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2장 시대구분과 연대기 이해의 중요성

예림의집 2013. 10. 1. 22:55

 

2장 시대구분과 연대기 이해의 중요성

 

I.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시기

세례 요한은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지는 않았지만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태어났다. 그는 아비 사가랴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던 중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라고 계시를 받은 후 태어났다. 그는 태중에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어미 엘리사벳을 만나러 왔을 때에 네 문안하는 소리를 듣고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 정도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막중하였던 자이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지내며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 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례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는 지 열 다섯 해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눅 3:12).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는 언제일까?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면 해결할 수 있는데 디베료 가이사가 로마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주후 14년 8월 19일이고 열다섯 해 되는 해는 주후 28-29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전 4년에 태어나셔서 주후 26년이 되는 해, 곧 예수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흔히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시작한 시점이 주후 28-29년이라면 그 이전인 주후 26년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는 누가복음 3:1-2에서 6개의 시기를 언급하며 세례 요한엑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시기를 정화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그중 본디오 빌라도의 유대통치(주후 26-36년), 헤롯 안디바스의 갈릴리 분봉왕 통치(주전 4-주후 39), 헤롯 빌립의 이루래, 드라고닛 통치(주전4-주후34년),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의 통치(주후 18-36년)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로 알려진 주후 26년을 지지하지만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15년과 안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시기에 대한 언급은 문제가 된다. 안나스는 주후 6-15년까지 9년동안 대제사장직을 맡고 예수님 당시에도 사위인 가야바와 함께 실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디베료 황제의 통치시기에 대한 언급은 난제이다.

현재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시기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시기에 대한 이해는 주후 26년과 주후 28-29년으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런데 공생애 출발시기 뿐 아니라 공생애 기간, 십자가를 지신 유월절 등 연대적으로 정확히 통일된 것은 없고 연구중이다.

또한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의 공생에 출발 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내용은 없다. 다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는데 두 사건을 오해하는 데에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에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던 기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례 요한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진 자였다. 처음에는 맡은 바 사명을 감수하며 오실 이에 대해 증거하고, 회개하는 세례를 베풀며 많은 무리를 가르쳤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요한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위치를 잠시 망각한 것 같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이었던 헤롯 안디바스가 헤로디아를 취한 사건을 책망하다 옥에 같히게 된다.

헤롯 안디바스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을 뿐 그를 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많아 소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옥에 갇힌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옥에 갇힌 요한은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눅 7:18-19). 아마도 옥에 갇힌 기간이 적지 않은 세월이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는 활동 무대를 갈릴리로 옮기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세례 요한은 이 일들을 제자들을 통해 듣게 되는데 누가복음을 기준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이 자리신 곳인 나사렛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시고 본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기심(눅 4:31). 갈릴리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제자를 택하시고(눅 5:1-11), 문둥병자를 고치심(눅 5:12-15).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도하시고(눅 5:16), 침상채로 들고 온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눅 5:17-26), 세관에서 마태를 제자로 삼으심(눅 5:27-29).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다니시는 장면(눅 6:1-5), 또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시며(눅 6:6-11),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눅 6:12), 평지에서 설교하심.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눅 7:11-16), 나인성으로 가셔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눅 7:11-16), 세례 요한이 보낸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하신 후 설교하심(눅 7:17-35), 요한이 잡히신 후 예수님의 사역을 적어 보았는데 적지 않은 시일이 지난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옥에 같힌 기간이 적지 않은 기간이라면 이 기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세례 요한은 옥에 갇힌 지 얼마 후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옥에 갇힌 후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옥에 갇힌 상황으로 구속받고, 힘든 자신의 처지와 자기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상황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 사명이었음을 잊은 것 같다. 번민 가운데 드는 의심의 표현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였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바지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의 환경이 힘든 상황으로 바뀌었을 때 아마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가 하고 의심하지는 않는가? 이제 장성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로서 주신 말씀을 깨닫고 기도로 간구하여 의심하지 않고 미천한 나를 불러 사명을 맞겨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가 되자.

 

2. 잠 못 드는 여리고(눅 19:1-10)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유월절 여행길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열두 제자뿐 아니라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을 들은 자와 목격한 자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영행 길에서 고쳐주신 문둥병자 등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가는 순례객으로 함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태는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마 19:2)’고, 마가는 여리고를 출발할 때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함께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로 자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려는 많은 순례객들과 함께 여리고에 도착하셨다.

본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여리고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한 소경, 곧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를 고치셨다(눅 18:35-43). 이후 여리고 성 안으로 들어오셨고 예수님을 보러 나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를 보시고 그를 부르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 유하시며 대화를 나누셨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그의 집에 구원을 베푸셨다. 이날은 금요일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주일 새벽까지 여리고에 머무셨고 주일 새벽 일찍 예루살렘으로 떠나신다.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 여리고는 왜 잠 못들고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 여리고에 들어가셨다고 했다. 그 근거는 이틀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마가가 기록한 ‘이미 저물어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가셨다(막 11:11)’는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8-10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셨을 때 해가 저물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주일 새벽 일찍 여리고를 떠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일 새벽 여리고를 떠나셨다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는 여행할 수 없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여리고에 머무실 수밖에 없으셨다.

금요일 오후 여리고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시고 정확히 일주일(금요일 오후-금요일 오후) 후면 당할 일을 아시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계신다.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다. 많은 무리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고 지금 여리고에 머물고 있지만 이번 유월절은 다른 유월절과 봄 다르다. 예수님과 생각이 다른 많은 무리들의 이틀 후 행동을 살펴보자.

종려주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앉으실 나귀 새끼 위에 얹었다. 또한 많은 무리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타난 행동이었다.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다윗의 왕정을 다시 수립할 왕으로서 예수님, 유대 왕국의 꿈을 실현할 분으로서의 예수님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마음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땅에 펴는 행동이나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깔고 흔드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겉옷을 길에 펴는 행동은 승리의 상징이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였고, 나뭇가지 곧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흔드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가는 이번 여행길이 많은 무리들에게는 로마에게서 나라를 회복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유대왕국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이 되어 여행할 수 없는 안식일의 여리고는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많은 순례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이다. 안식일이 시작되어 더 이상 여행할 수 없는 이들은 여리고와 주변에서 유숙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리고에서 예수님에 대해, 메시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틀이 지나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번에는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잠 못 들며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잠 못 드는 이유와 달리 여리고에 잠 못 드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였다. 본문은 삭개오의 직업이 세리장 이었고 부자라고 소개한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천한 사람으로 죄인으로 취급당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 들여 로마에 바치면서 자신들의 배도 불렸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인가 보고자 했지만 사람이 많았고 키가 작았기에 볼 수 없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실 경로를 예상하고 미리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 위로 올라갔다(눅 19:4).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돌무화과 아래에 가셨다. 점점 다가오시던 예수님께서 돌무화과 아래에 서셨을 때 삭개오는 아주 마음이 설랬고 두근두근 거렸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고 ‘보고자’, ‘경험하고자’ 거리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3절과 4절에서 ‘에이도(보다, 알다, 경험하다’를 반복해서 쓰면서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기다림을 보여주고 있다. 돌무화과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는 왜 예수님께서 이쪽으로 오시지? 왜 나무 아래로 오시지?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아주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랑ㄴ 것은 예수님께서 나무 위를 처다보셨다(아나폴레오: 위로 쳐다보다, 다시보다, 눅 19:5). 예수님께서 올려다보시며 시선을 멈춘 곳은 바로 자신이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무화과 아래로 오신 이유는 자신 때문인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삭개오는 급히, 서둘러 내려왔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눅 19:6). 그런데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수근 거렸다. 불평하였다. 불만을 표시했다(눅 19:7). 사람들은 왜 불평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들이 메시아로 좇으며 이번 유월절 예루살렘에서 무엇인가 일을 이루기 위한 기대감으로 함께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많은 무리들은 수군수군하고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와 머무실 때 삭개오는 회개의 고백을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서서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값절이나 갚겠나이다.”고 말씀드렸다. 삭개오의 고백은 몇 일 전 예수님의 유월절 여행길에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로 왔다가 자신의 재산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돌아간 부자청년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마 19:16-22, 막 10:17:21, 눅 18:18-30).

또한 삭개오는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하였으며, 토색한 것은 사배나 갚겠다고 말한다(눅 19:8). 레위기에 의하면 토색한 것에 5분의 1을 더하여 돌려주게 되어 있다(레 6:2-5). 삭개오의 회개는 예수님께로부터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구원을 얻는 자가 되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 머무는 이틀 밤 아주 잠 못드는 바이 되었을 것이다.

‘잠 못 드는 여리고’란 제목을 붙인 배경적 근거는 안식일과 안식일에 2000보 이상 여행할 수 없다는 당시의 규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의 거리가 ‘하룻길’이었다는 것, 금요일부터 토요일을 지나 주일 새벽까지 여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배경적 요소와 ‘이미 저물어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가셨다(막 11:11)’는 마가의 기록에서 이미 성전에서 오후 제사(오후 3시)도 끝나 서언에서 행하실 일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로 물러가셔서 하루를 보내시고 다음 날인 월요일 다시 성전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3.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8:31-33에는 이 땅에서의 공생애를 십자가로 끝내시며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가르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알려주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감추었기 때문, 비밀이었기 때문이라고 누가는 덧붙인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길에서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두 번이나 말씀하셨고 본문까지 세 번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세 번 알리셨다. 첫 번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이신 후(마 16:20-21, 막 8:30-32) 말씀하셨고, 두 번째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변모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후 산 밑에 내려와 귀신을 내 쫓지 못하는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마 17:9, 22-23, 막 9:9, 눅 9:44-45)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여행길에(마 20:17-19, 막 10:32-34, 눅 18:31-34) 말씀하셨다. 세 번씩이나 동일한 말씀을 하셨지만 깨닫지 못한 이유를 누가는 이 가르침이 아직 12제자에게도 감추였다고, 비밀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1년 전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지역에 머무시며 오병이어를 행하셨고 6개월 전 초막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려 하시다가 명절 중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던 적이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당시 갈릴리에 살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절기가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던 것과는 다른 행동이셨다. 12제자들은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여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다른 행동을 보이시던 이전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고 말씀하시며 유월절이 되기 전 미리 올라가고 계시는 이번 유월절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예수님과 따르는 많은 무리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을 뿐 왜 이번 유월절에 때에 맞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시는지, 선지자의 예언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는데 왜 인자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시는지 관심이 없었다.

갈릴리에 계실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박에서는 죽는 일이 없다”는 말씀을 갈릴리에서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중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나누는 대화를 다 들었을 것이다(눅 13:31-35). 십자가가 준비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세 번 가르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이 없었기에 깨닫지 못했고 비밀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비밀에 제자들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목적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마 6:30, 14:31, 16:8, 막9:19, 요 6:26).

예수님께서 죽으시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12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말씀하셨던 것을 언급했는데 아마도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다른 많은 무리들에게도 이 사실이 전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흘 만에 다시 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자가 사흘 후 살아나리라’는 것을 기억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사람들이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마 27:63-64).”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8:32-33)”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다려야 할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사사건건 방해하며 대립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지키게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 땅에 40일을 계시며 믿지 못했던 사람들을 믿게 하셨다.

이제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시간적으로 따져보겠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안식 후 첫 날 곧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시간을 새벽 6시로 생각하더라도 39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금요일 오후 3시-밤 12시 9시간 + 토요일 24시간 + 주일 새벽까지 6시간). 4시간, 만 이틀도 되지 않는 시간인데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근거일까? 이것은 현대인들의 시간 계산법과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날자 계산법은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로, 한 달로 계산한다. 한 달이 지나면 일 년으로 계산한다. 그렇다면 1시간이 지나도 하루로 계산하는 것은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한 가지 더 다른 점은 현대인들은 자정부터 다음날 까지(편의상 0시-24시)를 하루로 생각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계산법대로 날 수를 계산해 생각해 보면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부터 금요일 해지기 전까지가 하루이고 안식일(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하루가 지났고 안식 후 첫날 12시간(새벽6시에 부활하신 것으로 가정한다면) 정도가 지나 부활하셨기에 정확히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맞다. 이 시대의 시간법이 아닌 성경시대의 시간 법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지만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믿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믿고 따르며 전파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바란다.

 

4. 새벽부터 밤까지 꽉 찬 하루(요 20:1-25)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사흘을 머물러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주일 새벽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후 이 땅에 40일을 계셨는데 성경은 이 40일 도안 11번 나타나셨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1번 중 5번이 부활하신 당일 새벽부터 밤까지 있었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상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행하셨던 “새벽부터 밤까지 꽉 찬 하루” 일정을 따라가 보겠다.

①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요 20:11-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일곱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신 막달라 마리아였다. 여인들과 함께 왔던 마리아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다시 무덤에 왔다가 가지 않고 무덤 밖에 남아 울고 있었다.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본 막달라 마리아는 두 천사를 보았고 천사는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고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다(20:14). 두 천사와 이야기하던 마리아는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주 주의 깊게 보았다(데오레이: 응시하다. 지켜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 인줄 착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동산지기인줄 알고 “주여(퀴리오스)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고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아마도 이전에 부르시던 똑같은 음성으로 부르셨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돌이키며 “랍오니”라고 반응한다.

왜 마리아는 예수님인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했을까?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으나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으나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말씀을 다 믿지 못하고 믿어지는 것만 믿었기 때문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라고 알리라”고 말씀하신 후 떠나가셨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체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고 의심했다. 마가는 제자들의 반응을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막 16:10)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1)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의 반응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만 믿기로 작정했는지 함께 있던 공동체의 증거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였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제자들 또한 믿어지는 것만,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도 자신이 가능하다고 이해되는 것만 믿고 계시지는 않는가?

②무덤에 왔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마 28:9-10).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두 천사를 통해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하고 증거 받은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 달음질했다. 아마도 무덤에 왔던 다섯 명 이상의 여인들은 흩어져 있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나누어져 갔던 것 같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다고 기록하였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이야기 했고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했다.

마태복은 28장의 여인들은 마리아와 함께 무덤에 갔다가 다른 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의 소식을 알리러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 같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믿지 못했던 것이 두렵기도 하여 달려가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으로 달려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시어 “평안하뇨”라고 물으셨고 여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경배했다. 예수님께서는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엑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③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눅 24:34, 고전 15:5).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전해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알았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때에도 그저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을 이해하게 한다(요 6:26).

하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세 번 부인함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던 베드로가 이렇게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알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 사실은 인간이 정말로 나약한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들어 쓰실 때 얼마나 철저한 회개를 하게 하시는 가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타나셨다. 아마도 무덤을 다녀간 후 집에 머물며 고민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셨고, 이후의 일들을 가르치셨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이후 철저히 회개하였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되었을 것이다.

④주일 오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눅 24:13-35).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두 명이 안식 후 첫날이 되자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붙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이동할 수 없는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5. 1세기 당시의 메시아 사상 참조).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은 무교절 기간이었고 다른 해 무교절 같으면 7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며 무교절을 거룩히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메시아를 잃었고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말씀하셨던 사실도 증거 받았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그랬기에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다.

예수님께서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동행하시며 가르치셨다. 동행하는 예수님을 두 제자는 알아보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되어진 모든 일들을 증거 받고도 믿지 못하는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25)” 말씀하시며 모세로부터 선지자의 모든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눅 24:27).

두 제자는 길을 더 가려는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유하며 저녁을 먹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행하셨던 것을 기억하게 하시려 함과 같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주셨고 두 제자는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았다. 두 제자는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 했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과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막 16:12-13).

⑤주일 밤 예루살렘에서 도마를 제외한 열 사도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회복해 주셨다(요 20:19-20).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와 무리들에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나 커다란 사건이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낼 때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으나 되어진 모든 일을 목격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자들의 매수에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감추어야 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예수님을 도적질해 갔다고 거짓말을 증거 하게 했다(마 28:11-1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했지만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돌아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주셨다”고 증언했지만, 무덤에 갔던 여인들을 통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었지만, 베드로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고 전했지만, 마침내 엠마오로 내려갔다가 헉헉대며 돌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다는 강력한 외침을 들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두려워하며 예루살렘 종교당국이 퍼뜨리고 있는 소문을 듣고 이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 말씀하시며 두려움을 없애 주셨다.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평안을 먼저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이 믿음을 앞서기에 믿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한다(눅 24:37).

예수님께서는 놀라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 24:39)”고 말씀하셨고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말씀하시며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눈 24:40).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이야기 하는 막달라 마리아, 여인들, 베드로,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의 경험을 들으면서도 믿지 못했다.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에이도: 보다, 알다, 경험하다.), 경험하고 나서야 진짜로 돌아가셨던 분이시고 자신 앞에 살아서 계심을 보고 기뻐하였다. 죽었던 사람의 부활은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기에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설명하시고 증명하심은 제자들의 믿음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다시 일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오히려 너무 기뻐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눅 24:41-43).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시며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세까지 주셨다(요 20:21-23).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일 하루 참 바쁜 일정을 보내셨다.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곳에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는 장시간 함께 하시며 대화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자를 잃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제자들을 찾아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신앙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

 

5. 1세기의 메시아 운동

예수님 당시 다양한 계파가 존재했던 유대 사회의 그룹들 안에 강렬한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다. 이 대망 사상은 일반 백성에게도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대망하는 메시아 강림에 대한 이야기는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고 중요한 유대 종말 사상의 하나였다. 예수님을 전후로 약 1백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10여개의 메시아 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리라 믿었고,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크고 작은 혁명 그룹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배경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당시 메시아를 신이라는 존재로서 잠시라도 생각했던 1세기 유대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그리스도냐?”하고 질문했을 때, 그들 모두가 삼위일체 신학을 가졌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절과 ‘인자’라는 구절이 당시 유대교 속의 적어도 어떤 그룹에게는 메시아적 의미를 지닌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용어들이 신적 존재 자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제2 성전시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1세기에는 여러 그룹들 안에 다양한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다고 이미 말했는데, 메시아에 대한 통일된 개념은 없었다. 하지만 왕권자체에 대한 생각이 메시아를 언급하는 본문들 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왕이 도래한다는 의미는 첫째, 그가 성전을 회복하고 지으실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 그가 적들과 결정적인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며,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예수’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유대인에게는 본래 성이라는 것이 없다. 굳이 성에 대응하는 것을 든다면 이름 앞에 지파나 아버지의 이름, 출신지를 쓴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히 드문 이름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예슈아(예수아)’, ‘예수’, ‘예슈’, ‘예호슈아(여호수아)’ 등으로 발음되는 이 모두가 ‘구원’이란 뜻을 가진 낱말인데 조금씩 다르게 발음된다. 1세기 당시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면 예수 역시 어떤 예수인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생긴 호칭이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 예수’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반대자들에 의해 여러 번 ‘나사렛 예수’로 언급되고 있다(마 2:23, 21:11, 26:71, 막 1:25, 10:47, 14:67, 눅 4:34, 18:5, 7, 19:19).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베들레헴 사람 예수’로 불리지 않았고, 누가가 ‘본 동네’라고 한 가버나움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고 사셨지만 ‘가버나움 예수’라는 호칭도 없다. 그렇다고 더군다나 ‘예루살렘 예수’라는 말도 없다. 기독교 박의 자료도 나사렛 예수가 사실로 살았다는데 대해서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23에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어떤 학자는 ‘나사렛 사람’과 ‘나실인’을 연관시켜 해석하려고 시도하며, 다른 학자는 이사야 11:1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네쩨르)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에 나타나는 ‘네제르(가지)’를 나사렛의 히브리 발음이 ‘나짜렛’과의 유사성을 찾아 설명하력 한다. 이 구절의 ‘네쩨르’가 메시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함으로 마태가 이를 약간 변형시켜 ‘나사렛 사람(헬라어: 나조 라이오스)’로 썼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마태복음 2:23의 출처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예수는 당대 사람에 의해 ‘나사렛 예수’로 불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나사렛 사람 예수(히브리어로 예슈 하노쯔리)’라 하며, 히브리어에서 기독교인은 ‘나즈룻(ㅌ)’이라고 통요하고 있다. 이 히브리 단어들은 모두 나사렛이란 지명에 관련되었을 뿐, 메시아(헬라어로는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짐)와는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이 히브리 용어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무시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들이라 하겠다. 탈무드에서 조차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증한 싹’으로 말한다. 1세기 당시 나사렛은 옆 동네 가나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마을이었다.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대답한 나다나엘의 말에서도 나타난다(요 1:46).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1세기경 나사렛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약 150명이었다. 나사렛은 하부 갈릴리의 구릉지에 있으며 해변 길(비아 마리스)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음에도 상거래의 주요 거점이 되지 못했다. 나다나엘의 속단과 오해는 예수 당시와 오늘날 까지도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마법사 나사렛 예수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는 나사렛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였다고 외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리적 출신보다는 본래적 출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세기 메시아 운동이 활발했다고 했는데 당시 메시아라 자칭하거나, 메시아로 일컬어져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그 메시아가 죽임을 당하면 따르던 사람들은 엉뚱한 줄에 섰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이후 따르던 자들은 그 운동을 포기하거나 혹은 그의 가족 중에서 새로운 리더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예외가 되었다.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당국에 의해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중심에 서 있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야고보가 메시아라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였다.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실패한 것이 아니었으며 진정한 메시아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부활하셨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그들을 다시 가르치셨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마침내 따르던 자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초기 교회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에 의해 역사적 예수를 만들었고 복음서를 통해 기록하게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말씀하셨던 것이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성취도어 깨닫게 했던 것이다.

 

6.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헤롯

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의 역사나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를 이해함으로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였는데 이스라엘만은 다른 정복지역과는 다른 대우를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로마의 원로원에서 대리 지배자로 보내는 총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왕을 세워 통치하게 하였는데 처음으로 세운 왕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왕으로 있었던 헤롯 대왕이다.

헤롯 대왕은 헤롯 왕가의 창시자로 10명의 아내를 통해 자식을 낳았는데 그 가계도는 너무나 복잡하다. 그는 25세에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하고 주전 40년에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처음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두매,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정복하고 주전 3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성격이 강인하고 또 현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매우 잔인하여 왕위를 지키기 위해 자식과 아내를 주였으며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살해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마 2:16). 많은 공공사업을 하고 주전 19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착수하였고 주전 4년에 악질에 걸려 70세로 죽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는데 유대와 사마리아는 아켈라오가,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디바가, 이두래와 드라고닛은 그 동생 빌립이 통치하였다(눅 3:1).

헤롯 대왕의 아내 말다게에게서 난 장자 아켈라오가 주전 4년에서 주후 6년까지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였는데(마 2:2) 그의 통치가 너무 억압적이었기에 유대와 사마리아의 귀족층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위협을 내세워 아켈라오를 숙청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에 아켈라오는 왕좌에서 쫓겨나고 유대는 황제가 임명하느 총도기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로 되었다.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 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빌라도는 너무도 유명하다. 갈릴리와 베레아는 말다게에게서 난 헤롯 안디바에 의해 통치되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투옥하고 그를 처형시켰는데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고 칭했고(눅 13:31-32)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후 갈릴리 사람이었기에 빌라도가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님을 보내었을 때 심문을 받게 하였다(눅 24:7-12).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오셔서 관을 당하시는데 목요일 저녁에 잡히신 후 여러 곳으로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당하신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유대의 총독 빌라도,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에게로 밤새도록 심문당하시다 결국 빌라도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게 된다. 이 과정 중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하룻밤 사이에 유애를 다스리는 총독 빌라도에게서 갈릴리를 다스리는 헤롯 안디바에게 보내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절기)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를 이해하면 이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심문 받는 시기는 유월절 전날이었기 때문에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상태이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던 중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임을 알고 판결을 내리기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헤롯 안디바에게로 보내었던 것이다(눅 23:1-7).

누가는 이 심문과정을 기록하던 중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이 원수였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다스렸던 지역을 생각해 보면 된다. 헤롯은 유대인으로 갈릴리를 다스리는데 빌라도는 이방사람으로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를 다스리고 있으니 이로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이 이들을 서로 시기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는 이들이 친구가 되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한편이 되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보내신 자를 정확하게 깨닫게 하려 하심에 감사하고 보내신 자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성경상고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반대편의 입장에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임을 헤롯과 빌라도의 관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