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지리적 배경 이해의 중요성
I.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마 1:28-2:23, 눅 1:26-2:40)
아기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실 무렵 요셉과 마리아는 팔레스타인의 북쪽지방 갈릴리 나사렛에 살았다. 둘은 정혼을 했고 그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노라’라고 말한 후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을 고했다. 마리아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 한 일이기에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일으리이까’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천사 가브리엘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말할 때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믿음으로 고백한다. 정혼을 했지만 남편 요셉과 관계를 갖지 않았는데 아이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다. 이 후 마리아의 삶은 어떠했나?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이지한 마리아는 세례요한을 잉태한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 유대 땅으로 가서 석 달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것과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인사할 때 엘리사벳의 배 속의 아이가 뛰놀며 기뻐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또한 엘리사벳을 통해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는 고백과 함께 아기 예수께서 하실 일을 증거 받은 후 갈릴리로 돌아온다. 유대 산중에 3개월을 머물던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신체적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도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 정혼한 남편 요셉에게 자신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요셉은 가만히 끊고자하여 고민한다. 고민하던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고 전한다. 이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사 7:14, 마 1:23)’가 이루어진 것임을 알렸다. 잠에서 깬 요셉은 꿈속의 계시를 믿었고, 마리아에게 벌어진 일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임을 믿었기에 주의 사자의 명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을 것이다. 결국 마리아와 요셉 두 사람은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진행됨을 깨달았고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어떻게 관련되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미 5:2)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 근처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북쪽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시기가 되어도 직선거리로 130km이상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에 머물며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의 이주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식언하지 않으신다(민 23:1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한 미가 선지자는 잘못된 계시를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아기 예수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만 한다. 그렇다면 예언된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는데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로마의 황제였던 아구스도를 통해 호적하게 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세금을 받기 위해 호적을 명하였지만 그 명령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루는 도구로 쓰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 계획하신 뜻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황제의 호적령은 요셉과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갈릴리에서 유대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의 여정은 아마도 만삭이었던 마리아에게는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만삭의 몸으로 산과 광야를 지나고 강을 건너야 했던 여정은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성지답사를 다녀와 나사렛 수태고지 기념교회의 문, 그리고 베들레헴 우유동굴 교회 안에 있는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이동하는 모습의 모형을 보고 그래도 힘들지 않은 여행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유대인의 풍습으로 여인이 나귀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며, 나귀를 가질 만큼 요셉이 부유하지 못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경은 마리아의 믿음과 참고 견디는 신앙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리적 배경이나 시간적 배경,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느낄 수 없는 내용도 적지 않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은 만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역사적 사건인데 이 역사적 사건은 요셉, 마리아, 황제 아구스도, 목동들, 별을 보고 찾아와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 등 많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제 앞에서 살펴본 예언이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며 성경을 읽었을 때 우리의 삶 속에 원하시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헤롯왕과 모든 제사장들 그리고 백성의 서기관들은 베들레헴에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알았다. 그들은 미가 5:2절에 예언된 말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가 나시는 것에 대해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믿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 탄생과 함께 나타난 별을 보고 찾아왔다고 증거 했음에도 그 말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메시야가 탄생하셨다는 증거에 놀랐지만 가서 확인하지도 않았고 경배하러 가지도 않았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들의 신앙은 메시아는 기다리고 있으나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다림 속에 신앙생활을 한 듯 보인다. 해마다 성탄을 통해 각자의 믿음의 바탕 위에 아기 예수를 탄생시킨 우리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천국백성이라고 생각하고 말은 하지만 ‘죄와 상관이 없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고 다시 오심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가? 그 말씀을 되새기며 삶 가운데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메시야가 오셨다고 증거 할지라도 자신의 삶에 취해 외면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외면하고 부인하려 하지는 않는가?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자신을 부인했다. 하지만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대로 되리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잉태한 아기 예수가 메시아 이심을 체험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 자신을 드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호적령을 내린 황제의 명령에 만삭의 몸을 이끌고 갈릴리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그 힘든 여정을 걸어갔다.
이즈음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의 삶 속에, 만삭의 몸으로 지치고 힘든 상황 속에, 갈릴리로부터 유대 베들레헴으로의 그 노정이 없었다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분명히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게 하는 도구는 뜻을 깨달은 우리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분명히 당신의 뜻을 깨달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삶을 되돌아보자.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개입의 역사가 있는가? 또 음성을 들었다면 나를 통해 뜻을 이루시도록 나 자신의 삶을 드리고 있는가? 삶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아직 갈릴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가? 죄인 된 몸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깨달은 성도에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각자 나의 베들레헴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고민해 보자. 만삭의 몸, 지친 몸을 이끌고 갈릴리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옮겨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역사에 도구가 된 마리아처럼 우리의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삶 속에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역사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성도가 되도록 기도드린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처럼 때가 되어서야 움직임으로 힘든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말고 미리미리 깨닫고 움직여 뜻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
2. 팔레스타인의 냉수 한 그릇(마 10:43, 시 42:1)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잡히신 후 12제자를 택하시고 초기사역을 하실 때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냉수 한 그릇을 소자에게 대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될 수 없다. 이 구절을 우리가 사는 현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이해를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인다. 왜냐하면 이 시대 냉수 한 그릇을 떠다가 어린 소자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형적 여건을 생각해 보면 이는 쉽지 않은 행동임을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은 물을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족장시대에도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고, 우물로 인한 싸움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또한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라고 노래하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자신의 갈급한 심령을 죽지 않기 위해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에게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에서 물은 참으로 귀한 것 중의 하나요, 생명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라고 하신 것은 구원받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성경에는 물에 연관된 사건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이스라엘 땅)을 허락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물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우물을 많이 팠으며 그 우물로 인해 주변의 종족들과 다툼도 벌였다. 이삭도 우물 때문에 아비멜렉과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물이 얼마나 귀중했는지를 알게 한다(창 21:25, 26:20). 이제 마태복음 10:42절 말씀이나 물에 대한 성경의 기록자들의 말씀을 읽을 때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여건에서 수도만 틀면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물이 아니며, 무한정 계속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물이 아니라는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제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를 살펴보자. 팔레스타인은 북반구의 아열대성 사막지대에 속하는 지형으로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은 극심한 온도 차이가 나고 비는 우기인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만 내리고 5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로 땅이 메말라 버린다. 비의 양고 우리나라와 같이 많은 것이 나니라 서북부는 연 250mm이지만 대부분의 지역이 연 25-50mm정도로 우리나라의 1/20도 안 되는 양이다. 1년 내내 햇빛의 발산과 증발 현상이 활발하여 땅에는 물기가 없다. 남부 네겝지역의 물줄기는 사막 기후의 영향으로 네겝에는 영구천이 없고 단지 계절천(비가 내리는 우기에만 흐르는 하천)들이 일 년에 몇 번 형성되어 물이 흐른다. 이렇듯 팔레스타인은 일 년에 6개월은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리는 기간 동안의 양도 많은 양이 아니기에 물을 구하기는 참으로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건기 때에는 거의 모든 하천이 말라버리는 것이 성지의 현실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지형과 기후를 생각하면서 성전 성가대의 직임을 맡았던 고라의 후손 중 한 명의 시인이 기록한 시편 42편을 한 번 더 읽으시길 바란다. 시편 42편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 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고(시 42:1-2)’로 시작한다. 여기서 갈급하다는 원어의 뜻은 ‘고대하다, 부르짖다, 갈망하다’의 뜻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아마도 건기 때 샘이 말라 물을 얻지 못한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모습을 보고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다. 물이 없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을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은 생명을 건 싸움임을 알아야 한다. 살기 위해 물을 찾아다니는 사슴처럼 자신의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표현으로 시편 42편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신을 목마른 사슴으로 표현한 시인은 자신의 직책인 성전 성가대의 임무에 임함에 있어 어느 정도 최선을 다하는지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우리는 다음의 찬송을 자주 부른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시편지가의 마음을 얼마나 생각하고 부르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다음에 부를 기회가 있다면 내 삶을 드리는 찬송이요 고백이 되길 바란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삶.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눅 3:3-6)
본문은 세례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내용이다. 본문에도 등장하듯이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에 기록된 대로 광야에서 외치면서 주의 길을 준비하게 하고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고 있다. 그런데 광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다면 이 본문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유는 우리의 환경에서 광야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지리적 광야의 의미와 유대인에게 있어서 광야 의미를 살펴보고 본문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생각해 보자.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냄을 받았고 선포하고 있다. 누가복음 3:4의 광야는 헬라어로 ‘에레모스(빈 들, 버림받은, 고독한, 황망한, 황폐한)’가 사용되었는데 70인역에서 히브리어 ‘미드바르(황야, 광야, 수목 없는 대 초원, 풀 없는 땅)’, ‘하레브(황량하게 되다, 황폐하게 되다)’, ‘샤멘(설득하게 되다, 유린당하다, 황페하게 되다)’, ‘네겝(메마른 땅)’을 대신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에레모스’는 고대 로마 세계에서 외단 곳에서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곳 또는 귀신들의 거주지로서 광야를 무서워했다. 광야가 여러분에게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외쳤던 광야가 어떤 곳으로 생각되는가? 성경의 땅을 가지 않았을 때 나에게 ‘광야’하면 떠오르는 것은 학창시절 배웠던 ‘광야’가 생각나고 느낌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지 않고 느끼는 ‘광야’의 의미나 헬라어로서 ‘에레모스’의 귀신들의 거주지로서의 무서운 의미는 세례 요한이 외쳤던 광야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세례 요한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빈 들’에 머물렀는데 이 ‘빈 들’이 ‘에레모스’이다. 에레모스(광야, 빈 들)에 머물던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눅 3:2). 그런데 당시 광야(유대 광야)에는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를 더나 동쪽으로 바라보며 빛의 아들을 기다리는 쿰란공동체(에세네파)가 있었고 많은 목자들이 목축을 하며 살았고 절기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거하며 신앙을 연마하고 양, 염소를 키우며 목축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며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시편 120-134편)’를 부르며 지나가던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 광야는 우리의 개념이나 헬라적 개념으로서의 광야의 의미와 많이 다를 수 있다.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광야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곳이 광야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곳이 광야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광야의 의미가 아니라 신앙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기록하던 쿰란공동체가 있던 곳, 목동들이 자신들의 삶을 이어나가는 생활공간,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유대종교의 신앙인들이 찬양하며 지나가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이 원했던 것,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이 시대 우리의 생활에서 광야는 어디이며 그곳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대해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700여 년 전에(사 40장) 예언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선언하는데 사막은 어느 사막인가? 사막하면 떠오르는 것은 모래, 바람, 전갈, 사막여우 등 사람들의 발자취는 없고 모래와 짐승들이 있는 곳이 상상된다. 그런 사막에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나라 건설 노동자들이 7-80년대 중동으로 가서 모래사막에 길을 내고 건물을 세우는 공사를 많이 했는데 그런 것을 말할까? 내가 두바이에 가보니 사막에 길을 내고 그 길 양 옆에 고층 건물을 세워 세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만드는 것을 보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막에 대로를 만드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할까? 만약 이런 것이라면 2000여 년 전 세례 요한이 외치던 당시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사막은 없다. 이것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에 대로를 평탄케 하는 것이 보이는 길을 만들고 평탄케 하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사야 40:3에 사용된 ‘광야’는 ‘미드바르’이고 ‘사막’은 ‘아라바’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3:2절에서의 ‘빈들’, 3:4절에서 ‘광야’로 번역된 이사야 40:3절의 ‘사막(아라바)’은 모두 보통명사로서 황량하고 사람이 살지 않으며 짐승들만 우글거리는 그런 느낌의 장소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속에 등장한 사막(아라바)은 모압 평지와 여리고를 포함한 낮은 광야지역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나 베레아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갈 때 이 아라바에 난 길을 꼭 지나가야 했다. 현재의 요르단 쪽에 있는 베다니에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이르고 여리고에서 하루 묵은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 길이 아라바를 관통하게 되어 있다. 요단강 동편 베다니 쪽에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이르면 지리적으로 아라바를 ‘지났다, 건넜다’고 말할 수 있다. 여리고에 머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향해 1000미터 이상 광야를 지나 올라가야 하는데 이곳이 유대광야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빈들, 광야, 사막이 막연한 느낌을 주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로 향하는 길목이요 그와는 반대로 새로운 신앙을 찾아 빛의 아들을 갈망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필사하는 삶을 살았던 쿰란공동체의 신앙의 학습장이요, 양과 염소를 치며 삶을 살았던 삶의 현장이다. 모두가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과 삶의 현장인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며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외쳤던 ‘아라바-유대광야’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일 년에 3번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기 위해, 또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거나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갈 때 꼭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라바-유대광야’는 그들의 삶의 중심이요, 최고의 가치요,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가야할 길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들었다. 현재 이러한 것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천지, 하나님 어머니 교회 등…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삶의 길목에서 외치고 있다. 주부들의 삶의 현장인 집으로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고 대화하기를 요구한다. 자신들은 체험했고 다 주니를 갖추었으니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붙잡고 참인 것을 포기하고 외치고 있는데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정신을 놓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창피한 일일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라바와 유대광야를 지나 하나님을 만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곳을 직접 가보면 올록볼록한 높낮이가 천차만별인 작은 산, 언덕, 골짜기 등이 있다. 험한 계곡과 언덕으로 인해 길은 구불구불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생활이 그렇게 변해야 했다(눅 3:5). 이런 변화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게 하신다. 모든 삶의 중심에서 이제껏 잘못 믿고 순종하면서 살았다고 하는 신앙의 삶의 모습에서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 때 모든 육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볼 것이다(눅 3:6).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우리에게 있어 광야, 사막은 어디인가?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경배 드리기 위해 가는 곳인, 예루살렘 성전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할, 또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해야 할 아라바 광야와 유대광야는 어디인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우선순위를 둔 곳이 아라바요 유대광야이다. 여러분의 우선순위 중 제일 첫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아라바요 유대광야가 되길 바란다.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보았다면 여러분의 우선순위 중 제일 첫 것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아직 깨닫지 못하는 성도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자리인 아라바요 유대광야가 되시기 바란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요단 강 부근 각처’는 ‘사막’으로 번역되었던 ‘아라바’이다. 아라바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는 길목이요 유대인들의 제일 되는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세례요한은 아직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우선순위의 경로인 요단 강 부근 각처에서 외치고 있다. ‘각처에’는 헬라어로 ‘파스’요 ‘모든, all, 각각의 모든 , every’이란 뜻이다. 그들의 우선순위 곳곳으로 ‘가서, 와서, 나타나서’ 외치고 있다.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우선순위 곳곳에 가서 새 생명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소망한다. 만약 우리의 우선순위가 예수 그리스도요, 천국을 위한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라바요 유대광야에서 외쳐지는 세례요한, ‘외치는 자의 소리’, 주변의 말씀을 깨닫고 고백하는 교역자,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각 성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란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보게 할 것이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 아라바에서 여호와의 대로를 평탄케 한 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들에게 나의 구원을 보게 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어딘가에 있는 새 생명에게로 우리의 눈과 목소리를 돌리는 성도가 되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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