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예림의집 2013. 6. 15. 22:0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제 1장 성경에 관하여(Of the holy Scripture)

 

1. 성경의 필요성과 계시 기록의 종결성

 

비록 자연의 빛과 또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아주 분명히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핑계하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주기에 충분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때에 다양한 방식들로 그의 교회를 향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또 그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며,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의에 대항하여 교회를 보다 더 견고하게 확립하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전부 기록에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런 이유가 성경을 가장 필요한 것으로 만드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신 이전의 그런 방법들이 이제는 중지되어 있다.

 

<요지>

1. 구원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다.

2. 왜냐하면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이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9-20).”

3. 그러나 일반계시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

4.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뜻을 그의 교회에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5. 또 주님께서는 자신의 계시를 전부 성경 기록으로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

6. 그러나 이전의 그런 계시 기록의 방법들은 이제 중지되어 있다.

 

<해설> 자연의 빛과 일반 계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에 대하여는 자연의 빛에서 알 수 있고, 또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다 이를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창세로부터 계속 지금까지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본성의 빛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하여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좋은 증거이다. 그러나 이 좋은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죄 때문이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와 또 각 개인의 본죄들 때문에 사람들의 영의 눈이 가려져서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핑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문재에 있어서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변명할 수도 없고 또 핑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또 그의 조상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지금까지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계시에 관한 이와 같은 견해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견해와 동일하며, 또 무엇보다도 성경의 견해와 동일하다.

 

<신학적 코멘트> 계시 기록의 중지

하나님께서 여러 세대를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방법들로 하나님 당신의 뜻을 쉴 새 없이 나타내셨다. 즉, 특별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표준이 되는 것과 구속 진리로서의 핵심들을 성경으로 기록하셨고, 이것은 종료되었다. 특별계시로서의 성경계시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으로 완성되고 종료된 것이다(계 22:18-19). 따라서 이제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서의 특별계시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으며, 성경 역시 더 기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의 표준과 구원 진리로서 이미 충족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도들을 통하여 주어진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갈 1:9)”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구원 계시가 완성되었음과 다른 계시들의 불필요성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성경을 깨닫는데 있어 성령의 조명을 요할 뿐이요, 개별적인 계시를 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 자신께서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계시들을 이미 성경에 다 쌓아 두셨기 때문이다.

 

<삶의 적용>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하늘, 달, 별, 식물, 동물, 사람 등)을 바라다 볼 때, 당신은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3-4).”

 

답: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첫째, 세상을 창조한 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 그 만물들의 질서와 생명력을 바라보면서 우주 만물을 보존하시고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셋째, 그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 또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나의 존재의 목적임을 알게 되었다.

 

2.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그의 교회에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또 자신이 계시를 전부 성경 기록으로 맡기시기를 기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ㄱ백 본문 1장 1절의 진술에서 찾아 답하시오.

 

답: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며,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의에 대항하여 교회를 보다 더 견고하게 확립하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그러면 당신은 성경 기록과 관련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잘 준행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의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앞으로의 당신의 삶을 주님의 목적에 맞게 방향 지워 보십시오.

 

답: 첫째, 하루에 성경 10장 이상을 읽는다. 둘째, 모든 말씀 들을 기회(각종 예배)에 충실히 참여하고 노트함으로 목사님과 교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다. 매일 아침 하나님이 말씀을 묵상(QT)하며, 그 말씀을 기록한다. 매일 저녁 잠자리에서 하루 동안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삶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한다.

 

 

 

2. 구약과 신약의 정경들

 

‘거룩한 성경’ 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이름 아래 현재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 책들은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대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규칙이다.

 

<요지>

1.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신·구약의 정경들은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으로 모두 66권이다.

3. 신·구약의 66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규칙이다.

 

<해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이다.

제2단락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여 이 신조를 작성했던 자들이 66권을 어떤 과정을 통하여 정경으로 결정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며 66권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정경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진 것이기에 그 자체로 권위를 갖는다고 진술한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진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결정된 역사적 배경

정경이라는 영어는 영어의 ‘캐논(canon:표준, 기준, 재고 측량자 등의 의미)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구약 성경 39권이 정경으로 결정된 것은 A.D. 90년 경 얌니아 회의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반면에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된 것은 A.D. 397년 북아프리카의 칼타고 회의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성경 66권 자체는 교회가 그것을 정경으로 확정 공포하기 이전에 이미 정경이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인증이란 단지 성경의 내적 속성에 대한 외적 인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 66권이 완전히 수집 공인되기까지 일부 책들에 대하여 논란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인간 교회가 임의로 정경인가 아닌가를 정하는 과정이 아니었고, 오히려 분명한 내적 속성을 공고히 확증하기 위한 작업과정에 불과하였다. 즉, 성경 66권은 교회가 이것들을 정경으로 인정해서 정경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기록되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인간이 발견, 순복하도록 섭리하셔서 정경으로 알게 된 것이다.

정경 형성의 전 과정에는 기록과 수집 및 공인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들이 있어 왔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를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인간 저자의 집필 과정. 둘째, 그 기록에 대한 정경 확립 이전 시대 교회의 평가 과정. 셋째, 공의회를 통한 교회의 공식적인 인정과 선포 과정. 실제로 성경 각 권들이 기록 완료된 시기와 정경으로 공인된 시점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정경이 수집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숱한 외경들과 위경들의 등장, 심지어는 기독교 사상과 이단 사설들을 교묘히 접합시킨 이단 서적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변증적 차원에서 참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구약 정경의 형성: 현재의 구약 39권만을 정경으로 공식적으로 밝힌 최초의 회의는 A.D. 90년 경의 얌니아 랍비회의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구약 전체를 지칭하시면서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눅 11:51)’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A.D. 90년 이전에도 이미 구약 전경의 범위에 대한 확증이 있었다는 결정적인 암시가 된다. 왜냐하면 아벨의 기사는 창세기에 있고 스가랴의 기사는 역대하에 있는데, 히브리 구약 분류방식상 창세기는 그 첫 권이고 역대하는 마지막 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11장 51절의 말씀은 결국 구약 전체의 범위가 이미 확증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로 채택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기록과 이스라엘 역사의 정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구약 정경의 형성시기를 포로 이후 시대인 B.C. 44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포로 귀환시대로서 느헤미야의 행정, 이교적 영도와 에스라의 종교적 지도 아래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지위가 회복되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하에서 에스라와 당시의 장로 회의에 의하여 구약 정경의 범위가 확정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신약 정경의 형성: 구약의 기록이 B.C. 1400년 경 모세오경의 기록을 시작으로 B.C. 400년 경의 소선지서,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의 시대차가 있는 반면, 신약은 27권 모두가 A.D. 50-100년 사이 즉, 50년 동안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신약 27권을 공식적이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였다. 초대 교부들의 각종 기록들과 관련된 각종 역사 문헌들을 보면, 신약 27권이 처음부터 상당히 광범위하게 다른 일반 문헌들 보다 높게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역과 개인에 따라 어떤 책들은 보다 더 존중되고 또 어떤 책들은 그 정경성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확한 정경의 지치이 있기 전까지는 오리겐 또는 유세비우스 등 영향력 있는 교부들의 분류 방식이 매우 널리 유포되었다. 이 두 교부들은 교회에 널리 전래되어 오던 문서들을 ‘호모로구메나(Homologoumena:인정된 책들)’와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이의가 있는 논쟁 중인 책들)’로 크게 나누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략적인 구분만으로는 말시온(A.D. 140년 경) 등의 영지주의(Gnosticism)들을 대표로 하는 이단들과 대외적 논쟁에서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전 교회의 통일성에 완전을 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A.D. 4세기 중엽부터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동서 교회는 A.D.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 A.D.393년 히포 종교회의 등 주요한 종교회의들을 거쳐 A.D. 397년 마침내 칼타고 종교회의에서 현재와 같은 신약 27권의 정경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참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의 ‘12신조’ 중 제1신조: “신·구약 선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대조: 위 제1신조 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교단의 고백에서 ‘신앙의 본분’ 이라고 고백되어 있는 부분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통합 교단에서는 ‘신앙과 행위’라고 수정되어 고백되어 있다.)

 

<삶의 적용>

1. 우리에게 성경을 남겨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당신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답: 우주 만물에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의 그림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으나,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인하여 온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알 길이 막혀졌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직접 인간에게 그분의 뜻을 나타내셨다. 나아가 그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해 알게하고 그 사랑 안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2. 성경이 유익한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말씀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12신조’ 중 제 1조에서 찾아 답하시오. 또 당신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이 지시하는 네 가지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가장 큰 유익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답: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그리고 나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인 교훈에 측면이 가장 큰 유익을 주었다. 중 1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많이 흔들릴 때에 성경을 통하여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얻고 삶의 교훈을 얻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외경은 정경이 아님

 

흔히 ‘외경’이라고 불리우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성경의 정경 중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도 없으며, 인간들의 다른 기록물들 이상의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요지>

1. 외경은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정경 중의 일부도 아니다.

2. 외경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가 없다.

3. 외경은 인간들의 다른 기록물들 이상의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해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이다.

‘외경’이란 구약 성경이 완성될 즈음에 시·구약 시대에 기록된 14권의 책들을 말한다. 이것들은 70인역과 벌게이트 역본에 포함되어 있으나, 구약 히브리 정경에는 단 한 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에서는 벌게이트 역본을 사용하면서 그 14권 중 11권을 소위 ‘제2정경’으로 인정하고 1546년이 트렌트 공의회에서 그것들을 성경의 일부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14권의 외경이란 다음과 같다. 에스드라 1서, 에스드라 2서, 토비트, 유딧트, 에스더 일부, 솔로몬의 지혜서, 집회서, 마카비 1서, 마카비 2서, 바룩서,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의 이야기,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이 제 3단락에서는 외경이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근거를 외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영국 교회의 이전의 신조나 아일랜드 신조에서는 외경을 비록 정경으로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외경의 목록을 그 기록 안에 나열해 놓았었던 데 반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외경의 목록을 아예 삭제하여 버린 사실인데,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얼마나 성경에만 충실하고자 애썼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외경에도 약간의 유익이 있음은 외경의 초대교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어서 학문적인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경이 인간들의 오류 많은 다른 기록물들과 같은 정도의 수준이나 방식으로는 인정되거나 사용될 수 있다. 그래도 이것은 학문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고, 교회 안에서 일반 성도들에 대한 신앙교육용으로는 외경은 하등의 이용가치가 없고 오히려 혼란의 소지만 있음을 분명히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지 않아서 그 안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ㅏ. 가령 외경에는 교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 사실을 부인하거나 또는 ‘이신칭의’ 교리를 약화키는 진술들이 있는가 하면, 또 역사적인 측면에서 많은 오류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 코멘트> 트렌트 회의와 오경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로마 카톨릭 측의 대응에 관해 말하자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의 청원으로 교황 바울 3세가 소집하여 이태리의 트렌트에서 개최된 회의가 바로 트렌트 종교회의 이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간에 걸쳐 열렸는데, 황제 편에서는 주로 교회 개량과 가급적 개신교와의 타협을 꾀했고, 교항 편에서는 개신교와의 교리혼동 방지 및 자기들의 교리 확인과 내부 쇄신을 꾀했다. 이 회의에는 로마 카톨릭의 수뇌급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그들은 비타협적으로 개신교의 인권을 봉쇄해 버린 채 자기들의 뜻만 관철해 버렸다. 즉, 로마 카톨릭의 종래 교리들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자기들 자체 내의 규율 확립과 쇄신을 강력히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결의된 주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전통 및 유전들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

②성경이 해석권이 교회(주교단)에 있으므로 개인의 해석권은 반대한다.

③라틴벌게이트판 성경과 외경을 합하여 표준성경으로 취한다.

④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가 합하여 이루어진다.

⑤신앙이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⑥치의는 세례 받을 때에 된다.

⑦시대의 제사장 역할자는 신부이다.

⑧연옥설, 7서례, 화체설, 성인 숭배, 화상과 유물 숭배 등을 재확인한다.

⑨면죄부 판매의 경우는 그 남용은 잘못이나 그 제도 자체는 옳다.

⑩개신교 사상을 배척하기 위한 금서목록을 작성하기로 한다.

 

이런 결의 사항들이 1564년 교황 피우스 4세에 의해 공포되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이 종교회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여러 부분들에서 가장 크게 변질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이 회의에서 성경과 관련하여 신·구약 66권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개신교의 견해를 배격하고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켰다.

 

<삶의 적용>

1. 로마 카톨릭에서는 외경을 중시하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외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답: 외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지지 않았고, 그 내용 역시 많은 부분에서 정경과의 통일성을 잃고 있으며 오히려 신앙의 혼란을 가져오는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부인하거나, 이신칭의 등의 교리들을 약화시키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외경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성도들의 신앙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2. 성경 외의 다른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견하는 것이 왜 죄가 될까요?

참조: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서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0=9)”

 

답: 첫째, 성경 여러 곳에서 이를 금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거나 지혜로운 누구도 존재할 수 없음으로 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대하거나 비견될 만한 글은 이 세상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분을 계시하신 거룩한 책이다. 감히 누가 성경을 다른 것들과 비견하여 하나님을 모독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원죄인 교만과 욕망의 발로이다. 성경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많은 문헌들을 참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경과 동등하거나 비견될 만한 그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4. 성경의 권위의 근거는 하나님에게 있음

 

마땅히 믿어져야 하고 순종되어져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이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시며) 그 저자이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거한다. E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요지>

1. 성경은 마따잏 믿어져야 하고 순종되어져야 한다.

2. 왜냐하면 그 권위의 근거가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 잇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3.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해설> 성경의 권위

여기에서는 성경의 권위가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성경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근거가 그것에 대한 어떤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증거하신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성경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가 성경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 자체로서의 탁월성과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성경=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성경의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경의 저자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셔서 두 제자들에게 성경에 대하여 진술하시기를, 누가복음 24장 27절에서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 이라고 표현하셨다.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성경의 저자이시며 또 성경은 곧 당신 자신에 관한 것들이 씌어져 있는 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 이시라는 진술과 관련하여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성부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이시며, 또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이시라는 사실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이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성자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이심: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 자체이심: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삶의 적용>

1. 당신의 삶 가운데 중요한 선택과 결정이 순간에 최종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하여 바른 길을 가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소개해 보세요.

 

답: 신대원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이 나는 신대원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무지 실망했고, 낙담 할 뻔하였다. 그러나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는 말씀을 붙잡고 용기를 내어 끈질긴 면접 끝에 지금 공부하게 되었다.

 

2.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성경에 그 어떤 오류도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과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성경에는 오류가 없어서 현대의 과학으로도 성경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습니까?(혹시 성경 안에서 당신에게 아직 믿기지 않는 기적이나 기사가 있다면, 그 부분은 어떤 부분입니까?)

 

답: 믿습니다. 과학이나 역사라는 불안전한 인간의 산물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과학이나 역사도 성경을 반박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오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5.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들과 성령의 내적 사역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과 신앙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도모가 성경 안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거나, 또는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있다. 이 성경에는 어느 때든지 간에 성령의 새 계시들에 의해서나 또는 사람들의 유전들에 의해서나 아무 것도 추가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것들과 같은 것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이해하는 데에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통치함과 관련하여 인간의 행위들과 집단들과 공통적인 어떤 경우들이 있어서, 이 경우들이 항상 지켜져야 될 말씀의 일반적인 규칙들에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신중함에 의해 정돈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요지>

1. 우리는 성경에 대해 높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들에는 그 내용의 신성함, 교리의 유효성, 문체의 장엄성, 모든 부분들의 통일성, 그 전체적인 완성 등을 들 수 있다.

3. 성경은 그 전체의 범위가 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4.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나온다.

5.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말씀에 의해, 또 말씀과 함께 증거하신다.

 

<해설> 성경 문체의 장엄성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들 가운데에는 ‘성경 문체의 장엄성’이 그 안에 포함된다. 이 사실은 현대에 들어 많이 번역되어 출판된 ‘쉬운 성경’ 또는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성경’ 등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비록 ‘쉬운 성경’ 또는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성경’ 등이 어린이들의 이해를 위하여 쉽게 번역되어 있다는 장점을 경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문체의 비장엄성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는 데에 마이너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만일 성경 번역의 부정확성의 문제까지 여기에 덧붙여지게 되면, ‘쉬운 성경’ 또는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성경’ 등이 갖는 폐해가 결코 작지 않음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쉽게 번역된 성경들이 적어도 현재로부터 당분간 동안은 예배용 내지 강대상용으로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당분간이 과연 언제까지일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성령의 ‘내적 사역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증거하시고 또 말씀과 함께 증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겨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납득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성령의 이런 사역을 ‘내적 사역’이라고 부른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소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임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애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중세의 카톨릭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은폐하였데,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말씀하는 ‘만인제사장설’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하고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을 빙자하여 헛된 주장이나 선언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바가 되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중세의 카톨릭 시절에는 많은 삶들이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삶의 적용>

1. 성경에서 은혜를 받으면 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까요?

 

답: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 예수의 구속사역, 성령님의 인 치심을 말씀하고 있다. 도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은혜의 말씀을 읽을 때 어찌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당신은 성경에 대해 높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이 그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답: 나는 성경에 대한 높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그분을 열어 보이시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존중할 분더러 지극히 사랑한다.

 

 

6. 성경의 충족성과 내적 조명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감동되고 권유되어 성경에 대하여 높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신성함, 교리의 유효성, 문체의 장엄성, 모든 부분들의 통일성,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의 범위, 사람의 구원의 유일한 길의 충분한 발견, 다른 많은 비할데 없는 탁월성, 또 그 전체의 완벽성은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풍부하게 증거하는 논증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속에서 말씀에 의해, 또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나온다.

 

<요지>

1. 하나님의 전체적인 도모(counsel)가 성경 안에 명백히 제시되어져 있다.

2. 말씀을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

3. 이 성경에 성령의 새 계시들에 의해서나 또는 사람들의 유전들에 의해서나 간에 아무 것도 더 이상 추가될 수 없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4.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통치함과 관련하여 인간의 행위들과 집단들과 공통저인 어떤 경우들이 있다.

5. 이 경우들이 말씀의 일반적인 규칙들에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신중함에 의해 정돈되어져야 한다.

 

<해설> 성경에 명백히 적혀져 있는 것들

이 단락에서는 성경이 인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올바른 지침이 되며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밖에 필수적인 모든 요소들이 다 담겨져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경에 명백히 적혀져 있는 것들이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과 신앙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들로서 곧 하나님의 전체적인 도모를 말한다. 이것들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데, 적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

 

<신학적 코멘트> 성령의 ‘조명’과 성령의 ‘영감’은 다르다

성령의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구원에 관한 계시를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그 기록에 있어서 오류가 없도록 그에게 입혀진 성령의 초자연적인 감화를 말한다. 반면에 성령의 ‘조명’ 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에 신비하게 역사하셔서 이미 주어진 계시와 영감의 기록들을 바르고 정확히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 기록의 완성과 정경화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와 영감은 종결 되었다. 지금은 오직 이미 주어진 계시의 적용과 조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끔 들을 수 있는 ‘계시를 받았다.’ 또는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잘못 알고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혹시 누가 그와 비슷한 체험을 가졌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은혜이며 오직 ‘조명’일 뿐이다(박상걸, ‘교의학 서론, 구언론 교안’에서 발췌)

 

<삶의 적용>

 

1. 당신은 성경 안에서 당신을 향하심 하나님의 뜻과 구원 계획을 발견하고 크게 은혜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 때가 언제입니까? 또 그 때 은혜 받은 성경 구절은 무엇입니까?

 

답: 대표적인 두 가지는 말하자면 첫째는 고2 동계수련회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이고, 둘째는 90년 군대 시절 겨울 소명을 받을 때인에 받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다.

 

2. 당신은 성경 안에 무엇이 명백하게 제시되어져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에게 있어서 성경이 언제 어떻게 당신을 살렸는지, 또는 당신을 복되게 해 주었는지 간증할 수 있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본문 1장 6절(WC1-6)의 진술을 묵상하면서, 또 당신을 여기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답: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인간의 구원과 신앙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 안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믿는다. 성령은 어려서부터 나를 날마다 살렸고, 여러 가지 고비의 순간, 예를 들면 이름 모를 병으로 죽게 되었던 2살 때 어머니를 통하여, 중2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에 휩싸였을 때, 군대시절 온갖 핍박 속에도 믿음을 지켜 갈 때, 30대 후반 삶의 목표를 잃고 자살을 시도할 때도 말씀은 나를 살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해 한다.

 

 

 

7. 성경이 명백성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에 있어 모두 다 똑같이 명백한 것은 아니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꼭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또 준수해야 할 것들은 성경의 이곳 저곳에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개진되어 있어서, 비단 학식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무식한 자들도 보통의 방편들을 적절하게 잘 사용하면 그 충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요지>

1. 성경은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또 난해 구절들도 있다. 그 구절들을 함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2. 그러나 구원을 위해 꼭 알아야 할 것들은 성경에 아주 쉽고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구원의 도리는 성경에 쉽고 분명하게 개진되어 있다.

3. 그래서 무식한 자들도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구원에 필요한 이해에 쉽고 충분하게 도달할 수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해설> 성경의 네 가지 속성들-권위성, 필요성, 명백성, 충족성

①성경의 권위성: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이 본질상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 신적 권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교회의 증거’가 신뢰성의 동기는 될 수 있지만,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은 성경 그 자체의 권위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개혁주의는 강조한다.

②성경의 필요성: 성경은 인류 역사의 종말까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남게 된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교회의 씨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힘입어 성경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구속 사실들에 대하 증인들이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 기록된 말씀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반복의 여지가 없고 그러면서도 오는 모든 세대들을 향해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갖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사, 또 구속 사실들의 역사적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은 세상 끝 날까지 필요하다.

③성경의 명백성(명료성): 성경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에 진리가 명료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일반 개인이 할 수 없고 오직 공교회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에 오묘한 부분이 있고 교회의 공적인 해석이 필요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 전체에서 단순하고 이해될만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누구든지 진지하게 상고하면 성령의 도우심 속에 그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곧 성경은 뜻이 분명하고 확실하여 그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으면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④성경의 충족성: 성경에는 인간의 내적 광명에 필요한 것들이 충족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에 어떤 보충물들(외경이나 전승들)이 필요하다는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 반대하여 성경의 충족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말하고 기록한 모든 것들이 다 성경에 담겨져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개혁주의자들은 성경과 똑 같은 권위를 갖는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삶의 적용>

 

1.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 말씀 그대로 주이 말씀이 당신의 길에 빛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까? 있으면 소개해 보세요.

 

답: 주의 말씀이 나의 길에 빛이 되었던 가장 큰 때는 바로 지금이다. 나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새벽 4시)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그 구절 중에 한 구절을 선택하여 암송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하여 나의 하루는 더욱 풍성해지고 감동적이 되었다.

 

2. 당신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서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있으면 소개해 보세요. 또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답: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나의 경우 말씀을 상고함으로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기 보다는 설교를 듣는 동안 그 말씀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8. 성경의 진정성과 그 번역의 필요성

 

(옛적 하나님 백성이 자국어였던)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과 또 (그것이 기록될 당시에 여러 민족들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받았고, 또 그의 독특하신 배려와 섭리에 의해 모든 세대들에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으므로 진정성이 있다. 그래서 모든 세대들에 모든 논쟁들에 있어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해야 한다. 그러나 이 원어들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권리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경을 읽고 탐구하도록 명령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들이 이르게 되는 모든 민족들의 자국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니므이 말씀이 모든 사람들 안에 충만하게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받아들여질 만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또 성경의 이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요지>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받았다.

2. 신·구약 성경 66권에는 진정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특하신 배려와 섭리에 의해 모든 세대들에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3. 그러므로 종교상의 모든 논쟁들에 있어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해야 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4. 성경은 모든 민족들의 자국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원어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5. 성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게 거하게 되어야 한다.

6. 성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받아들여질만한 방식으로 예배하게 하여야 한다.

7. 성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성경이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해설> 성경의 진정성(authenticity)

여기에 씌어진 ‘authentical’ 이라는 용어는 ‘권위 있고 신뢰할만한’ 이라는 뜻으로 ‘진정성 있는’ 이라고 번역된다. 성경 66권에 ‘진정성’이 있는 근거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진 것들로서 그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 중 중요한 한 가지는 그 기록자들이 모세를 비롯한 신뢰성 있는 선지자들이거나 아니면 사도들 중 한 사람 또는 그 제자들일 경우이거나 또는 그들이 신뢰하는 자들일 경우이다. 비록 66권 성경 중에 그 저자가 불확실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 역시 모세나 선지자들 또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66권 성경에는 ‘진정성’이 있다. 이 성경을 하나님께서는 독특하신 배려와 섭리에 의해 모든 세대들에게 순수하게 보존시켜 오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교상의 모든 논쟁들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해야 한다. 성경의 원본과 번역본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수많은 번역본들 사이에 어느 번역본이 보다 더 원본에 가까운가, 어느 번역본이 보다 더 나은 번역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그 번역이 성경 원본에 충실히 따르고만 있다면, 성경 번역본도 원리적으로 무오성을 갖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때문에 무오하다”는 명제는 번역본의 경우에도 역시 원리적으로 사실이다.

 

<신앙 묵상>

어거스틴은 고대 교회 시대에 가장 뛰어난 교부로서, 사도 바울에 이어서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 모니카를 통해 경건한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나, 청년기에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난 타향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8년간이나 마니교에도 빠지고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33세 때에 일대 회심을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로 있으면서 어머니의 권유로 암브로스 감독을 만나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점점 마음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온 폰티치아누스가 어거스틴의 관사에 들러 그가 여행중에 보았던 여러 수도원들과 수도사들의 경건한 삶에 대해 듣고 방탕했던 자기의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폰팇아누스가 가고 난 뒤 수치감과 좌책감에 쫓겨 정원으로 뛰어갔다. 바로 그 때 담 너머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래 중 특히 ‘집어라 읽어라’는 구절이 자기를 향한 주님의 음성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즉시 성경을 집어 읽었는데, 읽던 중 특히 로마서 13장 13절 dlk의 말씀에 마음이 사로잡히며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사의 체험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정말 그 말씀대로 변화되었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아들과 함께 암브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고(33세), 이후 수도자가 되어 평생 경건한 삶에 힘써다. 그는 76세의 생애를 살았는데, 41세 부터는 히포의 감독이 되어 죽을 때까지 35년간을 봉직하며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정통 교리의 수호와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 등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히며 감동을 주고 있다.

 

<삶의 적용>

1. 당신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받아들이란한 방식으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예배 생활을 점검해 보십시오.

답: 나의 하루의 삶 자체가 예배라고 본다.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성경을 정해서 읽고 큐티를 하며 하루를 연다. 순간, 순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며 틈틈이 말씀을 본다. 그리고 나의 삶 속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점검한다. 정규적인 공예배(새벽예배, 오전 체플, 반별 기도회, 수요예배, 경건훈련 등)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들으며 나의 삶 속에 말씀이 살아가시게 노력한다.

2. 당신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당신이 성경을 통하여 인내와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 사실을 간증해 보십시오.

답: 저는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신앙생활 때문에 극심한 핍박과 고통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많은 인내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9. 성경 해석의 규칙은 성경 그 자체임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구의 참되고 온전한 의미에 대해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참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인데), 그것은 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들에 의해 탐구되고 알려져야 한다.

 

<요지>

1.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

2. 어떤 성구의 참되고 온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단 하나이다.

3. 어떤 성구의 해석에 문제가 있을 때에, 그것은 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들에 의해 탐구되어야 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인라(벧후 1:20-21).”

 

<해설> 성경에 명백히 적혀져 있는 것들

여기에서는 성경이 다양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의미에서 단 하나의 의미만 갖는다고 말하면서 그 단 하나의 빛 아래서 모든 성경 구절들을 해석해야 할 다위성에 대하여 설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 구절들 중에 그 해석이 어렵고 특수한 구절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그 구절들을 단 하나의 빛 아래서 보기 위하여 어떤 성구의 해석에 문제가 있을 때에, 그것이 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들에 의해 탐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곧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라는 명제나 또 “성경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명제의 의미이다. 즉, 성경의 메시지는 언제나 전체로서 보아야 하며, 그러는 가운데 그 안에 흐르는 단 한 가지의 맥락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삶의 적용>

 

1. 당신은 어떤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진지하게 성경을 읽으며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얻은 해답과 그 해답이 되어진 말씀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답: 하나님께서 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을 때 “신학을 공부해서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 그 곳에서 소명의 구체적인 방향을 찾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근거로 선교허브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2. 어떤 성구의 해석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말씀하는 다른 구절들을 탐구함으로써 진리의 빛에 이르게 되었던 경험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그 구절은 어떤 구절이었습니까?

 

답: 없었다.

 

 

10. 모든 논쟁들의 clh고의 심판자는 성령이심

 

최고의 심판자는 다른 이가 될 수 없고,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 이 심판자에 의하여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이 결정되어야 하고, 공의회들의 모든 법령들, 고대 저자들의 의견들, 사람들의 교리들, 또 사적인 영들이 검토되어야 하며, 또 그의 판결 안에서 우리가 안식하여야 한다.

 

<요지>

1. 모든 논쟁들의 최고의 심판자는 성령이시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2.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신다.

3. 종교상의 모든 논쟁들과 법령들, 고대 저자들과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들, 또 사적인 영들이나 이단 시비의 문제들이 성령에 의해 검토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4. 우리는 성령의 판결 안에서 안식하여야 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해설> 최고의 심판자는 성령이시다.

제1장의 마지막 단락인 이 단락에서는 모든 신앙적인 논쟁들을 판결함에 있어서 유권적으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접근함에 있어 말씀과 성령의 통일성을 주목하여 보라는 것이다. 또 우리는 성령의 유권적 해석 안에서 안식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종교상의 모든 논쟁들과 법령들, 고대 저자들과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들, 또 사적인 영들이나 이단 시비의 문제들이 모두 다 성령에 의해 검토되고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삶의 적용>

 

1. 당신은 신·구약 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에 순복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성경관에 대하여 말해 보십시오.

 

답: 나는 신·구약 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에 순복합니다. 이것이 나의 성경관입니다.

 

2. 어떤 성경 말씀에 대한 성령의 유권적인 해석 안에서 안식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당신의 경험을 말해 보십시오.

 

답: 있습니다. 율법과 믿음 사이에 괴를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의 말씀을 묵상하며 안식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제 2장 하나님과 성 삼위일체(of God, and of the Holy Trinity)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 2장 하나님과 성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고백과 제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 다룸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에 집중하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정통 교회들은 A.D. 325년 터키의 니케아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와 A.D.381년 콘스탄디노플에서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된 삼위일체론을 정ㅌㄴ 교리에 대한 최고의 해석으로 여겨 왔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역사적 증거들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1절 하나님의 속성들

 

오직 유일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아님께서 계시니, 그는 존재와 완전함에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수한 영이시며, 비가시적이시고, 신체도 부분들도 정욕들도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자유로우시며, 지극히 절대적이시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자신의 불변하고 지극히 의로운 뜻의 도모에 따라 만사를 행하시며, 지극히 사랑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리에 풍성하시고, 부정과 위반과 죄를 용서하시며, 부지런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시고, 또 게다가 그의 판단들에서 지극히 공의로우시고 무서우시며, 모든 죄들을 미워하시고, 또 형벌 받을 자들의 벌을 결단코 면제하지 않으실 이시다.

 

<요지>

1. 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2. 하나님께서는 존재와 완전함에서 무한하시다.

3.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영이시라 비가시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4. 하나님께 정욕들(passions)이 없다.

5.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다.

6.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다(incomprehensible).

7.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시고 자유로우시다.

8.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만사를 행하신다.

9.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불변하고 지극히 의로운 뜻의 도모(counsel)에 따라 만사를 행하신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10.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ejelk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11. 하나님께서는 선하심과 진리에 풍성하시다.

12. 하나님께서는 부정과 위반과 죄를 용서하신다.

13.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14. 하나님께서는 그의 판단들에서 지극히 공의로우시고 무서우시다.

15.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들을 미워하신다.

16. 하나님께서는 형벌 받을 자들의 벌을 결단코 면제하지 않으실 이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해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다(incomprehensible)"라는 진술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 의해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지혜는 미천한데 반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깊이는 한량없고, 또 그의 판단은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시그이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러한 특성을 하나님의 ‘완해불가성(完解不可性)’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의 의미가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계시해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계시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까닭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곧 진리인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들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비록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체적인 이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한 이해라고 하더라도, 인간들은 그 부분적인 이해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적인 이해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알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부분적인 이해는 곧 온전한 이해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칸트시그이 불가지론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해설> 죄는 용서하시지만 형벌 받을 자들의 벌을 결단코 면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데, 왜 형벌 받을 자들(the guilty)의 벌을 결단코 면제하지 않으신다고 할까? 죄인을 용서하시지만 죄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보도록 하자.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들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다시 받아 주시지만, 그의 죄에 대하여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대가를 찾으신다. 가령 구약 성경에서 다윗 등의 죄에 대햐여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던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이 여러 군데에서 증언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 예들로 들 수 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한 점 착오가 없어야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또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시라고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다윗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데 있어서는 한 점 에누리를 받을 수 없었던 사실을 무릇 신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 이요, 또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기억하면서, 우리 신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역시 거룩할 수 있기에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하나님의 소성들 중 비공유적 속성(절대적 속성)

①자존성: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원인이시고, 필연적 존재이시며, 독립적 존재이시다.

②불변성: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시는 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와 속성이 불변하시고, 그의 사상, 의지, 목적, 작정, 약속 등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다.

③무한성: 하나님께서는 한계가 없으신 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하시는데, 존재 면에서 완전하시고, 시간 면에서 영원하시며, 공간 면에서 무량, 편재하시다.

④유일성: 하나님께서는 홀로 한 분으로서 절대, 자존, 불변, 무한하신 점에서 그와 같은 류의 다른 존재가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한 영으로서 그 본질과 특성이 단일하시다.

 

<삶의 적용>

1. 위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당신에게는 어느 속성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당신의 신앙 경험에 비추어 말해보십시오.

 

답: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왜냐하면 나의 정결하지 못함 때문이다. 내 안에서 끝없이 고개를 드는 더러운 욕심, 정욕, 분노, 미움 등 여러 가지 유혹에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죄와 대면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생각하며 부단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2. 흔히들 하나님에 대하여 진술할 때 ‘공의의 하나님’ 이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 이시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공의의 하나님’이 더 실감 있게 느껴집니까,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이 더 실감 있게 느껴집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보십시오.

 

답: 예전 같았으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공의의 하나님”의 그 공의 또한 사랑의 발로이고, “사랑의 하나님”의 그 사랑 또한 공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에겐 두 가지 모두가 삶의 실제로 강하게 나타난다.

 

3. 출애굽기 34장 7절 말씀과 관련하여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지만 죄에 대하여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준엄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구속가시고 지금 이 은혜로운 자리까지 인도하셨다. 하지만 더욱이 나의 죄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어떤 것들은 죄를 짓고 얼마 안 되어 그 보응을 받을 때도 있고, 그 죄의 값을 치룬 후에 이것이 예전 나의 패역한 죄로 인하여 받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도 한다. 구체적으론 창피해서 말할 수 없다.

 

 

2절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되심을 자신 안에, 또 자신으로부터 가지고 계신다. 또 그는 홀로 자신 안에서, 또 자신에게 전적으로 자족하셔서, 그가 지으신 어떤 피조물드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그들로부터 어떤 영광을 이끌어내지도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들 안에서, 그들에 의해, 그들에게, 또 그들 위에 드러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셔서, 만물이 그에게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또 그에게로 돌아간다. 또 그는 만물 위에 지극히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지 자신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에 의해, 만물을 위하여, 또는 만물 위에 행하신다. 그의 목전에는 만물이 열려 있고 드러나 있다. 그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또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 무엇도 임의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다. 그는 그의 모든 도모들과 그의 모든 행사들과 또 그의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그가 요구하기를 기뻐하시는 예배든 봉사든 또는 순종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다 드림이 마땅하다.

 

<요지>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되심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신다.

2. 하나님께서는 홀로 전적으로 자족하셔서 피조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5).”

3.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로부터 어떤 영광을 이끌어내지도 않으신다.

4.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들 안에서, 피조물들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또 피조물들 위에 드러내신다.

5. 하나님께서는 홀로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셔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또 그에게로 돌아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

6.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지 그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 위에 행하신다.

7. 하나님의 목전에는 만물이 열려 있고 드러나 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8.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9.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도 임의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다.

10.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도모들과 행사들과 명령들에서 지극히 거룩하시다.

11.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을 천사들과 사람들과 또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 요구하기를 기뻐하신다.

12.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 무엇이든지 다 드림이 마땅하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2-13)"

 

 

<해설> 하나님의 복되심(blessedness), 자족하심, 영광받기에 합당하심, 만물 위에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심

하나님께서는 복되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을 가지고 계시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복되심을 자신으로부터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홀로 전적으로 자족하셔서(all-sufficient)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또 그러실 필요도 없으시다. 만이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지 않는 일이 생긴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덜 영광스러워지지 아니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친히 만드신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로부터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 영광을 하나님께서는 오직 피조물들 안에서, 피조물들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또 피조물들 위에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피조물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임의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지 그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 위에 주권적으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사를 주권적으로 행하실 때에, 그 행하심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불변하고 지극히 의로운 뜻의 도모(counsel)에 따라 행하신다(엡 1:5).

 

<해설> 하나님께서는 홀로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셔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또 그에게로 돌아간다(of whom, through whom, and to whom, are all things).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지 그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 위에 행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에는 언제나 만물이 열려 있고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들이 숨겨질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는 것 하나라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쟇ㄴ다. 따라서 만일 만물의 시작(창조자)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또한 그 끝(완성자)이 아니시라고 하면, 자연의 전체 질서가 뒤집히고 말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하나님의 뜻과 인류 역사에 있어서의 ‘임의성(contingency)'

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본문에서 ‘contingent’라는 용어의 의미는 ‘임의적(任意的)인’, ‘필연적이지 않은’ 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지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이 용어는 삼위일체 하나님 내의 계시의 특성인 ‘필연성(必然性)’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 용어를 ‘우연적(偶然的)인’ 이라고 번역하면 큰 오류가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인류 역사에는 ‘임의성’이 있지 ‘우연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임의적인’ 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의사아 관련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없을 수도 있는’ 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의지적인 뜻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지으셨고 그 뜻대로 섭리하신다. 따라서 세상의 역사라든가 어떤 나라나 주권자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기도 하시고, 또는 그것을 뽑고 파괴하기도 하신다(렙 1:10, 18:7).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즉,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빚을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이나 모든 나라들의 운명이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렘 18:6). 이것은 곧 인류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임의성을 나타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행하실 때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으시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렘 21:8)는 말씀처럼 두 길을 제시하시고, 하나님 당신의 뜻에 합당하거나 순종하면 복을 내리시고, 만일 합당하지 않거나 불순종하면 재앙을 내리신다. 그리고 만일 복을 받았던 자라도 악행을 하면 그에게 내리셨던 복에 대해 그 뜻을 돌이키시고, 반대로 화를 당했던 자라도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그 내리셨던 재앙을 거두신다.

 

<신앙 묵상>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무에서 창조함을 받았고, 또 지금도 역시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선한 것을 겨로 자랑할 수 없으며, 또 우리의 존재 목적이 온통 그의 영광을 자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찬조하셨고 또한 보존해 주시는 피조물들이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도고 하면, 그 얼마나 모순되는 일이겠는가!

 

<삶의 적용>

1. 하나님의 목적에는 만물이 열려 이쏙 드러나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위의 사실과 관련하여 당신이 직접 체험한 간증거리가 있습니까? 또는 우리를 언제나 꿰뚫어 보고 계시며 멀리서도 항상 우리의 생각을 통찰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누구에게 들은 얘기가 있습니까? 이왕이면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

 

답: 한 때 축구게임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다. 아내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실망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너도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아내 앞에서 결심하며 게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아내 몰래 게임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 속 양심을 통하여 그 것을 지적하셨고, 나는 회개하고 아내에게 사과하고 몰래 숨어서 게임하는 버릇을 버렸다.

 

 

2.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을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만드신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요구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 무엇이든지 다 드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당신의 경우 과연 하나님께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 무엇이든지 다 기꺼운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또는 만일 예배와 봉사와 순종, 이 세 가지 중에서 조금이라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시시오.

 

답: 현제로써는 예배와 봉사와 순종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 하고 있다. 그래도 부족한 것들이 있는데, 새벽예배가 그렇다. 학교에 있을 때는 4시에 정확히 일어나는데, 집에만 가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3절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되심을 자신 안에, 또 자신으로부터 가지고 계신다. 또 그는 홀로 자신 안에서, 또 자신에게 전적으로 자족하셔서, 그가 지으신 어떤 피조물드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그들로부터 어떤 영광을 이끌어내지도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들 안에서, 그들에 의해, 그들에게, 또 그들 위에 드러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셔서, 만물이 그에게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또 그에게로 돌아간다. 또 그는 만물 위에 지극히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지 자신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에 의해, 만물을 위하여, 또는 만물 위에 행하신다. 그의 목전에는 만물이 열려 있고 드러나 있다. 그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또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 무엇도 임의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다. 그는 그의 모든 도모들과 그의 모든 행사들과 또 그의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그가 요구하기를 기뻐하시는 예배든 봉사든 또는 순종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다 드림이 마땅하다.

 

<요지>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되심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신다.

2. 하나님께서는 홀로 전적으로 자족하셔서 피조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5).”

3.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로부터 어떤 영광을 이끌어내지도 않으신다.

4.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들 안에서, 피조물들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또 피조물들 위에 드러내신다.

5. 하나님께서는 홀로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셔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또 그에게로 돌아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

6.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지 그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 위에 행하신다.

7. 하나님의 목전에는 만물이 열려 있고 드러나 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8.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9.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도 임의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다.

10.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도모들과 행사들과 명령들에서 지극히 거룩하시다.

11.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을 천사들과 사람들과 또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 요구하기를 기뻐하신다.

12.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와 봉사와 순종 등 무엇이든지 다 드림이 마땅하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2-13)"

 

 

<해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다(incomprehensible)"라는 진술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 의해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지혜는 미천한데 반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깊이는 한량없고, 또 그의 판단은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시그이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러한 특성을 하나님의 ‘완해불가성(完解不可性)’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의 의미가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계시해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계시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까닭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곧 진리인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들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비록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체적인 이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한 이해라고 하더라도, 인간들은 그 부분적인 이해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적인 이해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알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부분적인 이해는 곧 온전한 이해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칸트시그이 불가지론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해설> 죄는 용서하시지만 형벌 받을 자들의 벌을 결단코 면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데, 왜 형벌 받을 자들(the guilty)의 벌을 결단코 면제하지 않으신다고 할까? 죄인을 용서하시지만 죄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보도록 하자.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들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다시 받아 주시지만, 그의 죄에 대하여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대가를 찾으신다. 가령 구약 성경에서 다윗 등의 죄에 대햐여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던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이 여러 군데에서 증언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 예들로 들 수 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한 점 착오가 없어야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또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시라고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다윗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데 있어서는 한 점 에누리를 받을 수 없었던 사실을 무릇 신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 이요, 또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기억하면서, 우리 신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역시 거룩할 수 있기에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신학적 코멘트> 하나님의 소성들 중 비공유적 속성(절대적 속성)

①자존성: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원인이시고, 필연적 존재이시며, 독립적 존재이시다.

②불변성: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시는 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와 속성이 불변하시고, 그의 사상, 의지, 목적, 작정, 약속 등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다.

③무한성: 하나님께서는 한계가 없으신 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하시는데, 존재 면에서 완전하시고, 시간 면에서 영원하시며, 공간 면에서 무량, 편재하시다.

④유일성: 하나님께서는 홀로 한 분으로서 절대, 자존, 불변, 무한하신 점에서 그와 같은 류의 다른 존재가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한 영으로서 그 본질과 특성이 단일하시다.

 

<삶의 적용>

1. 위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당신에게는 어느 속성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당신의 신앙 경험에 비추어 말해보십시오.

 

답: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왜냐하면 나의 정결하지 못함 때문이다. 내 안에서 끝없이 고개를 드는 더러운 욕심, 정욕, 분노, 미움 등 여러 가지 유혹에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죄와 대면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생각하며 부단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2. 흔히들 하나님에 대하여 진술할 때 ‘공의의 하나님’ 이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 이시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공의의 하나님’이 더 실감 있게 느껴집니까,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이 더 실감 있게 느껴집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보십시오.

 

답: 예전 같았으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공의의 하나님”의 그 공의 또한 사랑의 발로이고, “사랑의 하나님”의 그 사랑 또한 공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에겐 두 가지 모두가 삶의 실제로 강하게 나타난다.

 

3. 출애굽기 34장 7절 말씀과 관련하여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지만 죄에 대하여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준엄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구속가시고 지금 이 은혜로운 자리까지 인도하셨다. 하지만 더욱이 나의 죄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어떤 것들은 죄를 짓고 얼마 안 되어 그 보응을 받을 때도 있고, 그 죄의 값을 치룬 후에 이것이 예전 나의 패역한 죄로 인하여 받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도 한다. 구체적으론 창피해서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