찾아야 하는가를 물음. 1986년에 이 책이 신학교의 필수 교재가 되어져 있었다. 현대 목회자는 현대 사회, 현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 현대사회는 기존의 도덕과 질서로 규범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한 시대. 그 이유는 급변하는 세대, 다양한 세대, 다양한 잇슈들이 많이 생겼다. 따라서 교회는 낡은 틀과 규범으로 현대사회를 대처하여 살도록 요구하기는 힘들다. ex. 혼전성교, 동성애, 낙태 등. 성적문란함이 비일비재, 신학교 내에서도 많다. 게이와 레즈비언 등이 신학교 내에서도 행동함. 하나님에 대해서도 남성(男性)을 사용하기 힘든 시대이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He'라고 하면 안되고 God's, ones, one 또는 He/She 로 사용. 보다 포괄적인 표현으로 사용.(Indusive한 표현을 사용). 전통적 규범을 무너져 가고 있다. 70년대 이후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많이 변했다. 변화하는 시대에 살면서 시대에 부합한 원리가 필요한 시대다. 수사(修辭), 슬로건, dogmatic, 교조적인 것으로 교회를 이끌어갈 수 없다. 이 시대의 문제를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규범의 anomi 상태와 저가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바른 윤리와 규범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교인들에게 바른 진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은 어디에 기초해야 하는가? 생활윤리의 토대는? 판단의 기준과 원리는 무엇인가? 어디서 이것을 찾으며 어떻게 알수 있는가?

기독교윤리학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윤리적이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사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내적 원리를 주셨음을 전제. 하나님의 그 내적 원리를 구성하는 것이 과제다. 즉 일반인의 행동의 근거는 제각기 다르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기준을 지닌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

기독교윤리학의 목표 ① 하나님이 어떤 기재를 주었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지는 관찰, 구체적인 잇슈보다는 윤리적 생활, 행동의 패턴을 결정하는 근거, ② 결단에 도움이 되는 원리, 기재가 무엇인지 연구.(이론적 도움) ③ 개혁주의 윤리학의 특징에 관심.

9/5(화요일) 개혁주의 윤리학 수업 중간고사 -> 10월 10일

범위 1-6장까지 읽고 시험 (O.X 15문제 2-3개 주관식 또는 단답식)(기독교 윤리학의 정의와 윤리학적 행위의 기준과 관점에 대한 이론, 기독교윤리학의 특성, 개혁주의 윤리학에 대해서 다룸.)

1. 서론

1) 정의

윤리와 도덕의 차이점

윤리 : ethic (어원 : 습관, 관습, 거처, 울타리) 안정성, 터를 제공. 여기서 윤리가 파생

도덕 : 라틴어 mos에서 왔다. mos> mores> morality. 관습, 습관의 뜻을 지니고 있다. 어원적으로는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어떤 사회 그룹 내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행동이 받아들여지는가를 서술해 주는 성격을 지닌다. ① 시대와 지역 ② 전통과 공동체에 따라 다를 수 있음. 서술적인, 직설법적인 특징을 지닌다. 곧 Is에서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진 것으로 Ought to의 명령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와 도덕과의 차이가 무엇인가? 평상시에는 우리는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것의 차이를 말하기는 약간 까다롭다.

윤리라는 것은 도덕의 반성이다. 도덕을 보다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비판적으로 연구한 것이 윤리다. 즉 이론적 지적 사색적 뉘앙스를 지님. 실제로는 우리는 이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 가치(value) : 상대적(개인적),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 각자의 가치관은 상대적인 것이다

● 도덕/윤리(moral/ethic) : 양심의 강제성이 있지만 원칙적으로 강제성이 없다. 자원성이 강함

● 법(law) : 강제성을 지님, 구속력을 지님. 처벌이 있다.

● 규범(norm) : 잣대(scale), 표준, 기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 덕목(virtue) : 탁월한 자질. 지혜,용기,절제,정의(아리스토-)+믿음,소망,사랑(기독교 덕목)

윤리라는 것은 한자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 사이에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 이치에 관한 연구이다. 그래서 윤리학의 관심이 이때까지 인간의 행위에 집중되어 왔다. 인간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에 관심을 가져왔다. 최근에 들어서 스탠리 하워드는 이 논의에 반박하여 기독교윤리학이 인간의 행위에만 관심을 가져온 나머지 그 행위를 내리는 행위의 에이전트(행위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하였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로 형성되어져 가야할 것인가에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함. 기독교공동체의 특성은 예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자라감으로 community함 예수 사건을 듣고 닮아가려 하고, 전수하는 것이 도덕적인 성장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함. 도덕적이 된다는 것이 예수 사건에 젖어 들어가는 것이며 배워가는 과정이다. 예수의 스토리가 지니고 있는 틀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며 도덕적인 삶으로 형성되어져 가는 것이라고 함. 이 주장은 성화에 강조를 둔 것에서 이해할만하지만 아직까지도 주류의 경향은 여전히 그 도덕행위자가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강조를 두고 있다.

일반 윤리학은 강요된 행위가 아니라 자원된 행위에 대해서 옳은지 나쁜지, 착한지 못된지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을 가늠하는 데에 필요한 기준,방법, 원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윤리학이란 위의 정의에 덧붙여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원적인 행동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즉, 다양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 명령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칼 바르트는 기독론적으로 연구 : 윤리적인 삶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고 말씀하시는 예수에 대해서 응답하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순종, 응답 이것이 기독교 윤리학의 키(key)요소이다. 윤리학은 행동, 행위자, 당위 등의 요소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2)윤리학의 판단의 틀(형태), 또는 경향

윤리는 당위의 학문이다(해야만 한다 ought to, should, sollen). 해야할 표준은 무엇인가(당위의 표준)? 유대교는 토라, 기독교사회는 성경, 유교사회는 삼강오륜 등이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윤리적이다라고 할 때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이다.

당위의 유형이 두 가지로 논의되었다. ※ meta(기준) 윤리학 : 옳고 그름의 기준, 전제 등을 논의하는 것. 판단의 기준.

(1) 목적론적인 윤리(Teleological Ethics)

a. 대표적 학자 :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산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하는 행동이 윤리학의 과제. 인간의 행동이 목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판단한다.

b. 중요한 이슈, 질문 : 무엇이 지금 나에게 선한 행동을 가져오는가? 인간이 추구해야할 목표가 무엇인가?에 두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대표적인 학자인 아리스토틀은 윤리에 있어서 행복을 가져다 줄 때에 윤리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c. 목표 : 선(good)에 두고 있다. 이 윤리를 선(good)의 윤리라고 한다.

d. 인간관 : 제작자로서의 인간을 말한다.(man the maker)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강조한다.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가하면 선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선(good)을 가져다 주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판단한다. 어떤 의미에서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성경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돈, 지위, 행복, 쾌락일 수 있다. 다수에게 정당화되어질 때 윤리적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e. 비판 : 개인을 무시

(2) 의무론적인 윤리(Deontological Ethics)

인간이 처하는 행동, 결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그 무엇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의무와 법, 규칙을 강조한다. 행위자의 동기를 강조한다. 스스로의 양심과 내면적 도덕기재에 의해 알 수 있음. 인간은 누구나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데 마땅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내적인 지침, 법, 의무를 다하는 것이 윤리적인 행동이다.

a. 질문 : 내가 준수해야 할 법과 의무가 무엇인가? 순종의 윤리, 마땅히 해야할 윤리

b. 옳음의 윤리(right of ethics), 순종의 윤리(obey of -)

c. 인간관 (H. Richard Niebuhr) : 시민으로서의 인간관, 법 아래서의 인간.

d. 대표적 학자 : 임마누엘 칸트가 대표적 학자. '만인에게 법칙(준칙)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행동하라. 보편적인 도덕법칙 강조. right 과 good 과의 관계는 right의 관점에서 good을 보는 것에 의존.

e. 비판 : 결과를 무시하는 제한성이 있다. 비현실적인 것일 수가 있다. 형식주의적인 것에 빠질 수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 H.Richard Niebuhn는 기독교가 이 의무론적 원리에 가깝다고 보았으나 현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는 위의 (1), (2) 만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이 대처해 나가기는 부족하다 따라서 책임론적인 윤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3) 책임론적 윤리(H.Richard Niebuhn)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의 요소가 다 스며들어 있다. 그는 지금 무엇이 내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짐.

a. 윤리적인 질문은 "지금 내 주위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 "와 "지금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이 하나님의 행동에 적합한 방법으로 반응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함.

b. 책임의 윤리, 응답의 윤리를 강조한다. 그에 있어 책임이라는 말은 ① 행위 주체자가 자기에게 어떤 행동이 가해졌을 때에 ② 그 행동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여서 ③ 그 행동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고려해서 해석하고 응답하는 것이 책임이라는 것이다. (실존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상황이해를 아주 중시한다. H.R.은 "이사야는 자기백성들에게 권면할 때에 ~~~~(녹음기에서 청취해서 기록할 것)

c. 인간관 - Man the Answerer(응답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체적인 목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함께 행동하시는 분으로 생각. 지금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맡게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목적과 의무, 상황 등을 모두 고려해서 응답(firtting response)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 흑인 차별에 대한 것 : ① 법테두리 안에서? ②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 하나님과 인간과 인간과 인간간의 삼중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d. 의의 : 책임윤리는 완전한 새로운 윤리를 제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행위 주체자로서의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현실 인식능력의 중요성,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묻게 만들고 어느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를 묻고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가, 어떤 행동이 적합한 행동인가를 강조하는 것에 기여가 있다.

e. 비판 : ① 의무론적인 윤리에서 강조하는 것인 하나님의 명령인데 반해 책임론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일치시키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으로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 명령으로서의 말씀의 권위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② 그리고 책임있는 응답을 강조하는데 인간과의 질적인 차이가 있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응답함에 있어서 인간이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니버의 해답은 빈약한다. 니버는 하나님과 인간의 떨어져 있는 공간을 신앙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질적으로 뛰어넘음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앙으로 결단함으로 이 질적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신앙의 도약) 이러한 주장은 주관주의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의 제한된 판단, 직감, 감정, 이성에서 인식되는 하나님의 뜻의 파악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느냐하는 점에서 책임윤리의 제한성이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의 오류, 목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옳음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면 결단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점에 있어서 책임윤리는 주관주의적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 상황윤리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4) 기독교윤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① 위의 세 가지 윤리 중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Mix된 것이다. 어느 관점도 정확한 답을 줄 수는 없다. 주의해야 할 것은 100%의 정답을 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근사치적인 정답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② 그리고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빠져서도 안된다. 기독교 도덕을 몇 가지 규칙들의 집합체로 환원시킬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정적으로는 주체자인 본인이 그 원리들 앞에서 책임적인 응답을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잇슈의 답을 제공해 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도전하고 선택사항을 알려주고 원리를 강하게 하고 고통가운데서 결단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근사치에 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어느 정도의 관용을 가질 수 있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의 성격과 특징

위의 3가지는 기독교 윤리학의 한 경향이었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지녀야 한다. 그럼 칼빈주의, 개혁주의 윤리학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의무론적 윤리가 의무 명령(imperative)을 강조한다면 목적론적인 윤리는 서술적인(indicative), 묘사적인 윤리이다. 즉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책임론적인 윤리는 책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위의 것을 포함하면서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윤리학의 성격은 무엇인가?

① 일차적으로 규범적이고 처방적이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규범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명, 율법이 바로 기독교인의 행동 지침으로 삼아야 할 보편적인 규범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는 규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강조하는 입장에 대해서 현대개신교 신학은 지나친 율법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지적,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에 대한 신뢰(자신감, 19세기 자유주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성경에 나타난 계명으로 환원시켜 축소하기 보다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등 이 사랑의 규범으로 환원해서 해석할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함. 사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정통적 기독교 윤리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객관적 서술과 행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위해 일반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회과학과는 다른 것이다.

① 사회과학 :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 예측하는 것이 사회과학이다. 어떤 면에서 앞의 일에 대해 제의할수 있다.

② 기독교 윤리 : 처방적이다. 규범적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적인 위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윤리는 도움을 받아야 함은 사실이다. 보다 relevant한 norm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야 현실에 대한 규범을 제시할 수 있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은 물론 성경밖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도 읽을수 있어야 한다. 사회현상 분석이 필요하다. 즉, what is에 사회학이 관심을 가진다면 기독교는 what ought에 관심을 가진다.

규범의 근거

그러면 규범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의 명령에서 가져온다.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뜻으로 풀어서 가져오면 성경외에서도 드러나 하나님의 뜻을 가져와야 한다. 신학의 작업이 따라야 하며 특히 교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믿음에서 규범을 가져와야 한다. 교의학 즉, 신학은 믿어져야 할 교리라면 이 믿어져야 할 교리는 원칙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윤리학과 교의학의 관계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바울서신이 두부분으로 나눈다. 교리와 삶이다. 바울서신의 특징은 '그러므로' 이다. 교리

+ 그러므로 + 윤리적 삶. 갈5:6에서 Faith working througs love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상황윤리가 상황만을 강조하여 규범을 놓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규범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상황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규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교리에 깊이를 두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교의학과 윤리학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강요 3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은 doxy → praxis를 말한다. 상황윤리는 교리적인 내용이 없는 윤리이다. 그러므로 방향감을 상실하기 쉽다. 전통신학의 계속적인 과제로 남음.

개혁주의 윤리학의 성격 : 신명론(神命論,Divine Command Ethics)

기독교 윤리학을 일반 세속학문에서 구분 할 때 신명론(Divine Command Ethics)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기독교 윤리학이 하나님의 명령을 규범으로 하는 것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개혁주의 윤리학은 기독교윤리학의 어떤 신학적인 전통보다도 이 것, 즉 하나님의 명령이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제시되든 간에) 인간들의 윤리적인 행동을 위한 규범으로서 충분하다는 신학적 입장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주의 윤리학의 특징은 명령자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세계관에 터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이 입장을 일컬어 우리는 신명론Divine Command Ethics, 즉 하나님 명령의 윤리라 한다.

개혁주의 윤리학은 인간의 도덕적인 생활(윤리적인 생활)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합이하게 생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윤리적인 삶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이것은 도덕적 삶을 사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과 권고는 우리들의 지혜보다 훨씬 신뢰할만하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데 유익하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흠이없고 인간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수 있도록 인도하기에 부족하지 않는 분이라는 인식에 터하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우월성의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이 휠신 인간보다 탁월하다).

신명론 비판론자들의 주장

그러면 인간이 자율성이 없이 단순히 순종만 하는 것은 도덕 발달의 단계에 있어서 미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인간에게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율적인 성격 즉 Indicative적(서술윤리적인 성격, 묘사적, 표현윤리적 성격) 성격은 없고 오직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Imperative적인 성격만 있고 타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단순히 순종하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가르치는 하나님 명령의 윤리(신명론)은 오히려 도덕적 성숙을 방해하는 미성숙을 조장하는 윤리는 아닌가? 일부 비기독교학자들은 인간이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라고 하면서 인간의 서술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이러한 서술성의 윤리적 입장을 강조한다.

우리의 주장

그러나 개혁주의 윤리학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절대적이시고 탁월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질문에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리스도인이 인식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간보다 탁월하시고 우월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그 구체적인 인도를 받는 것이 어째서 미성숙하고 유아적인 것이냐? 오히려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월등하신 분의 인도와 지도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유아적, 고집적인 행동이 아닌가? 하나님의 지식의 완전하심을 부인하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한 인식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 그 자체가 유아적인 자세라 할수 있지 않는가? 특히 인간의 죄인됨과 인식에 있어서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식할 때, 오히려 지식과 능력과 선하심에 있어서 우리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윤리적일 수 있는 첩경이 될 수 있지는 않는가?

Erich Fromm, Jean Piajet는 대표적인 반대의 인물이라 할수 있다. 이들은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성숙할수록 타율적인 삶(heteonomy)에서 자율적인 삶(autonomy)으로 전환(transition) 해 간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해 하나님 명령의 윤리(神命論,Divine Command Ethics)을 비판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완전한 자율성을 가지고 그대로 행동해서 도덕적인 옮음과 선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타락한 인간의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태도인데, 도덕적으로 월등한 자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타락한 인간의 반역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자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Commander - Obeyer 즉 명령자와 순종해야 할 자로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 개혁주의 윤리학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사는 삶이 결코 도덕적인 성숙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홉스가 말하는 것과 같이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명령하는 그러한 독재자와는 다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위정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② 하나님은 독재자, 군주가 아닌 규칙과 규율을 통해 그리고 창조의 질서와 법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준해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하여 따르도록 하셨다.

이것은 칼빈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법은 계시된 말씀에도 들어나 있지만 창조의 질서(자연법칙, 자연법-도덕법) 속에서도 들어 있다. 이 창조세계를 잘 관찰하면 하나님의 뜻을 어느정도 발견하게 된다. 칼빈도 창조세계야 말로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 자신을 보여준 계시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창조세계는 하나님을 배워가는 학교와 같은 것이다.

소위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창조의 질서, 창조의 법칙(도덕법, 자연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창조세계와 인간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변치않는 뜻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면서 동시에 다스리시는 분이신다. 일정한 패턴을 따라서 인간들이 순종하고 사회가 질서있게 운영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잘 파악하고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개혁주의 윤리학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독재자의 명령에 대해 맹목적이고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이로 다루지 아니하시고 Adult 성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책임있는 순종을 원하신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무조건적으로, 깊은 이해와 생각없이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듯을 적극적으로 분별(Discerning)하고 아울러 책임적인 순종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일방적인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Covenantal Partnership으로서의 쌍방적인 관계 즉 신뢰에 기초한 자원적이고 또 책임있는 순종을 하고 자원적으로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Covenantal Partnership언약의 동반자의 관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이런 면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칼빈주의적 윤리학은 결코 자율적 서술적 윤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명령(imperative)에 대해 윤리적 동반자로서의 인간의 자원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즉 Indicativ적 행동을 아울러 강조하는 윤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악한 현실 속에서 의롭게 된 죄인의 도덕적인 한계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계명을 규범으로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보다 잘 지키며 살아가도록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인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Trust)와 아울러 겸손(Humility)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도덕적으로 이끌기에 필요한 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 세상에서 책임있게 순종할려는 '성숙한 타율성'(Mature Heteronomy)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이 성숙한 타율성은 인간 자체속에서 나오는 서술성 자율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존중하고 그것에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책임적으로 순종할려는 비기독교적 서술성, 자율성과 다른 기독교적 서술성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윤리학을 잘 설명해 주는 입장이다.

 

9/19

신학 : 삼위일체적 신학이다.

윤리 : 창조, 타락, 구속의 패턴 속에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시각에 있어서 우주적이다라는 윤리에 있어서 우주적이라고 하는 것. 창조 세계의 구원에 촛점을 말한다. 우리의 시각이 개인의 경건생활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세계에 맞추어 나갈려고 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볼트 역시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창조의 세계가 종말에서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현재는 창조의 회복으로써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구속하신 창조질서 가운데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대로 행해나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CRC들은 Neo-Calvinist의 견해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란 창조, 타락, 구속을 우주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10/17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주어진 율법에 나타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강조한다.

율법(Law)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구약에 나오는 모세의 법

② 구약 전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지칭해서도 사용함. 특별히 언약공동체에 준 명령과 율례들을 말한다. 이미 신명기에 보면 요단강을 건넌 뒤에도 돌판에 새겨져서 기록되어질 내용, 언약궤에 보호되어져야 할 내용들을 말함. 가나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말한 내용까지 포함함.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일반적으로 모세 오경 중심의 법이상의 것으로 지칭하고 있다.

③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론 : 율법이라고 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모세 오경, 십계명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법을 말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상징법 : 교훈적인 시사를 던저주는 법

도덕법 :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법들을 말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부분으로 나누었고 종교개혁자들이 받아들여짐. 현대까지 받아들여짐.

의식법 : 제사와 관련된 종교의식. 레위기서를 중심으로 한것.

시민법 : 신정국가의 이스라엘이 그 당시 사회에서 필요한 시행세칙.

도덕법 : 일상 삶에 있어서 지켜야 할 도덕적인 규례라 할 수 있다.

의식법, 시민법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더이상 유효하지 못하다. 의식법은 그림자로서의 역할이지 문자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엡2:14, 골2:13절에서 의문에 속한 법이라고 표현함.

시민법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신정국가와 사회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신정사회에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상황에서만 적용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해체와 함께 사라진다고 볼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트 19장 3,4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참조하라. 문자적인 시행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함. 그렇지만 도덕법 십계명은 오늘도 유효하다. 그렇지만 의식법, 시민법 이것이 완전히 폐지되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문자적 적용은 곤란하지만 그 법칙들의 내용, 가치, 지혜 등은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 가치있는 내용들로 볼수 있다. 중요한 원리들을 뽑아낼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해 줄수 있다. 세부사항은 다르지만은 의식법과 시민법에 내재되어져 있는 것은 오늘 사회에도 여전히 도움이 되는 것이다. 빛으로 반사시킬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혀 무용지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의식법 시민법이 규칙과 법전으로 구속과 영향력이 상실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리와 표준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 법에 대해서 신약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마5:17 율법을 완전케 하려 왔다고 함. 이것은 어떤 면에서 성취한다고 번역할 수 있다. 재확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의미를 더욱더 풍부하게 충분하게 드러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미를 더욱 충분히 드러내고 그리고 더 진전된 의미를 첨가하는 것이다. 문자적인 부분에 대한 중지, 그리고 참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율법의 세가지 용법

① 시민적 용법 ② 교육적 용법 ③ 교훈적 용법

1) 시민적인 용법

시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능을 한다. 정치적인 용법.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착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회의 덕목과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셨다. 사람들을 악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이 율법을 주심. 사회가 유지하고 존립한다는 것은 이 억제하는 기능이 존속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의 사회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이방인들의 법들이 최소한의 것들이 나타나 있다. 즉 십계명의 후반부의 계명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성상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민생활의 존속을 위해서 이 법을 심어주셨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법의 기능에 대해서 말하기를 법이 가하는 위협을 듣지 않으면 법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억제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악행을 억제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기능을 하도록 주셨다. 바울은 딤전1:9-10절에서 이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고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한 자를 위해서 주었다고 기록함. 이런 측면은 사회 윤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정치사회를 보다 정의롭게 하기위한 것은 이 첫 번째 용법을 따라 행해 나갈 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적극적으로 이런 제도를 만들어 나가고 고쳐 나가야 한다.

2) 교육적 용법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게 하는 것. 신학적인 용법. 고소, 고발하는 기능을 한다. 거울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다. 죄인된 모습, 도덕적으로 저급한 모습을 보게 된다. 즉 우리는 율법은 우리 인간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고소하는 기능을 한다. 이 율법을 지키면 지킬 수록 율법의 요구는 더욱 가중된다. 그리고 지키지 못할 것에 대한 형벌, 진노의 위협을 당한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은 더욱더 죄책만이 더해올 뿐이다. 율법의 높은 기준은 절망감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롬3:19-20) 죄를 인식하게 하는 기능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우리의 죄된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에 회개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자신의 힘으로 거룩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모습을 구속할 수 있는 어떤 분(그리스도)을 바라보게 된다. 갈3장에서 몽학선생으로 율법을 표현함. 루터는 여기에서 율법 속에서는 우리를 고소하시는 하나님을 본다고 말함. 율법의 제 이 용법을 가장 중요한 용법이라고 말함. 이 용법은 치유는 하지 못한다 불신자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준비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것은 복음이라고 생각함. 그래서 율법과 복음을 이분화 함. (불안하게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안전으로 이끈다.)

3) 교훈적 용법

적극적으로 살아야 할 것을 보여줌. 도덕적 용법. 안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등불

구원받은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나의 지침으로 주셨다. 율법은 신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루터는 불신자에게도 유효하다고 주장)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화의 삶을 위한 길잡이로서 율법을 주셨다. 율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의 방식들이 나와 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기보다는 나를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명령, 즉 원하시는 것을 순종하기 위해서 이법을 지키며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킬수 없다. 감사와 사랑의 동기로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속하시고 난 뒤에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지키며,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열망으로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함.

칼빈은 율법의 제3용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함. 하나님의뜻을 확실히 보여주는 좋은 선생이요

성화의 교리를 보여준다. 시119: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 : 당신이 나를 구속하시고 자유케 하셨사오니 내가 자원함으로 당신께 달려가나이다로 번역.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당신의 법을 지키겠다는 말이다. 감사함의 표시이다.

※ <참고> 기독교 강요에도 율법의 용법에 관해서 상당히 많이 언급하고 있다.

2권 7장/[[칼빈 신학의 이해]] 도널드 맥킴 ed. 생명의 말씀사./John Hesselink가 율법의 제3용법에 관한 글을 읽어 볼 것.

자연법

도덕, 법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함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되는 규범에 관해 생각을 하게 됨. 이런 생각들이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주장 특히 스토아학파에 의해 발달 전개되어지고 나중 로마의 법에 반영되어지고 본격적으로 로마 카톨릭신학자들에 의해서 자연법사상이 발전철학, 정치학에서 중요하게 다룸인간이 만든 어떤 실증법에 초월해 있는 본질적인 법.

자연법의 개념

자연법 the Natural Law

♡ Natural

1. Law of Natural 자연의 법

2. 도덕적 본질적인 법. 당위성 should, ought to

카톨릭에 의해 발전 개신교에 의해 어느정도 거부

호크마의 인간론

이성에 의해 발달해 왔기 때문에 개신교는 자연스럽게 경원시해왔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 보이시는데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신다. 믿는자건 믿지 않는자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본성적으로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생득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에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동등하다고 생각.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도시국가에서 세계국가로 바뀌면서. 자연의 질서에 합일하는 삶이 가장 윤리적이 삶이다. 세계국가의 법률은 이성으로 알 수 있고 그것이 자연법이다. 토마스에 의해 신이 세계를 다스린다. 이성은 자연을 이해하도록 신이 주신 것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을 강조

(정의의 내용)-자연법의 핵심카톨릭은 토마스의 사상을 인정하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법에 구속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카톨릭의 인간관에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자연법을 인식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자연의 질서 창조의 법칙을 인식 지키며 살 수 있다. 자연적인 선에 올바른 태도를 지니는 사람은 하나님에 올바른 태도를 지닌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점점 하나님의 법에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구원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 근본적인 죄악보다는 구체적인 죄악들을 많이 열거. 모든 것에 자연법이 있다.

suum

cuique 각자에게 고유한 고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이 있다.

예)성, 결혼 은 자녀생산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동성애는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다. 자녀생산 이외의 목적으로 성기를 사용하는 것도 위배 즉 피임을 반대 1950년대 이후에 와서 교황에의해 자연적인 피임법(주기법)을 인정. 유전적.의학적 이유로 피임을 하면 가능하다. ※개신교는 단순히 생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companienship도 있다. 이것을 자연에 어긋난다는 입장에서 보지말고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책임성의 관점에서 의논해야 된다. 결혼안에서의 피임은 가능하다.

10/24

카톨릭의 자연법 사상을 받아들인 것을 정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어떤 도덕법칙이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알수 있고 그 도덕법의 지배를 받고 산다. 인간의 양심에 자연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은 양심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믿는 자들이건 믿지 않는 자들이건 양심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최소한 모든 자들은 응할 수 있다. (롬2:14-15)

나아가 카톨릭의 자연법 사상은 인간, 생물학적 기관, 인간의 제도는 고정된 구도와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와 세상이 기능하고 유지될 수 있다. suum cuique 각자에게 속한 것은 각자에게. 처음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대로 기능하게 된다. 제도, 생물학적 기관, 성까지도 목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활용하면 자연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무엇이 선인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고 이에 맞춰 행동할 수 있는데 이것이 윤리적 행동이다. 이 자연적인 법을 지키며 나가는 것이 종교적인 목적과 의미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본다. 이를 자연적인 목적, 법과 종교적인 목적,법과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자연적으로 올바르다고 파악한 것을 행하느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적절

한 태도의 한 차원으로 본다. 자연적인 도덕질서 자연적인 법을 거스리고 반해서 행동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관계되어진다. 도덕적인 덕목이 구원관 관계된다는 말. 따라서 여러 가지 죄의 덕목을 나열한다. 7 Deadly Sins - 교만, 탐욕, 게으름, 정욕, 탐식, 시기, ? (번역:이정석, 일곱가지 죄악)

개신교의 카톨릭의 자연법에 대한 태도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보아왔다. 그 이유는?

① 자연법이 구체적이고 불변하는 내용을 갖고 있는가라고 비판 시대마다 자연법이 조금씩 다르지 않은가. 당시 정치상황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변하지 않는가. 예-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이해: 당시는 도시국가였다. 시민과 이주민, 노예계급으로 계층이 분류되었었다. 그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여 각자 자신의 위치에 맞게 행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식인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연법이 없는 것인가. 낙태문제와 사형제도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고정된 도덕법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주저. 인간의 특수한 상황에서 이해할려는 경향이 발전을 하게 되었다.

② 인간이 과연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개혁전통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오직 성경을 주장하기에 인간의 이성이 발견할 수 없고 계시나 신앙의 동움이 필요하다고 주장.

③ 성경의 위치를 너무나 약화시킨다. 즉 로마카톨릭은 성경에 계시된 정도의 도덕법은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하여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입장은 인간의 이성의 파악을 사후에 승인해주는 proof-text로 보는 것. 그러나 개신교는 성경은 인간의 이성에 우선한다. 그런데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에서는 일치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로마-는 사후승인에서 성경을 중심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기독론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Bernard Haring)

위 강의에 대해서는 James Gustafson, 구교와 신교의 윤리을 참조할 것.

개혁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법을 심어놓았다고 주장한다. 양심, 즉 본성에 이 자연법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개신교 이전에도 사회에 이 도덕법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인류에 공통되는 자연법은 시인하지만 토마스주의처럼 모든 제도, 기관, 사회에 고유한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자연법의 원리는 받아들이지만 그 고정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위 원리는 최소한 십계명의 후반부에 나오는 것을 같은 것이다. 인간의 실정법은 자연법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칼빈은 십계명의 자연법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자연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죄로인해 인간의 양심이 어두워지고 악해져서 완전히 지키는 데 문제가 있다. 죄가 인간의 이성의 문제까지 심각한 타격을 가했기에 자연법의 내용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이점에서 카톨릭과 다르다. 즉 해석과 결정의 인지에 미친 죄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임(noetic effect of sin) 특별계시의 보완적이고 교정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양심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삶의 지침이다. 자연법의 논의와 같은 기원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시켜주는 것이다. 스토아학파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이다. 중세교회에 와서는 이 논의가 정체되었다. 신과의 중재기관으로 교회의 권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결의론(casuistry-구체적인 경우의 요구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규칙들의 체계. case 라는 말에서 유래. 유대주의 장로들의 유전, 결례, 전통. 의도는 좋았지만 윤리적으로 피할 구멍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종교개혁주의자 양심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양심을 따라 종교개혁을 일으킴. '성경의 증거와 이성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증명하지 않는 한 나는 교회의 결의를따를 수 없다. 내 양심은 하나님에게 사로잡혀 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양심을 편하게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무니다. 칼빈 하나님과 사람간의 매개다로 말함. 그러나 이에대한 완전하 교리는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양심에 대한 논의는 매우 다원적이고 상대적이 되었다. 오늘날 카톨릭에서 다시금 논의되어진다.

양심(conscience)은 무엇인가?

con + scious 지식을 모은 것. 양심은 흔히 내적인 하나님의 소리. 도덕적인 음성.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내적인 도덕적인 감각 또는 지식. 성경에서 구약은 '마음'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창20:5 삼상24:5 욥27:6 등)

양심의 기능

1. 악한 행동에 대해 책망하는 기능: 심판의 기능. 과거적인 측면 retrospective 판사와 같은 기능. 이미 행해진 것에 대해 비판하고 질책하고 guilty feeling을 심어준다. 롬2:14-15

2. 안내이 기능. 미래적인 기능 prospective 고후 1:15 롬13:5 2:15 guid 의 역할 선행해서 지시해주는 역할

양심의 특성

1. 천부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혹자(행동주의 심리학자들)는 하나의 심리학적인 산물이고 전통적인 관습이 내재화된 것일 뿐이라고 한다지만 하나님의 창조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다. 양심은 하나님이 교회에 파송한 목사다.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다.

2. 양심은 무오하거나 불변하는 내용을 가진 지식이나 기관은 아니다. 외적인 것에 의해서 변해질 수 있다. 즉 더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심은 어두워질 수 있다. 나쁜 양심이 될 수 있다. 또는 선의 여부와 가책에 전혀 무감각한 상태까지 될 수 있다.(양심에 화인 맞은 자) 선한 양심도 있으나 이것은 구속 받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책망의 기능을 통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게 하지만 구속 받지 않는 자들의 선한 양심은 자기 의에 이르게 하시고 자기 목을 곧게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양심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선한 양심은 결코 의에 이르게 할 수 없다.

3. 약한 양심이 있을 수 ㄴ있고 강항 양심이 있을 수 있다. 양심이 진리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될 수 록 그는 더욱 양심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설령 행동하지 못하여도 죄책감을 얻게 된다. 지식에 대해 날카로워지고 무디어지기도 한다. 진리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양심을 약한 양심이라고 한다. 고린도전서의 우상의 제물에 먹는 것에 관한 바울의 교훈. 바로 이런 사람들은 정확하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강항 양심은 지식적으로 진리의 빛에 의해 개도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양심은 독립되어 자족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개도(교훈)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좋아지고 향상될 수 있다. 마22:29 구원받은 양심은 계속적인 말씀의 공급으로 성숙되어질 수 있고 이것이 윤리적인 생활의 안내를 잘 받을 수 있다.

 

10/31

결의론은 책(pp179-)을 참조할 것

상황윤리

1960년대 미국 윤리학계는 조셉 프레츠(Joseph Fletcher)가 '상황윤리'라는 책을 출판하자 상황윤리냐 규범윤리냐는 논쟁이 대두되었다. Walter Mullder는 규범윤리를 강조하여 신학논쟁을 하였다. 이 논쟁은 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때까지의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하나의 주어진 법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 그러나 상대적인 상황가운데서 사랑이라는 법을 꾸준히 변하는 세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지침을 주고 적용하는 것. new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기존의 태도는 현실세계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기존의 도덕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까지의 기독교 윤리학에 있어 중요한 3가지 접근방식을 소개

-율법주의 legalism : 상황고려 없는 법, 원리지키는 것이 인간의 복리증진보다 중요하다

-무율법주의(율법폐기주의) antinorminalism : 어떤 것이든 절대적 규범을 배제, 일종의 도덕율 폐기

-상황주의 situationalism : 규범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 규범의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랑) 규범은 사랑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상황윤리의 4가지 전제를 소개, 4가지 실행원리

-실용주의 pragmatism : 어떤 행동이 효과를 거둘 것인가. 먹혀들어갈 것인가. 어던 것이 사랑을 실행시키고 증진시킬 것인가.

-상대주의 relativism : 사랑의 명령만 절대적이고(상수이고) 다른 것들은 변수이다. 사랑의 명령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사랑을 증진시키는 방법은 경우에 다라 달라질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조건적이고 상대적이다.

-실증주의 positivism : 신학적 명제는 이성적으로 유출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

-인격주의 personalism : 인간중심주의 사람에게만 내제적 가치가 있지 어떤 사물도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다른 것이 가치를 만들어낸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제한되어 있고 묶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고 스스로 선택, 가치결정 실현시키는 존재

상황주의의 입장 6가지

-본래적으로 선한 것은 사랑뿐이다. 본래 스스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는 사랑이다. 어떤 법칙이든 그것 자체로는 선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사랑과의 관계에서 판단될 수 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의 행도을 결단을 내리고 결정을 내리는 데 유일하고 궁극적인 규범이다.

기독교 윤리는 법제화된 조문이 아니다. 기윤은 사랑을 증진시키기 위한 행동을 뒷받침해주고도와 주는 윤리를 지지. 십계명도 사랑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 주어진 상황에서 사랑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규범, 지침이 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깨뜨릴 수 있다.

율법과 사랑의 충돌시 율법을 깨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십계명의 내용까지 때로는 ㄲ뜨릴 수 있다.

<예> 희생적인 간음. 다우마 120p

-사랑과 정의를 동일시한다. 정의라는 것은 계산하고 연구에서 나온 분배된 사랑이다. 정의란 사랑이 제대로 분배된 것을 말한다. 정의실현은 사랑을 많은 이에게 분배하는 것. 다른 말로 사랑의 공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의식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의지와 관계된 것이다.

-사랑이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화한다. 사랑을 증진하는 것이라면.

-모든 결정은 상황적으로 내려져야 한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의 인식을 통한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같은 지라고 How 의 문제는 다른다. 사랑의 규범은 같으나 적용은 다르게 될 수 있다. particularity

이상 6항목을 각 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

-장점(기여도) : 이웃 사랑을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도덕, 윤리의 기초로서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메마른 율법주의 일반적인 의무를 강조하는 법의 정신과는 다른 기여도. 상황윤리는 윤리적인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상황을 중시하는 면, 즉 원리 일변도에서 탈피하고 그 행동이 요구되는 상황의 인식 차원에서 나와야 함을 강조, 급진적으로 변하는 사회에서 적응력을 높임. 사실 중심적이고 사례중심적인 일종의 신결의론으로서 결단을 함에 있어 구체적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줌. 목회상담자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지침을 줄 수 있는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 목회상담학자 Seward Hiltner는 상황윤리를 윤리학의 방법론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개신교의 신결의론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판(약점) :

--신학적 비판 :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정작 사랑의 적절한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다. 사랑의 법이 가장 절대적 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애매모호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 성경은 사랑이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이웃사랑의 명령을 할 때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사랑을 계명으로 이야기 하고 다른 덕목(계명)들과 나란히 두고 있다. 딤전6:11 롬13:9-10 요14:15 요15:10 사랑이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계명이 반죽이면 사랑은 누룩이다. 사랑은 나침반이고 계명은 지도이다.(다우마) 사랑은 계명의 완성이다. 계명없이 사랑이 존재한다. 계명을 폐지하고 사랑으로만 대체한다는 말이 아니다.

---플레쳐의 상황윤리는 결국 공리주의(결과주의) 라고 말할 수 있다. 행의의 결과로 나타난 소득이 곧 선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사랑. 다수 때문에 소수가 짓밟힐 수 있고 이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 어떤 딜레마를 만나게 될 때 바로 이 효용의 원리principle of utility를 적용해서 만나게 된다. 어떤 행동을 취할 때 이 행동이 절대 다수의 행복과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불확실할 때가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상황론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서 낙관적이다. 인간이 만약 타락하지 않았다면 바른 상황 판단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고 유한하고 제한된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른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다. 1965년 타임즈에 이 글이 나온다. 이 책을 bookreview 하면서 인간은 매 결정의 순간 자기가 속한 문화에 관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지고 도 한펀으로 이웃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결단에 들어간다고 상황윤리자들이 말하지만 과연 이것이 보통인간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죄악성과 유한성에서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장담할 수 없다. 설사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죄악된 인간들이 순수한 동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11/7(상황윤리에 관한 마무리)

상황윤리자들이 생각하는 상황의 개념이 극히 제한되어져 있다. 어떤 상황을 고립된 순간으로 이해하는 극단적 요서 보임. 그러나 모든 상황이 독특한 것은 아니다. 상황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일반화된 규범이 적용되는 것도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상황이란 비슷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맞는 규범과 규칙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상황윤리에서는 이것을 배제한다. 오직 사랑의 규범으로 순간 상황을 판단한다. 순간의 영감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고 함. 지극히 제한되고 극단적이다.

<<결론>>기독교윤리는 상황윤리처럼 상황을 중시하지만, 또 중시해야하지만 상황윤리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들은 상황과 사랑의 규범을 강조하지만은 동시에 이 사랑을 실현시킬 수 있는 원리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또 사랑의 행위를 위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그러한 원리가 필요함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 원리라는 것이 사랑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성을 제공해 주고 사랑이 취해야할 방향을 안내하고 사랑의 내용을 제공해 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고전13장). 원리는 결코 사랑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원리라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구체성을 더해 주는 것이다.

act-agapism : 상황윤리자들

principle-agapism : 사랑을 구체화 해주는 원리(기독교윤리)

사랑이 계명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계명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규범주의 무규범주의 모두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윤리는 사랑의 규범을 강조하지만 원리없는 사랑을 반대한다. 그리고 상황윤리가 강조하는 순간의 영감보다는 성령의 영감을 강조한다. 원리와 사랑과 율법은 도움은 율법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성령은 말씀으로 안내하고 생각나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다. 결국 기여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윤리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힘들다.

정의(正義, Justice)

정의는 사랑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최고의 덕목이다. 플레처는 정의를 사랑과 동일시키고 있다. 사랑의 실현이 정의이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져 있다. 정의라는 것은 자연법의 내용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성경에서의 정의(正義)에 대한 관점

자연법이나 성경 모두 정의를 다루고 있다. 아모서 5:21-24, 미가6:8. 신32:4등 하나님을 공의로 묘사하는 구절들이 많다. 잠언 21장3절 제사보다 정의를 행하는 것을 더 향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이 공의이다. 각 재판장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정의이다.

예수님이 정의에 대해 언급한 구절. 마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rightousness)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성경은 공의를 행할 것을 끊임없이 말하며 정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덕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 정의(Justice)-균등, 공평, 형평 fairness, equity, equality, inpartiality.

일반적으로 정의에 대한 고전적 정의(定義)-rendering(give) to eachone ones due(마땅히 각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분배하는 것) -

Aristoteles의 정의- 권리든 의무든 이익이든 손해든 무엇이든간에 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에 있어서는 정의는 equality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정의의 근간은 평등이다. 이 Aristotels는 이것을 like cases should be treated in like manners, different cases should be treated in different manners라고 말함. 세가지로 정의(定義)를 내림. 오늘날도 대표적인 정의론자들이 취급함.

(1) 정의(正義)의 종류(Aristotels)

① 분배정의 (Distributive) : 개인 또는 집단들 사이에 부, 이익, 조세와 같은 의무를 평등하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에 대한 정의. 이 때 정의, 평등이라는 것은 산술적, 수학적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정당하게 분배(proportional)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기준이 무엇이냐에따라 달라질 수 잇다. 어떤 이는 need(필요성), merit(업적, 공로).

② 보복적 정의 (Retriebutive) : 주로 형벌에 관한 것이다.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정의이다.

ㄱ. punishment-보응적 입장, 죄를억제하기 위한 목적(교화, 교정), 법 준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함. 죄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그 기준은 demerit와 관련.

ㄴ. Restitution(보상). 피해자에게 관심을 두고 그에게 집중.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지게하고 배상하게 된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강조. 국가적으로 개인이 필요없이 감옥에 가는 것을 방지.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에서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가에 대한 규범적인 질문을 하면서 법의 정의론을 다룸. 사회구조, 제도들이 정의의 원칙에 부합될 때에 비로소 바람직하고 정당하다.

정의의 원칙은 불변하고 고정적으로 주어진 객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함. 오히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그러한 실천의 원칙이 있다면 바로 그 원칙은 보편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정의의 원칙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그 자신의 나름대로의 개인주의적인 인간관, 계약설 등에 기반을 두어서 정의의 원칙을 만듦. 인간 사회의 인간의 존재구속성이라는 말을 사용함. 인간은 사회 구조, 제도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적인 동기가 많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지니고 본래의 인간으 파악되기 힘들고 따라서 영향받지 않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어떤 원칙에따라 행할 것인가를 고민. 오리지날 포지션, 즉 자연상태는 ① 서로에 대한 무관심, ② 무지의 장막, ③ 합리성이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이러한 것을 지니고 있다. 각 사람은 자연상태의 무지의 장막에 갇혀 있다. 인종에 대한 무지, 직업, 이웃, 돈에 대해서 무지를 지니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들이 주어진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것이 정의의 원리이다. '무지의 상황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정의.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유를 신장시키고 동시에 각 개개인들의 권리가 평등히 분배되는 쪽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절대로 개인들이 자연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불이익을 감당하지는 아니한다.

무지의 장막에서 나오는 정의의 두가지 원칙.

① 각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이와 유사한 정도로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유지해야 한다.

② 그러나 분배에 있어서 차등적, 불평등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최소 수혜자들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혜자들에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고 그 결과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의 결과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이 두번째 것은 복지국가의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사회가 산출한 부는 원칙적으로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큰 흐름은 비레적인 분배에 기초해야 할 것을 강조. Aristoteles 와 비슷. . 세속적 정의는 평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 정의(正義)

성경에서의 보복의 법칙(출21:23-25), 보상의 법칙(출21:26-27). 성경에도 분배적(가나안 분배). 그러나 일반 정의의 이론과 다른 것은 교정적 정의(Remadial 또는 화목적 정의) 를 강조하고 있다. 교정적 정의란 행복한 시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상태로 시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는 정의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교정적 정의의 급진적인 모델은 희년(Jubilee)이다. 희년은 해방, 원상태로의 상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희년이 되면 잃어버렸던 모든 소유를 되찾게 된다. 희년은 잃어버린 소유(땅, 사람)을 되찾음. 땅은 소유가 아닌 기업으로 매매가 불가능.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허용되지만 친족에게 살 수 있도록 했음. 고멜제도. 이스라엘 노예는 해방시킴. 불가불의 상화에선 종이 아닌 품꾼으로 50년후 회복. 동족에 대한 관심의 표.

누적돈 죄(무관심, 불평등)에대한 하나님의 급진적 간섭으로서의 희년법(특별한 법) 사회교정의 차원.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 과부고아의 권리도 동일. 희년원리는 결국 merit + need 되어 재분배하도록 함. 비기독교적 윤리에 Mercy(기독교적)가 첨가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정적 정의의 요소이다.이러한 희년 윤리, 제도는 성경적 정의의 모델이 된다. 성경적인 정의관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잘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서 잘 나타난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의 정의는 창조적인 정의(正義)이다"라고 함.

 

11/14

희년사상

구조적 악,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불평등 여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소유와 권리로 회복시키는 사상이 들어가 있다. 회복과 복구의 의미가 있다. 더 이상 놓아두어서는 안되기에 하나님께서 급진적으로 개입하셨어 만드신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義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보면 잘 나타난다. 그들의 공로 때문에 구속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비탄의 소리와 언약을 기억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어 불러 내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다.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틸리히는 이 의를 창조적 의 변혁적 의라고 함. 창조적 의는 죄인을 죄인의 마땅히 받아야 할 것 그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의이다. 그 지위를 격상시키시고 높이시는 의이다. 즉 각 사람의 그가 받아야 할 몫을 받고 돌려주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읠 비례적인 정의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기존의 여건을 변화시켜 주시고 기존의 분배의 여건을 깨뜨리고 인간을 대하시고 격상시켜 주시는 의이다. 선지서를 보아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선지서의 첫 부분은 그들의 죄와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리나 후반부에서는 우리의 공의를 따라서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멧세지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이 나온다. 용서하시고 격상시키시는 하나님이 나오는 것이다. 창조의 기본질서를 찾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히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일반정의의 틀에서 벗어나고 그 위치를 잃어버린 자에게 간섭을 하신다.

정의사회의 판단의 기준

약자를 보면은 한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가 아닌가를 알수 있다. 서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는가를 보면 알수 있다. 정의라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규범이 되고 덕목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 있는 분으로 나오신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편이셨던 것으로 보인다.

희년사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기독교인들의 정의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성경적, 특별히 희년과 같은 것을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오늘 우리 사회에 적용되어질 수 없다. 이 땅에서는 신정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을 원리로서 가르쳐져야지 법제화시키기는 어렵다. 이것은 하나의 예표적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예표적인 것이다.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궁국적으로 구속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희년의 윤리적인 의미가 감해져 버린다. 그러면 이 희년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볼수 없지만 사회 개혁의 좋은 원리를 보여준다고 볼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희년법은 신정국민들에게 준 법이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에게 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면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불연속성이다. 그러나 연속성도 있다.

원리는 계속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된다. 윤리적인 의미와 정신을 강조해야 한다. 희년법은 이웃에 대한 사랑, 가난하고 힘없고 생존권이 위태한 자에 대한 특별한 보호와 사랑,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야 말로 비록 자격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사람에게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도록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배푼다는 것이다. 이런한 모텔과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있다. 기독교 적인 정의는 평등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은 그것 이상의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적 정의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적 정의는 공적(merit)에 따라서 평등하게 분배하는 그것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가치 창출에 따른 보상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 비례해서 더 많은 몫을 가진다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지만은 능력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때문에 개발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신분 때문에 그 자질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기 외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꼭 자기의 외적인 부분만으로 인해서 자꾸 자꾸 누리게 되는 것이다. 존 노리스가 계속해서 차등분배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사람을 상승시켜 주면 이것이 복지국가가 되고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11/21

루터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플레쳐는 일원론적으로 가지고 있다. 루터는 사랑과 정의를 별개의 것으로 보았다. 사랑은 개인과의 관계, 정의는 그룹(국가)과의 관게에서 정의Reinhold Niebuhr 사랑과 정의는 변증적 관계가 있다. 정의를 사랑과의 관계에서 이야기하였다. 정의라는 것은 사랑이 사회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사랑이라는 순수한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어질 수 없다. 가장 사랑을 근사치적으로 실현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이다.

개혁신학과 교회 제4집 신원하 논문 참조. Christian Realism. Impossible Possibility. Relevance of Impossible라는 용어의 관계를 파악할 것. 그는 Pacifism의 옹호자였으나 나중 디트로이트에서 목회를 하면서 반대하게 되었다. 나이브한 신학적 작업을 버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신정통주의자가 된다. 최대한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저급한 수준. 정의는 순수한 기독교적 사랑 아가페에서 부단히 비판받고 조정됨. 즉 사랑이 정의의 수준을 고양시켜 준다. 사랑은 최대한의 사회정의를 이룰 수 잇도록 동기부여, 자극을 주고, 높은 기준, 틀로서 기능을 한다. 사랑에 의해 비판당하고 새로운 동기를 부여받는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이기적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Impossible Possibility 이긴하나 Relevance of Impossible가 있다. 121페이지 제일마지막 문단은 니버는 희생적 사랑보다는 상호애가 현실적 상황에서 최고의 정의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봄. 상호애가 궁극적인 규범으로 자리잡게 될 때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자기애로 퇴보하게 될 뿐. 상호애는 항상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보다 높은 단계에 의해 통제. 보다 높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그는 사랑의 근사치적인 성취가 정의라고 보았다. 끊임없이 사랑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기독교와 정의는 불가분의 관계.

어떻게 정의를 이 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H. Richard Niebuhr는 그의 동생이다.

18-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1차대전 전쟁을 통해 인간의 낙관적인 환상을 버림. 인간은 죄인들이다라는 어거스틴의 아이디어를 신학의 주류에 끌어들인 사람. 그의 주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재인식에서 출발 현실을 직시하도록 촉구. 죄악의 보질은 Self-ce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실천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강 실천신학의 분류  (0) 2014.03.20
성경해석  (0) 2014.03.19
제 3강   (0) 2014.03.18
청소년 신앙교육론  (0) 2014.03.17
목사는 다윗형과 솔로몬형이 있다.  (0) 201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