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설교 자료

예림의집 2013. 4. 15. 17:17

- 충실한 본문 주해의 흔적

- 선명한 핵심 주제

- 효율적 설교 형태

- 반전의 플롯 구성

- 논리적 원고 작성

- 기막힌 언어 표현

- 감동적 문장 활용

 

 

요6:26을 보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말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표적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이 예수님만 임금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먹을 것 걱정 하지 않아도 되겠다” 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였던 것은 신령한 떡, 생명의 떡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의도를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정 주시고자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일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즉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상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떡 역시 생명의 떡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리키신 표적에 매달리어 구제하는 일, 사회사업을 하는 일을 하여 우리 주변의 불쌍하고 굶주린 이웃을 먹이는 책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표적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빌립의 반응

똑같은 기사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즉 제자들에게 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군중들을 먹이는 것이 제자들의 일로 떨어진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할 수 없다’였습니다.

본문에는 빌립과 안드레가 등장하는데 이 두 제자다 비관에 빠졌습니다.

비립은 계산이 빠르고 사리를 잘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들판에 앉았던 사람들은 오천명쯤 되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 까? ‘

빌립은 즉시 계산을 마쳤습니다. 먹을 것을 조금씩 나누어 준다 해도 이백 에나리온으로는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1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싹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일곱 달치의 월급이 되는 셈입니다.

빌립은 정확하게 계산하여 문제를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한채 절망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빌립이 왜 예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까? 그것은 너무 계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산한다는 것은 사람의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 이성에는 인간의 능력의 범위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빌립은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여 보니 사람의 능력의 밖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시작해 보지도 않고 할 수없다고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하나님은, 일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과 함께, 아론을 붙혀 주십니다. 입이 둔한 모세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팡이에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던지며 뱀이 되고, 들면 바다가 갈라지고, 바위를 때리면 물이나오는 능력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일에 너무 계산적으로 바라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안드레의 반응

안드레는 빌립보다 조금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주시니까 즉시 나가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먹을 것이라고는 고작 장정 한사람이 먹을 양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여기에 비립은 실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9절)

안드레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만 할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면 되겠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음식을 가져온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들에게 음식을 거두어 서로 나누어 먹게 하면 되겠지...... ” 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속에서 먹을 것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실망이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어린아이 한명만이 먹을 것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너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는 실수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새벽에, 저녁에 , 산에서, 들에서 수시로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방법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어린 아이의 반응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어린아이입니다. 누구의 자녀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내게 가져오라”로 말씀하신후에 이 아이가 그 음식을 예수님께 자져왔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부에 어린아이는 순종하였습니다. 이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온 아이가 없었다면 이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의 등장 없이 기적을 행하시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우리 인간을 참여시며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없이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동역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이 어린아이의 순종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이 세상을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눈을들어……풀밭에 앉게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목자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시며… 편한곳으로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은 항상 마음에 있는것이 보이고 말한다. 예수님은 구원받고 회복되어야할 백성들에게 항상 관심이 있었다.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리더반 교제와 다른 책들을 통해 절기와 예수님의 사역의 깊은 연관성에 대하여 배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절기를 먼저 정하시고 그에 따른 계획을 실행 하셨다는 것을 읽었고 예수님의 사역과 절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알려 준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먼저 정해놓으시고 그에 맞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

유월절에 참으로 많은 예수님의 사역과 기적과 표적들이 있다. 나는 너무 무식하다. 더 자세히 알아야 하고 이스라엘의 절기/여호와의 절기에 대하여 더 공부하고 배워 이해해야 겟다는 생각을 한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시대의 역사와 시대배경, 풍습등을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궁금함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시고 행하실일을 하신다.

내 삶이나 사역에서도 많은경우 이유를 알지 못할때도 많다. 하지만 그럴때라도 내가 하나님/예수님안에만 거하고 있다면 이유를 알지못해도 순종으로 그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순종과 겸손, 작거나 크거나 상관없이 모든일에 아버지의 말에 따르고 영광 돌리시는 모습이다. 그렇기때문에 죽기까지 순종함이 가능하리라.

남길것을 아시면서도 원없이 주시는 예수님/하나님… 그것은 사랑이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인간은 배불르고 편해지면 버리고 낭비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절약하고 함께 나누는것….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풍성하게 주시는 예수님/하나님…

인간은??

2: 큰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라:

표적을 보고 쫒아가다.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치유와 기적들과 현실적인 압제에서 해방 시켜줄 메시아를 쫒는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이다.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인간은 특히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고 믿는다. 보지 않고 믿을수 있다면….보지 않고도 제대로 믿을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능력이다. 이세상의 거짓, 이단들도 너무 그럴듯하게 진리의 모습을 하고 다가 온다. 어떻게 구별 할수 있을까? 말씀으로, 열매로...

그리고 15절 사람들은 자기들 맘대로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 맞다. 원래 인간은 악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것만 듣고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나에게 이런 모습들이 있지 않은가? 물어보고 돌아 보아야한다. 삶에서 교회안에서…

적용/나에게 주시는 말씀

1) 예수께서 병자에게 하신 표적을 보고 몰려오고 쫒아다니는 사람처럼 나도 그렇지 않은가? 나는 과연 무엇때문에 예수를 믿고 따르고 이렇게 감히 제자라고 말하고 배우고 따르겠다고 하는가? 나의 내면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되돌아 보고 점검해야 하는 시간이다.

2) 만약 저 상황에서 예수님이 내게 물으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했을까?

과연 나의 신앙의 수준은 어디까지 와있을까?

빌립처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라며 현실적이며 계산적으로 대답할 것인가? 내 주머니를 뒤져보고 계산할것인가?

아니면 안드레 처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며 행동을 취하지만 여전히 믿음없고 자신 없어 할것인가?

대중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하니 음식이 있는 사람들은 손을 들라고 할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어찌 할바를 모르고 염려만 하고 있을까?

그래도 빌립보다는 안드레가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지만 음식을 구해오고 예수님께 내어 민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원하는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수준을 원하신것일까?

나의 믿음의 수준은 어디까지 와있는가?

제대로 믿고 있는가?

얼마만큼 읻고 있는가?

무엇일 믿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요한복음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묵상하며 내게 주시는 질문이고 도전이다.

TV 를 켜니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설교를 한다.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는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십자가에서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생명의떡)을 설명한다.

이제 여러가지를 종합해서 생각해본다.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안에서 예수님은 순종과 겸손으로 그 길을 잘 감당하신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자신을 쫒아오는 백성들을 불쌍이 여기셔서 가르치시고 먹이신다. 어린아이의 작은 음식,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에 푸짐하게 남기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다음 설교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신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생명의 떡)을 하나님께 드려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처럼 우리도 가진것(내것이 아닌 잠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여주신 모든것)중에서 나누라고 하신다.

조금도 드릴수 없는 사람은 절대 전부 드릴수없다.

 

나의 기도

주님, 저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이 하나님이 잠시 내게 허락하신 것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나누게 하시 옵소서.

조금도 드리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더 많이, 전부 드릴수 없습니다.

저의 마음의 주인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하시옵소서.

표적만을 구하는 유대인처럼 되지 않게 하시고, 지혜만을 구하는 헬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하고 찾게 하시 옵소서.

자신들의 마음대로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제가 아니기를 구합니다. 제안에 있는 내 마음대로 신앙생활하고 믿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리기 원합니다. 말씀대로 믿게 하시옵소서.

모든 상황속에 하나님/예수님안에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계속 성장하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시고 깊어지게 하시 옵소서.

그래서 환란과 연단이 소망이 되고 축복이 되는 주님의 시험/훈련을 잘 통과 하기를 기대하고 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

 

두 제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5절~6절)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빌립의 대답은“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돈의 가치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6개월 이상을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당시 광야에는 이러한 돈도 물건도 없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하기를“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8절~9절)라고 했습니다.

안드레는 빌립의 친구로서 같은 고향 벳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빌립의 의견과 안드레의 의견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 반면, 안드레는 현재의 실정을 주님께 그대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내가 미리 판단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기도하고 애쓰지만,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을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하고 기도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우리가 내릴 결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내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아뢰는 기도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빌립은 계산은 빨랐지만 불신앙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신앙을 시험하시기 위해 물으셨는데 그는 신앙의 불합격이었습니다.

빌립의 생각은 논리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틀렸습니다.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5천명이 먹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것이 빌립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렇게 큰돈이 없었지만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빌립의 계산은 맞았지만 결과는 틀렸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의 생각 속에 믿음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제가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할 때에 많이 불렀던 어린이 찬양 가운데 이러한 가사가 있었습니다.“홍해 어떻게 건넜나? 홍해 어떻게 건넜나? 배타고 아니, 헤엄쳐 아니, 뛰어서 아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고 급한 바람 불어 바다는 갈라져 육지로 건넜지”홍해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의 방법은 배를 타거나, 헤엄을 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이며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갈라놓으시고 육지로 건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자신의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틀림없을 것 같았던 내 생각과 계획이 나를 실패의 늪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화)

철학자인 데카르트는“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저녁때가 되면 매일 같은 길을 산책을 하는데, 어느 날 산책 도중 뱀 한 마리가 길가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지팡이로 내리칠까 하고 망설이다가 그냥 다른 길로 돌아서 갔습니다. 다음날 보니 또 같은 장소에서 그 뱀을 보았습니다. 사흘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지팡이로 힘껏 뱀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 빙글빙글 말려서 뱀과 같은 모양으로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한 말이“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흔히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믿는데 그 눈도 나를 속였습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 있는 데카르트의 이론이지만, 의심하는 것밖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인간으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때가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기회가 됩니다. 빌립은 계산을 해본 후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그때 안드레는 믿음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빌립이 불가능을 말했을 때 안드레는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의 터전 위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되“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하셨습니다. 인간의 궁극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감사입니다.

본문 11절에“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축사란 감사라는 뜻입니다. 5천 명의 무리 앞에 어린아이 한 끼분의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누가 보아도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5오천 명이 넘는 무리 앞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앞에 두고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감사함은 어떤 의미의 감사일까요?

1. 조건을 초월한 감사였습니다.

5천 명의 무리 앞에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 이 상황은 감사할 조건이 아닙니다. 도리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감사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에“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되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다니엘의 감사에 하나님은 기적을 나타내셔서 사자의 입으로부터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2. 작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5천 명 앞에서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작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러한 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감사에 예민해야 하겠습니다.

3.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입니다.

5천 명의 무리 앞에서의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2개, 이 기막힌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환경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있고 없음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많고 적음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형편에서 감사하셨습니다.

4. 미래 지향적인 감사였습니다.

5천 명의 무리 앞에서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두고 감사하신 것은 앞을 내어다 보신 감사였습니다. 이제 이것을 통해 5천 명이 배불리 먹을 것을 기대하시고 미리 감사하신 것입니다. 현재 손에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앞으로 받을 것을 믿고 감사하셨습니다. 미래의 감사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지금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손에 들고 계시지만 5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것을 내어다 보시며 감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현장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기도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한 부인이 자기도 남편을 위해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에 만취가 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와서 문 앞에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해야 합니까?”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신세타령 겸, 기도 겸 중얼거리는 중에 갑자기 감사 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감사할 조건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을 더욱 술을 많이 먹어 주일날은 집 잘 봐줘서 감시하고, 교회 나오는 데에 불편하지 않아서 좋고, 계속해서 감사의 조건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감사였으므로 부인은 웃음이 나왔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이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를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나도 예수 믿어 줄께”하며 선뜻 교회에 나가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후에 그 부인이 간증을 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를 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말씀에“범사에 감사하라”하셨습니다.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본문 12~13절에“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한번 기도하고 나면 이처럼 풍성했지만 예수님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부스러기를 모았더니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절약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모았더니 12광주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절약하여 유용한 곳에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예화)

오래전 우리나라 한 학생이 스위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하숙하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학생이 신다가 버린 양말입니다.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스위스만큼은 넉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양말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떨어진 것을 깨끗하게 씻어 기웠습니다. 한국에 가져가서 한 번 더 신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절약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약하되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절약정신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인색함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약하라고 하셨지 인색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부스러기를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8절에 말씀하시기를“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에도“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신 절약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절약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접하기 위한 절약입니다.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기 위한 절약입니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빌립과 안드레의 계산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의 이적과 무리의 반응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5절

'눈을 들어' 추수할 들판인, 광야의 영혼들을 보셨습니다(4:35). 그들의 주린 배만 보신 것이 아니라,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면서 구원을 바라지만 제대로 인도해줄 목자가 없어, 그릇된 메시아 기대를 품은 채 표적에 의지하여 광야까지 따라온 불쌍한 영혼을 보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경제 위기보다 더한 위기는 경제를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그렇게 이 땅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2-4,10-15절

예수님은 떡을 만들어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친히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대신 지고 목자 잃은 양들을 구원할 떡이십니다. 그래서 왕 제안을 팽개치고 떠나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이 주시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떡으로 모셔야 할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요?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2,14,15절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쫓아 산까지 따라온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는 그분을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종말의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줄 정치적 지도자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린 배는 채워줄 메시아는 만났지만, 죽은 영혼은 살려줄 메시아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잃어버린 투자금을 만회해주실 메시아가 아닙니다.

5-9절

예수께서 떡 구할 데를 물으시자, 빌립은 필요한 떡의 양을 말하고 안드레는 가지고 있는 떡의 양을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비난합니다. 상식에 충실한 옳은 분석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벅찬 상황도 잘 알고 자신의 한계도 알았지만,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기에, 그들의 인식은 절망과 한숨과 포기만을 낳은 채, 배고픈 이웃을 외면하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정해놓고 물으신(시험하신)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대답할 수 없는 인생의 질문을 주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 대답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여기 "디베랴 바다"란 이름은, 주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좀 후대의 것이었으나, 저자가 이방 교회의 식별을 위하여 "갈릴리 바다"란 말에 첨부한 것이다. 디베랴 바다라고 해야 당시 이방 사람들이 잘 알았다.

 

표적"이란 말(* 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란 뜻이다. 이 표적들에 대하여는, 마 14:14; 막 1:34,40-42,2:11-12.3:1-5,6:5; 눅 9:11; 요 2:11을 참조하여라. 그러나 대중은 예수님의 이적의 표적 성격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호기심과 육적요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26절 참조, 그들은 아직 그의 말씀이 이적보다 귀한 줄 몰랐던 것이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여기 말한 "산"(*)은 언덕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 언덕을 가리킨다. 유대의 랍비들은 보통으로 높은 데 앉아서 그 제자들을 가르쳐 주었다.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

"유월절"에 대하여는 2:1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유월절"이란 말(*)이 모든 사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부들의 증거는, 이것이 없는 편을 지지한다. 홀트(Hort)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있는 것이 연대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저자의 신학적 견지에서도 자연스럽다(Schlatter, Barrett).

예수님께서 눈을 드시고 큰 무리를 보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다. "빌립"에 대하여는 1:44, 12:21, 14:8 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문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립은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의 당한 것은 모세가 주린 백성을 앞에 두고 당한 난제와 같으며(민 11:13,22), 엘리사의 종이 당한 것과도 같았다(왕하 4:42-43).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자기의 권능으로 군중을 먹이실 대책을 벌써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육신을 먹이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 곧, 제자들의 신앙 교육을 더욱 중히 하셨다. 그는 빌립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문제를 주셨다. 그것은, 빌립이 그 군중의 가련한 정형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여부를 아시려는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방법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신앙 여부를 알아 보시려는 시험이었다(Grosheide). 이와 같은 시험은 신앙을 배양하는데 유익하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빌립과 안드레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12:20-22, 1:41-44 참조. 안드레의 말(9절)은, 이 부분 기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다. "물고기"라고 한 것(*)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안드레도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현실주의 견지에서 낙심하고 만 것이다.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마 14:21). 이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예수님은 선물을 관대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유대풍속에, 식사에 봉사하고 남은 음식은 그 봉사자들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은 저렇게 필경 받은 상급이 컸다.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18:15에 예언되었으니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15절 참조).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 이적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예수님을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까지 따라왔습니다. 또한 사방에서 예수님의 기적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까지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그 수가 5000명 정도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린이와 여자를 다 합하면 적어도 15000여명은 훌쩍 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수많은 병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호수 저편에서부터 예수님을 쫓았는데, 그랬다면 그들은 배를 타지 않고 호수주위를 둘러서 걸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잡기 위해서 그들은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길을 쉬지 않고 재촉해야만 했습니다. 산에 도달하였을 때는 사람들은 몹시 지쳤고 배는 주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치고 허기진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의 육체의 필요를 채우기로 작정하신 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먹이실 것인지 까지도 생각 하고 계셨습니다(6a).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 이전에 빌립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을 당신의 방법으로 먹이시기에 앞서 빌립의 마음이 어떤지를 확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의 마음을 이렇게 확인 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이적에 빌립의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빌립과 제자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이미 기적을 베풀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며 확인하고 싶으신 것은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수많은 이적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 속에 당신을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질문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현실적이고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이 베푸실 기적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상식에는 밝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그에게는 육체와 영혼을 먹이시는 공급자이며, 구원의 주님이요 생명의 떡이신 주님에 대한 확실한 이해도, 믿음도 없었으며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빌립은 ‘200데나리온으로도 오히려 부족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분의 품삯이었으니 200데나리온은 거의 한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결코 적지 않은 큰돈이었습니다.

 

빌립의 이러한 마음은 안드레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의 한 소년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2마리를 발견하지만 이내 자조 섞인 소리를 내어뱉습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가진 것은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고, 그것들은 현실의 엄청난 필요 앞에 너무도 초라하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그들의 공동체 속에 모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문제의 해결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당면한 현실의 문제와 해답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에 그 간극이 예수님에 대한 영적 시각을 잃어버리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년에게 손을 내어 밀어 그 보리떡과 물고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가지고 만여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예님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이 당신이 영과 육을 먹이시는 생명의 공급자요 하늘로 내려온 생명의 떡이 심을 빵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참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발견해야만 했지만, 기적에 취해버려 주님께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의 떡과 욕망을 해결해 주는 왕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공급자이심이 분명하시지만 그러나 떡만을 주시는 그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대속하시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값없이 내어 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이들을 뿌리치고 홀로 산으로 떠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하기 때문에 주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강한 것을 찾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조차 그 세상의 강한 것을 찾아 열광하며 예수님을 세상 임금 삼으려 아우성칩니다.

오늘 ‘나’에게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분이신지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세상임금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한편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예수님이 나의 진정한 공급자이시며 '생명의 떡'이 되심을 인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요구되는 수많은 필요들 앞에 우리 자신이 연약할 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안에서 강하신 주님을 신뢰하는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공급자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을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왕을 찾아 달음질 하는 가난한 신앙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나라 영원한 생명을 품고 이 땅을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큰 무리가 따르니(1-4)

예수님은 유월절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 한적한 곳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마가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너무 바쁜 사역으로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막 6:31-34). 그러나 그곳에서 더 큰 무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온전하지 못한 병자들이었습니다.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이었지만 들판에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기 위해 잠시 쉬는 것조차 중단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있어(5-13)

예수님은 굶주림 속에 있는 사람들을 먹이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남자만 오천 명으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빌립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빌립의 대답은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의 계산은 정확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름 모를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고, 이것이 기적의 원천이 됩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실천 없는 정확한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믿음의 헌신 앞에 계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드릴 때 기적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14-15)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일으킨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적인 왕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내가 가진 적은 것이라도 드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시고 섬기는 일꾼들에게 충성된 마음을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1-13절)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는 물음을 빌립에게 던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교회에게도 던지십니다.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 시험 앞에서 많은 경우 빌립처럼 반응합니다.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은 안드레의 경우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없거나 적을지라도 일용할 양식의 문제, 즉 우리의 현실적 필요를 직시하실 뿐만 아니라 기적을 베푸셔서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의지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드려진 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주님은 그것으로 많은 사람의 배고픔과 필요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는 기록처럼 그 분이 갖고 계시는 자원은 무한한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가진 자원을 헤아리는 현실적 계산보다는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그 분의 뜻과 능력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종이 요구될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일상 가운데 베푸시는 기적을 믿고 걷는 걸음이 되십시오.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14-15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신 것은 어떤 세상일까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제사 제도가 여전히 압도하는 가운데 정의와 정직과 공의가 실종된 현실을 무너뜨리고, 또 로마제국의 정치 체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등 없는 평화(Pax Romana)의 형식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해방자로 여기며 억지로 데려다 왕으로 삼아 정치적 방식으로 자유의 나라를 이루려 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가능할 일임을 예수님은 아신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피폐한 현실을 직시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방식을 철저히 따르는 길을 선택하셨고, 또 몸소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걸음 또한 그러해야지요.

기꺼이, 그리고 신실하게 드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명절을 맞이해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 있게 하시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명절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 속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직시하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빌립과 안드레의 시각을 뛰어넘는 순종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성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네 번째 행하신 기적으로서,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는지, 사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먹은 사람의 수를 들으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남자 성인만 줄잡아 오천 명으로 계산하였으니까 부인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만 단위가 넘는 어마어마한 인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실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되신 그분이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군중을 먹이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 가는 중에도 그들이 굶주린 채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이 굶주려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알아보시기 위한 시험하신 질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요6:26-27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궁극적인 관심에 대하여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요6:35에서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인류가 찾고 있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통해 우리 인류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궁극적인 관심은 그들의 육체적인 기아가 아닌 영적인 기아였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굶주리고 배고파 방황하는 많은 이웃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도를 해보신 분이라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절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저물어 가는 역사의 종말의 들에서 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을 위해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일을 네가 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시험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불가능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너무 엄청난 과제가 주어지면 일반적으로 너무 빨리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7절에서 먼저 빌립의 반응을 보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립은 이 질문을 받자마자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얼마만큼의 비용이 소요될 것인가를 정확하게 산출하여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은 들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한 일꾼이 하루 품삯으로 받는 보편적인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까, 약 7개월 노동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수학적인 머리를 가진 정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념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또 다른 제자 안드레가 나아와 예수님께 아뢰기를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적어도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드레의 태도는 빌립보다는 훨씬 더 믿음의 사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드레도 역시 거기에 희망을 걸지는 않고, 9절을 보면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드레는 빌립처럼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며, 도시락을 찾아 발견하였고, 그 어린아이의 헌신이 기적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사람,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가 불가능한 사람도 일단 찔러 보는 것이 기적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화)

미국 시카고에 크리스챤 명문학교인 휘튼대학이 있습니다.

하루는 이 학교의 교장인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에게 한 학생이 찾아와서 자기가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둘 형편인데 도움을 받을 수 없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학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이 학생에게 예외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학장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도울까? 를 생각하며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인도를 느껴서 이분이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백지가 있는데 우선 자네가 낼 수 있는 돈을 써 보게나”-“학장님, 저는 현재 전부 가진 것이 75센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75센트를 내겠다고 쓸 수 있겠나? -“아니 75센트가지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누가 알겠나? 그것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될지?”-학생은 주저하며 백지에 “75센트를 우선 지불함”이라고 쓰자, 에드먼 학장은 그 옆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라)쓰고, 나머지를 예수께서 채우시도록 기도하자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한 다음 그 서류에 자기 서명을 하고 학교 사무실에 제출하라고 했답니다.

그 이튿날 그 학생에게는 나머지 분량이 채워졌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물론 학장님이 주신 것이지만, 학장은 그전에 이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감당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우리가 만난 어려움이나 고통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께서 나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오고 있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자신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그러나--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의 뜻에 순종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 제자들은 본문의 기적을 통해 이 순종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명령셨고

막6:39에 보면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했습니다.

저는 이때에 제자들에게도 많은 망서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기대를 주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등등의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해온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순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작은 도시락을 들고 감사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순종했을 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늘 성도 여러분이 어려운 환경이나 상황을 만나셨다면 그 고통의 상황을 묵상하기보다는, 여기 오늘 이 상황에서 내가 순종해야 할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가를 묵상하시고 순종을 결심해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전도를 명하시면 전도하시고, 섬김을 명하신다면 섬기시고, 사랑을 명하신다면 사랑하시고, 용서를 명하신다면 용서하시고, 기도를 명하신다면 기도합시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가 순종을 실천하는 그 순간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3.주님께 기꺼이 작은 것을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적의 사건에서 어린아이의 역할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복음서에 모두 빠짐없이 기록된 사건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14:18에서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그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내게 가져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만일 이때 이 아이가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따라서 여기 이 기적에서 그대로 간과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헌신, 이것이 이 기적 사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 이 엄청난 사건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등장시킨 것 자체가 의미 심장하지 않습니까?

누가 이 상황에서 어린아이에게 기대를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아이도 쓰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명하거나, 권세있는 사람들이 꼭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어린아이 그가 가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그것이 도대체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것이 결정적인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사려 깊지 못하신 분들에게 자주 받는 부탁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를 좀 심방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 혹은 특별한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붙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러 이러한 배경을 가진 분인데 장차 큰 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철이 없을 때 그런 말을 믿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대화에는 한가지 잘못된 전제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 이러한 사회적 배경, 그리고 재정적인 여유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의 조건이라면 하나님도 그런 분들을 특별히 잘 모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목회하며 배운 것은 제가 인간적으로 기대한 사람은 별 볼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어른,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을 쓰셔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문에 나타난 기적이 일어났을 때, 제일 신나고 제일 감격한 사람은 제자들이었을 것이고, 다음은 어린아이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자들 편에서는 당연히 우리를 쓰셔야 할 주님이 이런 어린아이를 쓰시다니, 아니 이럴 수가? 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아이 편에서는 “주께서 내가 드린 도시락으로 이런 기적을 행하시다니”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감격이었고, 감동이었고, 보람이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성경의 역사요, 기독교의 역사요, 하나님 나라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있었던 작은 지팡이-그 지팡이가 홍해 바다를 열었습니다.

다윗의 손에 있었던 작은 돌맹이 몇개, -그것이 적장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마리아의 손에 들린 옥합병 하나-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역사적이고 기념비적 헌신이 되었습니다.

작은 액수였으나 과부에 손에서 드려진 그녀의 생활비 전부-그것이 얼마나 많은 시대에 걸쳐 성도들의 헌신을 자극하는 얼마나 갸륵한 헌신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한번 밖에 안나오는 작은 그러나 중요한 기도를 드린 야베스는 얼마나 존귀함의 표상이 되었습니까?

성도 여러분, 삶이 어렵고 힘드십니까?

그런데 혹시 이것이 시험의 때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험에 합격할 준비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절망만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그 고통 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내 명령에 순종을 결심하시겠는가?”하고 묻습니다.

순종합시다. 그러면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예화)

유명한 전도자 무디는 별로 배운 것이 없으신 분이셔서 말과 글이 서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 전도 집회를 인도할 때 그의 서투른 문법이나 철자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집회가 끝난 후 누군가가 무디에게 “한번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문법적인 오류가 있는 단어들을 사용했는가”를 지적했을 때 무디는 감사를 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신기하기만 하답니다. 그런데 궁금해서 묻습니다만, 선생님은 그 정확한 문법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얼마나 쓰임받고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아무 대답이 없는 그에게 제발 그 좋으신 달란트를 주님께 드려 쓰임 받으시는 인생을 사시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디는 종종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 도착할 때 유일한 후회는 “내가 만일 헌신만 했더라면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라고 후회하는 일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그 가진 것을 어떻게 드려 쓰임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헌신하여 이 상황을 돌파할 것인가 하는 시험마당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도 할수 있는 일을 찾아 감당하시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작은 것이라도 섬김과 드림을 통해 헌신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생각하면 할 수록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은 놀라운 일이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도 12바구니에 담을 만큼의 음식이 남았다는 기적이다. 과연 이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라면 그냥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라고 말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15절)에서처럼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하는 충동과 행동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 앞에서 본 사람들로서의 행동치고는 사실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이 표적의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표적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매우 의도되고 준비되고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5-6절).

 

예수님의 의도는 6장 전체를 통하여 드러난다. 요한이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이적을 설명하려고 하는 데서 분명하지만, 이 사건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표적이다. 그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곧 예수님이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진리다. 예수님은 무엇을 몰라서 이 표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또 굶주린 자들을 먹여 배부르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이적을 일으키신 것도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이해하고 임금을 삼으려고 하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이 이적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라는 말을 통해 그들이 역사를 통하여 기다려 온 그 선지자일 것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이 세상에서의 통치권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의 육적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 육신의 필요를 채워내는 것만이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아니었다.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과도 상통한다.