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4장 풍습과 풍물 이해의 중요성

예림의집 2013. 10. 22. 15:23

 

4장 풍습과 풍물 이해의 중요성

 

I. 양의 목자와 양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하란에 머물던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는데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난 아브람은 정착생활이 아닌 목축을 하며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 이후 이삭, 야곱 시대를 지나 애굽에서 430년, 광야 40년 동안 목축을 하며 지냈습니다. 이처럼 목축이 근간이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참 목자이셨고 그들을 목자가 양을 책임졌던 것처럼 지켜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참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보이는 목자를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대리 목자였던 왕, 종교지도자들을 통해 통치를 하게 하셨지만 참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었고 징계를 받아 흩어지게 되었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포로 귀한 후 유대인의 삶은 새로운 각오로 참 목자를 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구약의 목자상은 중간시대를 지나며 많이 변질되었다. 신약시대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고 종교지도자들도 목자에 o해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는 좋지 못한 사람들이라 가르쳤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인데 너희들은 선한 목자인 내 음성을 듣지 못하기에 내 양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선한 목자’선언과 ‘내 양이 아니기에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는 선언은 유대인들이에게 참으로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목자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양이었던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어쩌면 세월이 흘러 의미가 바뀐 목자와 양과의 관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통해 많이 말씀하셨다.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며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고 큰 무리를 보신 후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막 6:34). 이것은 구약시대 목자와 양과의 관계 개념으로 이해할 때 목자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양들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작농으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목축을 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았다. 다만 로마시대가 된 후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구약시대처럼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생활 속에서 경험되는 게 아니었고 목자가 지저분하고 야심 없는 천한 신분으로 개념이 바뀌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구약시대와 같이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4복음서에 유대인 목자가 양을 치는 사건이 기록된 사실은 없다. 많은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등장한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던 목자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들은 아마도 유대인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학자들은 이들을 레갑 자손으로 생각하는데 레갑 자손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민족이었던 겐 족속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끔 양과 목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잘 알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목축보다는 소작농 개념의 농사를 지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깨닫는 사람들은 더욱 천하게 여겼던 목자들이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은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풍습이 달라져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경 시대와 비교할 때 시대도 다르고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시대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바뀐 환경 때문에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면 이 시대에는 더욱 간격이 클 수 있디 대문이다. 성경 시대의 생활 풍습을 이해하고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2. 맷돌/연자맷돌

복음서에는 맷돌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이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17:2)”로 연자맷돌을 언급하셨다.

연자맷돌은 짐승을 부려서 곡식을 찧거나 올리브(감람) 열매를 부수어 기름을 얻을 때 사용하는 큰 맷돌로 가정용 맷돌의 10배 정도의 효율이 있다. 연자맷돌은 가정마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부자집에 있기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댓가를 치루어야 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등장하는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형법인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제도와 당시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했즌지를 이해해야 한다. 연자맷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법은 유대인의 사형제도는 아니었지만 고대 시리아, 로마,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 극악한 죄인이나 신성모욕죄나 반역죄를 범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방법이었다. 당시 갈릴리지역은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원들이 많이 모여 활동했었기에 이러한 사형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 사형법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무에 달린 저주 받은 자라 하더라도 그날 장사치루도록 하셨다(신 21:23). 유대인들은 죽은 후 조상들이 있는 무덤에 함께 묻어줌으로 죽은 영혼이 열조와 함께 거하게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런데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는 것은 시신을 찾아 창사 치루어 주지도 못하는 아주 저주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수에 치지도 않았고 공동체에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기에 아이들을 대우하지 않았다.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대 공동체의 비밀을 외부로 거짓 없이 밝혀 공동체에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은 대화나 모임에 끼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번번이 어린아이를 우대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믿는 소자 하나 실족하는 것이 신성모욕죄나 반역죄 보다 더하기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연자맷돌은 마을의 이곳저고에 있고 년 중 곡식을 갈거나 기름을 짤 때 사용하는 것이기에 연자맷돌과 관련된 말씀은 맷돌을 사용하는 어느 때라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맷돌과 관련된 말씀은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1, 눅 17:35)”이다. 이 말씀 속에 등장하는 맷돌은 연자맷돌이라기 보다는 가정용 맷돌로 생각된다. 한 여인이 맷돌질 할 때 한 여인이 옆에서 곡식을 넣어주는 상황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여인이 하고 있는 맷돌질 자체를 염두해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본문에 사용된 ‘맷돌질(뮐론)’은 ‘맷돌이 가동되는 장소’를 말한다. 두 여인이 한 장소에서 머물러 있지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이다. 가정용 맷돌은 매일 사용하는 것으로 매일의 삶 가운데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지만 선택받는 사람이 있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에는 ‘큰 맷돌 같은 돌’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아마도 연자맷돌로 생각된다. 이 큰 돌이 바다에 던져져 보이지 않게 되는데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계 18:21). 또한 바벨론이 망하여 산 사람이 없기에 ‘맷돌 소리’가 결코 들리지 않을 것임도 계시하고 있다(계 18:22). 매일 곡식을 맷돌로 갈아 빵을 만들어 먹고 살 사람들이 없기에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맷돌이 생명이라는 신명기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신 24: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히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3. 유대인의 식사와 잔치

유대인들은 대부분 평일에는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했고 안식일에는 세 끼를 먹었다. 밀이나 보리를 맷돌로 갈아 반죽을 하여 구워 가족들과 함께 상에서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상이 지금의 식탁이나 밥상 형태의 모습은 아니다. 그저 바닥에 멍석과 같은 깔개를 깔아 구분한 자리에 해당한다. 상에 둘러 앉아 같은 그릇에 있는 빵을 가져다 손으로 찢어 나누어 먹었고 찢은 빵은 식탁 가운데 있는 소스에 찍어 먹었다. 잠언에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고 표현한다. 식사를 할 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을 사용했기에 식사 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외부에서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발을 씻었고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다. 이렇게 손을 씻고 먹어야 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예수님과 대립하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은 음식, 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더럽다(마 15:1-11)’고 말씀하시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의미를 잊고 장로들의 유전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중 잔치(데이프논: 정식, 중요한 식사, 만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유대인들에게 잔치 문화는 익숙한 것으로 일반적 식사와 구분되었다. 잔치는 보통 종교적인 날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날 배설되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삼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칠칠절, 장막적(초막절, 수장절)을 매년 삼차 지켰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지키기 시작한 부림절과 수전절을 지켰는데 이때 잔치가 배설되었다. 또한 특별하게 지킨 7년에 한 번 안식년과 50년에 한 번 희년을 지켰고, 매월 초 월삭과 매주 안식일을 지켰는데 이때도 보통 저녁에 잔치가 배설되었다.

잔치가 예정되면 잔치를 베푼 주인은 두 번, 세 번 잔치에 참여할 손님에게 종들을 보내 알렸지만 여자들은 손님으로 초대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한 나라의 임금이 잔치를 벌이고 손님을 초대했는데 초대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데려다 잔치자리를 가득 채운 경우가 있다(마 22:1-10).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초대되더라도 예복은 갖추어야 한다. 만약 예복을 갖추지 못했다면 잔치를 준비한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잔치자리에 참석하는 기본은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자리에 기본준비도 안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임금에 의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씀하셨다. 임금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마 22:12)” 물었고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가난하다거나 예복이 없다거나 말하지 않고 그저 말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준비한 예복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사환을 시켜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2:13)”고 명령하셨다.

잔치 때가 되면 초대받은 손님들은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잔치가 시작될 때 주인이 등장하여 자리를 재배치한다. 잔치의 상석은 ‘ㄷ’자 식탁인 트리클리니움의 왼쪽편 중앙에 앉는 잔치를 베푼 주인공과 가까운 자리로 주인의 오른쪽이 제일 상석이고 다음은 왼쪽 방향 순서이다. 이러한 배경은 예수님께서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좌에 안지 말라(눅 14:7)”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게 한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앚으라(눅 24:20)”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면 찬지를 베푼 사람이 자리를 정해줄 때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서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시 잔치를 베풀고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의 자리를 주인이 정해주는 배경을 이해함으로 예수님께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하신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잔치가 벌어지는 집의 문은 닫히고 잔치가 벌어진 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초대 받았지만 늦게 왔고 장치가 이미 벌어졌으며 잔치자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열처녀의 비유중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잔치자리에 늦었을 때 이미 혼인잔치의 문은 닫혔다(마 25:10). 남은 다섯 처녀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말했을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고 잔치의 문은 열리지 않았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마 25:1-13).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고 말씀하시며 혼인잔치에 들어갈 시간을 기억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잔치가 시작되면 트리클리니움이라 불리는 ‘ㄷ’자 식탁에 둘러 왼손을 기대고 비스듬이 눕는다. 왼쪽 팔꿈치가 닫는 부분에는 대부분 쿠션이 붙어 있었다. 이러한 자세는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의 머리가 왼쪽 사람의 가슴에 오게 되는데 잔치를 베푼 주인의 가슴에 상석에 앉은 사람의 머리가 닿게 되어 주인의 품속에 안기는 형태가 되곤 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기록되었는데(요 13:23, 21:20) 요한이 상석에 앉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아마도 아브라함이 베푼 잔치에 가장 상석에 앉아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했을 것이다(눅 16:19-31).

왼쪽 팔꿈치로 지지하고 오른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는 자연스럽게 발을 식탁 바깥쪽으로 뻗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죄인이었던 여인이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고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식사 때의 자세를 연상하면 자연스럽다(눅 7:38)

4. 포도주와 가죽부대

포도주는 신약성경에 곳곳에 아주 중요하게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처음 행하신 이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만든 이적이었고(요 2:1-11). 공생에 마지막 유월절 때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기념하게 하셨으며(눅 22:15-18), 십자가에 달리셔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마 27:48, 막 15:23, 눅 23:36, 요 19:29-30). 포도주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얼마나 중요한 도구로 쓰였는지 알 수 있다.

포도주는 포도를 따 바위를 깍아 만든 포도즙틀에 넣고 사람이 들어가 발로 밟아 포도즙을 만든 후 발효시켜 만든다. 발로 밟는 공간을 빠져나온 포도즙이 밑으로 흐르게 되는데 이 때 세마포 천을 통과시켜 벌레와 이물질을 걸러냈다. 이는 레위기 정결법에 의한 부정한 곤충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모인 포도즙은 항아리나 가죽부대에 담을 때 다시 한 번 걸러 낸 후 저장하여 숙성시켜 포도주를 만들었다.

가죽부대는 양이나 염소를 통째로 벗긴 가죽의 네 다리를 묶고 목 부분을 이용하여 물, 포도주, 기름등을 담았다. 포도를 수화하여 포도주를 만들 때, 농부는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즙을 담았다. 이유는 새 포도즙이 발효하여 포도주가 될 때 부피가 약간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막 2:22, 눅 5:37)”고 말씀 하셨는데 포도주와 가죽부대가 동시에 등장한다. 혹자는 이 말씀을 무엇인가 새 일을 할 때에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시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유대인의 농사법과 풍습, 질문과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들은 포도 농사법과 가죽부대의 성질을 잘 알기에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았는데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즙을 넣으면 새 포도즙이 발효할 때 늘어나는 부피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번 포도주를 만드는데 사용한 가죽부대는 물이나, 곡식을 넣거나, 치즈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문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꼭 어떤 일의 출발이자 시작의 의미 이외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신 시기 때문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님과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대답하셨다. 율법문제(장로들의 유전)를 가지고 예수님께 따지러 온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장로들의 유전)에 따른 금식이 신랑(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쁜 날에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혼인집 신랑이며 함께 있는 제자들은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여 금식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며, 금식할 때가 따로 있는데 신랑을 빼앗길 때라고 말씀하셨다(마 9:14-15).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며 율법과 예언과 선지자의 가르침대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의 행위로 예수님을 책망하는 것에 대한 다른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율법의 내용을 버리고 율법의 모양만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에게 율법의 내용의 핵심인 예수님의 복음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이며,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구약시대의 율법적 행위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의미를 신년이 되거나,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사용하는 의미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결국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생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5. 밭과 씨뿌리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3-8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씨가 뿌려진 곳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다. 상식적으로 농부가 길가나 돌밭, 가시떨기에 씨를 뿌린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즉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들어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비유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비유 자체에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유대인들이 비유 자체의 상황에 문제를 삼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읽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경험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밭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건기가 6개월이나 되는 성경의 땅에서는 밭이라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돌이 거의 없는 잘 개간된 땅은 아니다. 밭에 크고 작은 돌들이 있지만 농부들은 큰 돌 외에 작은 돌들을 제거하지 않는다. 또한 건기가 시작되는 때에 이미 말라 버린 밭은 사람들이 밭 안으로 걸어 다녀 길이 나기도 하였고 밭에 가시떨기가 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근동 지방에서 밭에 씨를 뿌릴 때 우리 나라의 농부처럼 고랑을 파고 그 속에 씨를 넣는 방법으로 하지 않는다. 건기를 지나며 말라버린 땅을 뽀족한 쟁기로 한 번 간 후 씨를 손으로 흩뿌리거나 가축의 등에 씨앗을 담은 주머니를 달아 주머니를 툭툭 쳐서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기게 하였다. 정확히 고랑 속으로 씨가 떨어지기 보다는 작은 돌 위에 떨어질 수도 있고 바람이 많이 불었기 때문에 씨가 날려 가시떨기나 길가에 떨어지기도 했다. 씨를 뿌린 후 다시 쟁기로 땅을 갈아 씨 위에 흙이 덮히도록 했는데 이런 방법은 본문의 비유처럼 돌밭, 길가, 가시떨기, 좋은 땅에 씨가 떨어질 수 있었다.

 

길가에 뿌려진 씨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오솔길이나 건기를 지나며 밭을 돌아가지 않고 밭 안으로 가로질러 다녀 생긴 길일 수 있다. 이 길은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게 굳어지고 다져진 길이다. 길 가에 뿌려진 씨는 새들이 남김없이 먹어 치워버렸다. 사람들이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악한 새와 같은 자들에 의해서 그 씨앗은 신속히 제거되어 질 것이다.

흙이 얇은 돌밭

농부들은 땅을 팔 대 그리 깊지 않게 팠다. 그리고 밭의 여기저기에 섞여 있는 작은 돌 위에 있는 시에 흙이 덮이면 따뜻한 돌의 온기에 뿌리가 쉽게 나오긴 한다. 하지만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해가 돋은 후에는 뿌리가 마르고 생장할 수 없어 곧 죽게 된다.

가시떨기

날씨가 건조한 팔레스타인에서 가시떨기는 사계절 어느 때나 또는 어느 땅에서나 볼 수 있다. 개간된 밭 여이나 건기를 지나는 동안 밭에도 흔하게 가시떨기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씨가 떨어져 자라게 된다. 밭에 생긴 가시덤불을 뽑아주지 않으면 가시떨기의 기운으로 곡식 낱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알갱이가 없이 말라 죽어 버린다.

좋은 땅

팔레스타인의 밭은 기본적으로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하다. 또한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햇빛도 충분하다. 좋은 땅이란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리 제거된 땅을 말한다. 좋은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그해에 백배나 소출을 얻을 수 있다(창 26:12)

 

6. 삶의 중심 회당

회당으로 번역된 ‘쉬나고개’는 기본적으로 유대인 공동체의 모임 장소로 쓰이지만 유대인 공동체의 모임이나 모임에 모인 회중자체를 나타내기고 한다. 신약성경에 회당이 언급될 때 기본적인 기능으로서 종교적 예배와 교육을 위해 모인 장소로 나타나지만, 정치적 모임이나 결혼, 장례, 재판을 위한 생활 속 크고 작은 모임을 위한 장소가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회당은 백성의 예배와 교육, 헌물이나 헌금을 받고, 구제와 재판, 장례식, 나그네의 숙소 등 지역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다.

회당의 기원에 대해 요세푸스나 필로는 모세시대부터 존재해 왔다고 말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전보다는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봅니다. 유대인의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간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회당이 생겨났다. 회당은 유대지역에 남아있던 사람들 보다는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 공동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전 3세기 이집트에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세운 회당이 고고학적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나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주전 5세기 느헤미야가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 120명을 선발한 후 회당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겔 8:1)’를 회당 모임의 원형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예수님 당시의 회당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공적으로 가르쳐졌으나 성령의 임재와 축복을 크게 경험하지는 못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방문하여 가르치고 전도하시며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을 떠나지 않으시고, 어린 시절부터 회당을 방문하였기에 습관적으로 방문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정통 유대인이셨다(막 1:21).

회당은 팔라스타인에도 세워졌는데 예루살렘에 480개의 회당이 있었고 갈릴리 여러 도시에도 각각 회당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루살렘(6:7-8), 가버나움(막 1:21, 요 6:59), 나사렛(눅 4:16) 등의 도시의 회당이 언급되고 지역적으로는 유대와 갈릴리의 여러 회당(마 4:23, 마 9:35, 막 1:39, 눅 4:44)이 언급된다.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으로는 다메섹(행 9:2), 살라미(행 13:5), 비시디아 안디옥(행 13:14), 이고니온(행 14:1), 데살로니가(행 17:1), 베뢰아(행 17:10), 고린도(행 18:1-4), 에베소(행 18:19)가 나타난다.

 

회당의 구성원

유대인 성인 남자 10명이 회당 구성의 최소 단위였다. 회당에는 회당장, 장로, 구제하는 집사들, 신학교사, 통역, 헌금수집관, 하짠(Hazzan)이 있다. 장로는 회당을 관리하고 지도하는데 회중들을 교육하고 처벌(채찍질과 출교)을 결정하고, 헌금수집관은 헌금을 모으며, 하짠은 회당장을 도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한다. 하짠을 회당 건물을 청소하고 기물들을 관리하며, 예배드릴 때 두루마리 성경을 가져오거나 보관하며, 안식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해 세 번씩 나팔 부는 일을 담당했고, 벌금을 거두기도 하고, 공회의 결정에 따라 죄인에게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회당장은 장로들 가운데 선출되는데 임기는 1년이며 재선이 가능했다. 그는 예배 인도와 질서를 유지하고 ‘율법과 선지서’를 읽을 사람과 말씀을 가르칠 사람을 지명하고 안식일에 읽을 선지서를 선택했다. 회당장은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는데 탈무드는 남자의 결혼을 권면하며 학자의 딸, 위대한 사람의 딸에 이어 세 번째로 회당장의 딸을 얻을 것을 언급한다. 사도행전 13:15의 ‘회당장들’이라는 표현과 마가복음 5:22의 ‘회당장 중 하나인’을 보면 당시 여러 명의 회당장이 있거나 회당장이었던 살마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로제는 ‘아파마에아(Apamaea)’에서 나온 비문을 근거로 세 명의 회당장들이 한 회당에서 협력하면서 사역했다고 주장한다.

회당의 기능

①회당 예배

예수님 당시 회당 예배는 유대인 삶의 필수 요소였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라나셨을 것이며, 공생애 사역 중에도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셨고 가르치셨다(마 4:23, 막 1:21-28, 3:1-6, 6:2, 눅 4:15-30, 31, 44, 6:6, 13:10, 요 6:59, 18:20). 초대 기독교 유대인들도 회당 예배를 드렸고,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했다(행 9:18-20, 13:5, 14, 14:1, 17:1-3, 17:10-13, 18:1-4, 19, 19:8).

예배 순서는 찬양과 함께 예배에의 부름으로 개회된다. 이어 기도를 드린 후 예배를 인도하는 자와 회중이 ‘들으라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쉐마(신 6:4-9, 11:13-21, 민 15:37-41)를 서로 교독합니다. 쉐마 교독이 끝나면 18개 축복 기도를 한 회원이 낭송을 하고 전체 회중은 각각 ‘아멘’으로 화답한다. 기도가 끝나면 두루마리 성경을 보고 낭독하는데 암송하지는 않았다. 먼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을 매주 계속해서 낭독하는데(행 15:21) 유대인 남자라면 앞으로 나가 율법을 낭독할 수 있다. 회중이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본문은 낭독자 옆에 있는 통역자에 의해 생활언어인 아람어로 한 구절씩 통역되었습니다. 율법은 매주 정한 분량을 낭독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 회당에서는 3년에 한 번, 바벨론 지역 회당에서는 1년의 한 번 모세 율법이 낭독되었다.

율법이 낭독된 후 선지자의 글이 낭독되었는데 선지자의 글은 순서가 없이 회당장에 의해 선택되었고 본문은 낭독자가 원하는 장과 절을 마음대로 선택했다. 나사렛을 방문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두루마리를 받으셔서 이사야 61장 1-2절을 낭독하셨고 낭독 하신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셨다.

성경낭송이 끝나면 읽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설교, 권면이 이어지는데 유대인 남자는 지명에 의해 설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지명에 의해 회당에서 설교하시며 가르치셨는데(눅 4:21, 행 13:15) 앉아서 설교하고 가르치셨다.

특별한 경우에는 기도와 권면, 구제를 위한 헌금도 있었는데 회당예배 순서는 회당장의 축도로 마친다. 절기 때는 제사장들이 손을 들고 민수기 6:24-26로 축도하였다.

②교육

안식일 외에도 제2일(월요일)과 제5일(목요일)에 성경을 읽기 위한 모임이 있었고 유대인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예수님 당시 교육은 주로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하짠을 통해 어린이들이 율법과 십계명 등 기본교육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교육의 공간으로 이용하셨다(눅 4:16, 막6:2, 눅 13:10). 사도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눈을 뜬 후 곧 다메섹의 회당으로 달려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쳤다(행 9:20),

③법정

회당은 법정으로도 사용되었다. 마태는 마태복음 10:17, 23:34에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마가는 마가복음 13:9에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누가는 누가복음 12:11에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이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회당에서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공회(10인의 장로 회의)를 통해 다루어졌고, 판결과 함께 죄가 있으면 하짠에 의해 형벌이 가해졌음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향했으며(행 9:2), 나중에는 ‘주를 믿는 살마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렸다(행 22:19)’고 고백한다. 회당에서 가해진 형벌은 출교(요 9:22, 16:2)나 채찍질 등이 있다. 회당에서 재판을 한 것은 공동체의 규율을 유지하고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버나움의 회당은 부속 건물로 법정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붕이 없이 뚫려 있습니다. 지붕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판결을 굽게 내리지 않고 정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함이라 한다.

④각종 모임의 장소

회당은 결혼식과 장례식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성경에 결혼식이 남자의 집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집에서 잔치를 할 수 없는 경우 회당이 이용되었다. 또한 공동체의 교사들이 죽었을 경우 회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외에도 회당은 정치적인 모임이나 공동체의 문제들을 토의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⑤여행자의 숙박 장소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1세기 중반의 비문에는 제사장이며 회당장인 데오도투스(Theodotus)가 율법을 읽고, 계명을 가르치며, 먼 나라에서 온 자들에게 방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당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면서 항상 회당을 방문했다.

 

7. 출산과 태어남

이스라엘은 가족 중심의 사회로 가족들은 함께 일하고(마 4:21), 함께 종교 생활을 하며(눅 2:42-51, 요 7:8), 좋은 일이 있을 때 밤새 잔치하며 지냈다. 아이의 탄생은 가족의 특별한 경사 중의 하나였는데 탈무드는 자녀가 없는 것은 마치 죽은 자와 같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했기에(창 1:28) 자녀가 없는 것을 하나님의 벌로 생각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대를 이어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유업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창 18:19). 그렇기에 유대인 부모에게 특히 결혼한 여자로서 아내에게 자녀의 출생은 즐거운 일이며 아들의 출생은 기쁘고 기쁜 일이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생활 방식을 습득하게 하며 신앙을 물려주는 곳이었다.

 

①출산

출산할 때의 고통은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온 결과로(창 3:16) 이사야는 산모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신음한다고 묘사한다(사 26:17). 구약성경에는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이 여럿 등장한다(창 35:16-19, 삼상 4:19-22). 신약성경에는 그러한 사건이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 출산 후유증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기에 아이를 순산하는 것은 감사의 대상이었다. 또한 아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시 127:3-5)이었기에 고통이 있지만 아이의 태어남은 감사의 대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할 때가 이르면 근심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6:21).

율법은 여인이 잉태한 후 아이를 낳으면 부정하다고 했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했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여지 아이를 낳으면 14일 동안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말한다(레 12:1-8).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산모가 정결케 되는 의식의 날인 ‘결례의 날’을 지켰다. 누가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이 결례의 날을 지키기 이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언급한다(눅 2:22).

②태어남

오늘과 마찬가지로 고대 사람들도 아들을 더욱 원했다. 로마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죽게 내버려 두는 광신적 남아 선호사상을 가졌지만 유대인들 딸도 사랑과 인정으로 키웠다. 그러나 아들이 없는 유대 가정은 불완전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딸은 결혼 후에 집을 떠나는 반면 아들은 집안의 가업을 이어 받아 부모를 부양했기 때문이다. 딸이 아들과 동등한 취급을 못 받았듯이 같은 아들이라도 장자는 특혜를 받았지만 다른 아들들은 장자와 같은 똑같은 대우와 권리를 받지 못했다. 이유는 상속자를 통해 가문이 지속되었기 때문인데 상속에 있어 장자는 우선권을 가졌으며 장자가 받는 상속은 다른 자식의 두 배였다. 장자는 가족 전체를 책임지는 관리자였는데 특히 영적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 이후 그의 영적, 물적 상속권을 이어 받는 내용이 전개되며 장자였지만 상속권을 잃어버리고, 조상의 계통을 이어가는 족보에서 제외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보게 된다.

③할례와 이름 짓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했다. 고대 각 지역에서 할례가 행해졌는데 건강을 목적으로 포피를 벗겨냄으로 아내의 세균 감염을 막기 위한 위생상의 이류로 할례를 했으며, 성년의 의미로 할례를 행함으로 성인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할례의 의미는 달랐다. 하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증이었다(창 17:10-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 때 할례의 언약을 하셨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를 8일 만에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갈 자손이 되게 했다. 할례는 부모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준수하는 행동으로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준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에서 개종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할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많은 유대인으로서 개종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했다. 이 할례 문제가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이 끝난 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논의 되었는데 할례가 기독교인이 되는 선결 조건일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였다(행 15:5, 19:21). 할례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것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할례 할 팔일이 되어 이름을 지어주는 것(눅 1:59, 2:21)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로 이름을 고쳐 주신 후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중요하다. 족장시대 이전 큰 사건이 있기 전이나 후에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에게 주어진 이름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을 고백하게 한다. 족장시대를 지나며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도 많이 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름들은 부모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자녀의 이름을 짓거나, 출생 시 특별한 일이나 중대한 사건과 관련하여 이름을 지었다. 고대 사람들은 성(性, 가족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것은 적은 구성원 사회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복잡한 사회가 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신약성경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개개인을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지역 명(나사렛 예수, 아리마대 요셉, 가룟 유다)을 붙이거나 하는 일(세례 요한, 세리 마태) 또는 정치적 견해(제룟·열심당 시몬)에 따라 수식어를 붙였다.

④첫 아들의 속죄의식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 13:2)”고 말씀하셨고,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민 3:12)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라(민 3:13)”고 말씀하시며 태에서 처음 태어난 자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첫 아들이 태어나면 출생한지 한 달 이후에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해야 했다(민 18:16).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며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성전에 와서 속전의식을 행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첫 아들이신 아기 예수님에 대해 이 의식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눅 2:22-23). 이후 부정했던 산모를 정결케 하기 위해 ‘결례’를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눅 2:24). 히브리서 기자는 유월절 때 장자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이 장자를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히 11:28)

 

8. 여인으로의 삶

이스라엘의 조상 족장들의 생활은 유목 생활이었다. 유목생활은 전 대가족의 통속이 족장 1인의 지도력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족장의 권한은 가족의 생명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영향은 이후 민족이 형성되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 나라로 전개되며 가족과 나라의 지도자들을 주로 남자들이 맡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하심으로 똑같은 가치를 가졌지만 여성들은 남자에 비해 중요한 존재로서 동등하게 간주되지 못했다. 율법도 여성에 대해 상당히 제약을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아들이 없이 슬로브핫이 죽자 그의 딸들은 모세와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서 아버지의 기업을 요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들의 말을 들어 기업을 소유하게 하셨다(민 27:6-8). 그러나 여자는 재산의 일부로 생각되기까지 했고 여자는 간단한 존재이며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여자는 집 안에서 어머니에게 가사에 대한 교육만 받았으며, 집 밖에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고 직업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가지 남자의 보호아래 있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아버지의 권위와 보호 아래 있었고, 결혼을 하면 남편에게 소속되고, 남편이 죽게 되면 아들에 의해 보호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구약의 관습은 1세기의 유대 남자들 중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게 했는데 이런 생각은 많은 남자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내와 딸들은 가족 내에서 사랑받았으며 남자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예수님 당시를 잠깐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마 27:55, 28:5, 8-9, 막 15:41, 눅 8:3. 10:28, 23:39). 또한 예수님께서는 많은 여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며 믿게 하셨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네 명의 마리아(마 26:7, 막 15:40, 눅 8:2, 10:38)와 마르다는 많이 친숙하다.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정도로 여인들과 많은 교제를 하셨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여자는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학식 있는 사람이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여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이 부도덕하며 심지어 이러한 행동이 여자에게는 남편에 의한 이혼 사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극단론자들은 길거리에서 자기 아내와 이야기 하는 것까지도 반대하였다. 당시의 남자들은 바보 같은 사람들이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었으며 무책임한 사람들이 혼자서 여자를 만나는 것으로 인식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여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에 대해 부도덕하고 부정하다 하여 힐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율법이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의 여인에 대한 인식의 장벽을 뛰어 넘어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여인들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지도자 층의 랍비가 견해를 밝힌다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지도 않았다. 또한 로마와 헬라 문화의 영향은 유대인의 여성관에 영향을 주었기에 통일된 여성광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시기라 해도 예수님의 생동과 태도는 당시에 혁명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며 고쳐주셨고(마 8:14-15), 여인이 발을 닦고 입 맞추는 것을 허락하셨고(눅 7:36-50), 12년 동안 혈루증 않던 여인이 만졌을 때에도 용서하셨고(눅 8:43-48), 마르다의 초대에 응하시고(눅 10:38-42),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렸던 여인을 안수하여 고치시고(눅 13:10-13), 사람들이 보는 장소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홀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셨다(요 4:5-27).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1세기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은 여인이 집안 일 이외의 교육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르치셨으며(행 1:4-14) 마르다는 예수님의 발 앞에 나와 가르침을 받았다(눅 10:39). 예수님께서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반대하셨으며 여성의 존엄성을 지켜주셨다(마 19:9).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예배에서 여성을 제외했고 그녀들의 행동 범위를 회당 뒷부분 또는 2층으로 한정시켰다. 여인들은 종교적 예식에 참여하기보다는 남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제한되었다. 그러나 성전의 한 공간은 여인의 뜰로 지칭되었고 여인들의 접근이 가능해서 여선지자 안나는 과부가 되어 84세가 되었을 때 성전을 떠나지 않음으로 아기 예수를 만나 고백할 수 있었다(눅 2:3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